김기석목사(청파교회)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천국생활 2020. 5. 11. 09:08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김기석(20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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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요4:19-26
(2020/05/10, 부활절 제5주)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여자가 예수께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길고 긴 격절의 시간을 건너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얼싸안고 정을 나누진 못하지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신경림 선생은 ‘파장罷場‘이라는 시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으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지금부터 50년 전의 풍경이긴 합니다만 왠지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0주 동안 영상예배를 인도하면서 제 마음에 늘 떠올리던 광경이 있었습니다.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던 다니엘입니다. 그는 왕 이외의 신들에게 간구하는 자들을 사자굴에 던지겠다는 왕의 지엄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가정에서 화면을 열어 드리는 예배를 다니엘의 기도와 연결시키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비감스러웠습니다.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시137:1)고 고백했던 이스라엘 포로민들의 처지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속으로 ‘왜? 서둘러 교회 오지 않아도 되고, 편안하게 집에서 예배드리니 좋기만 하더구만’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어느 해외 신문 만평은 격리생활에 익숙해진 아무개 여사가 모처럼 예배당에 참석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푹신한 슬리퍼를 신은 그는 헐렁한 잠옷을 입고, 머리에는 그립을 말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예배당에 들어서다가 ‘아차’ 싶은지 당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그런 분이 안 보여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예배드리는 마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독일말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Gottesdienst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뜻의 ‘Gott’와 ‘섬기다’라는 뜻의 ‘dienen‘이 결합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예배라는 말일 겁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님은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향성’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터가 이해하는 고테스딘스트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Gott)이 일하신다(dienen)는 뜻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적 예배란 은총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것으로 출발하여, 인간이 그 은총에 기도와 찬송과 감사로 반응하는 상호 소통의 과정”(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옮김, 복 있는 사람, 2017년, p.89에 나오는 역자 주35)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자 선물입니다. 물론 온전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와 찬송과 감사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쿵’ 하는 장단에 우리가 ‘더쿵’ 하고 반응하는 것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때의 문제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마을 공동체로부터 따돌림 당하며 살던 한 여인과 예수님의 마주침과 대화,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열린 사마리아 선교의 가능성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아무도 우물을 찾지 않는 정오 무렵 여인은 홀로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은 늘 우연처럼 찾아옵니다. 존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아도 우리 삶도 그런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을 통해 변전을 거듭합니다.

늘 헛헛함에 시달렸던 그 여인은 예수를 만나 가슴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여인은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범상한 분이 아님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메시야라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탐색의 과정 가운데 여인이 주님께 여쭙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4:20)

여기서 말하는 ‘이 산’은 요단강 서안 나블루스 지역에 있는 그리심산을 가리킵니다. 해발 800미터 쯤 되는 산으로 에발산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 두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이 지역은 또 야곱에 대한 기억이 새겨진 장소인 베델과 세겜에서 가까웠습니다. 베델은 야곱이 형을 피해 달아날 때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고, 세겜은 근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정착생활을 했던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 성전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질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문화적·종교적 관습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바른 예배 장소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장소’를 묻는 질문에 주님은 ‘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4:21)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때’입니다. 때를 나타내는 헬라어 호라hora는 자연법에 따른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결정적 시간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혹은 마음과 만나는 그 결정적 시간이야말로 예배의 순간입니다. ‘예배하다‘는 뜻의 프로스키네오proskyneo는 ‘누구의 손에 입을 맞추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거룩함과 만났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털썩 무릎 꿇다
나찌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가 종전과 더불어 석방된 오스트리아 의사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한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 지옥과도 같은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에 벌어진 일을 들려줍니다.

석방이 된 며칠 후의 어느날 나는 꽃이 만발한 꽃밭을 지나 시골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가까운, 장이 서는 읍을 향해 몇 마일을 걷고 또 걸었다. 종달새가 푸드득하니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기뻐서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주위 몇 마일 안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땅과 드높게 보이는 푸른 하늘, 그리고 종달새가 즐겁게 부르는 노랫소리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문득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갑자기 나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 순간, 나는 내 자신이나 이 세상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마찬가지였지만 ─ 있다면 내 마음 속에 울려나오는 한마디뿐이었다.
“저는 저의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리고 주님은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저에게 응답을 하셨나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또 그와 같은 한 마디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이제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 시간부터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충선 옮김, 청아출판사, 2001년, p.149-150)

정경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그는 호젓한 들판을 홀로 걸었습니다. 몇 년 동안은 꿈에도 생각해볼 수 없었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두려움의 먹장구름이 걷히자 세상이 온통 아름답고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인간은 그리도 슬프고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자연은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득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무릎을 털썩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비좁은 수용소에서 바쳤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신 것만 같았던 하나님이 그를 감싸 안고 계셨고, 그의 든든한 설 땅이 되어 주셨음을 자각하는 순간, 뭔가 신령하고 압도적인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체험 이후 그는 고단한 현실을 딛고 일어설 힘을 얻었습니다.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털어내며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에 오를 힘 말입니다. 예배의 ‘때’란 이런 것입니다. 그런 체험은 인위적으로 노력하여 얻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조장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어느 순간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이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체험이 예배당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주님은 여인에게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4:23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번역은 이것을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옮겼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배를 드리는 이가 가져야 할 진실하고 애틋한 태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이 본문에 대한 오해에 불과합니다.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영’은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셨던 생수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과 접속시켜줍니다. 그 마음에 감득된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어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고 그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참된 이치’를 뜻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기 욕망을 내려놓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예배를 잘 기획하고, 각본에 따라 정밀하게 수행하는 것이 참 예배가 아닙니다. 물론 예배는 잘 준비되어야 하지만 본과 말을 뒤집으면 안 됩니다. 모처럼 현장에서 속개되는 이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끼리 즐겁고 반가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그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는 예배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말귀를 알아들었을까요? 아직도 미심쩍은 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인은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아직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볼 눈이 없습니다. 메시아의 현실은 저 먼데 어디 있는 것이지 자기 눈앞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즉각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는 사람들을 속박에서 풀어주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과 동행하는 이들입니다.

예배당에서의 예배는 구체적 삶의 자리로 이어져야 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성화하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등불 하나가 천년의 어둠을 밝힌다(一燈可破千年暗)는 말이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하늘빛을 가져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이러스는 소리 없이 퍼져나가 우리 삶을 제약하지만, 우리의 선한 뜻과 의지가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퍼져나가 세상 구석구석을 채울 때 삶이 아름다워질 겁니다. 주님이 앞서 가시니 우리가 뒤따라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의 우리 삶이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새컬럼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목수 성 요셉’

김기석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목수 성 요셉’(oil on canvas, 137 *101cm, 루블 박물관)



“오오 눈부시다/자연의 빛/해는 빛나고/들은 웃는다”. 괴테의 ‘오월의 노래’ 첫 부분입니다. 괴테가 살았던 독일의 기후도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5월은 사람들에게 설렘을 안겨줍니다. 윤석중 선생님이 가사를 쓰신 ‘어린이날 노래’ 역시 싱그러운 자연을 노래합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그런데 가정의 달인 오월의 첫날은 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를 향상하기 위해 제정된 ‘세계 노동자의 날’입니다.



노동은 신성합니다.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에 하나님은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다스림은 물론 함부로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돌보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에덴동산에서 일하라고 부름 받은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때 일은 지긋지긋한 고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당신 속에 있는 생명력과 창의력이 외적으로 발현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노동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자연의 품 안에서 노동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 동료 인간에 대한 존중이 그 바탕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창조적인 노동은 우리 속에 깊은 결속 감정을 자아냅니다.



우리는 예수의 직업이 '목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목수라고 번역된 단어 '테크톤tekton‘은 나무나 돌을 다루는 장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건축 노동자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솜씨 좋은 테크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고향에 가서 회당에서 가르쳤을 때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이 그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라서 말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막6:2) '그 손'이라는 표현이 이채롭습니다. 예수의 손을 떠올려봅니다. 마디조차 보이지 않는 곱디고운 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굳은 살이 박힌 손, 마디 굵은 손, 더러 흉터도 보이는 손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노동자가 지혜의 말을 한다는 것이 낯설었을 테니까요.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 가족교회(Sagrada Familia)‘는 놀랍게도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복권시키고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성 가족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에서 요셉은 드러나지 않거나, 주변적인 인물로 취급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성 가족교회를 설계하고 시공한 가우디(Gaudi)는 요셉을 성가족의 중심인물로 내세웠습니다. 성 가족 교회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에는 요셉이 일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의 머리 위로는 분주히 날아다니는 일벌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이름도 빛도 없이 가정을 돌보는 가장들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17세기 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를 아는 이들은 금방 ‘촛불’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의 그림에 촛불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로렌 주의 빅쉬르세유에서 제빵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결혼 후에 뤼네빌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일찍부터 그림에 두각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종교개혁 이후에 신-구교간에 벌어졌던 30년 전쟁(1618-1648년) 시기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인심을 각박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역병까지 창궐했습니다. 그는 황폐해진 고향을 벗어나 파리로 이주하여 루이 13세의 궁정화가가 되었습니다. 루이 13세는 조르주의 ‘성 이렌느의 간호를 받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는 빛과 어둠의 조화 혹은 대비를 통해 대상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의 대가였습니다. 그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한 세대 이전의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였던 것 같습니다. 조르주는 프랑스 매너리즘 전통에서 탈피하여 인물과 소재, 기법 등을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주사위 놀이꾼’, ‘점쟁이’, ‘카드 사기꾼’, ‘허디거디 연주자’ 등의 풍속적인 작품도 많이 그렸지만 우리가 그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가 그린 성서 인물화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아내에게 비웃음 당하는 욥’입니다. 그림 속의 욥은 심신이 다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천으로 하체만을 가린 그의 모습은 그가 ‘벌거벗기운 존재‘ 즉 인생을 쓰라림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여줍니다. 쭈글쭈글한 가슴과 배, 그리고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느다란 팔은 그의 곤경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촛불을 손에 든 아내는 마치 거인처럼 그의 위에 서서 그를 비웃습니다. 욥은 고개를 들어 그런 아내를 바라보지만, 퀭한 그의 눈은 초점이 없습니다. 화가는 어쩌면 욥의 모습 속에서 그 참담한 시대를 앓아야 했던 동시대인들의 모습을 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르주 라 투르의 종교화들은 형태의 단순함은 물론이고 등장인물도 매우 제한적입니다. 인물들의 동작도 절제되어 있어서 감상자들은 화면에 옮겨진 사건보다는 각 인물의 고뇌 혹은 정신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촛불은 빛과 어둠을 다루기 위한 그 나름의 장치이겠습니다만, 인물의 고뇌를 심화하는데도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아궁이불은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을 하게 하지만 촛불은 생각하게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아궁이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몸을 움직여 장작을 옮겨와야 하고, 가끔은 부지깽이로 장작들을 재배열해야 합니다. 그러나 촛불은 한번 밝혀 놓으면 그만입니다. 일렁일 때도 있지만 금방 수직의 중심을 잡고 일어섭니다. 촛불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입니다. 그렇기에 촛불 앞에 앉은 사람은 자기의 내면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목수 성 요셉’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늙은 목수 요셉과 어린 예수입니다. 작업장에서 요셉은 주문받은 물건을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닥에는 공구들과 대팻밥이 놓여 있습니다. 이미 진행되어온 작업의 흔적입니다. 그러나 어지럽지는 않습니다. 마치 요셉의 성품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마 주름이 깊게 패인 요셉의 얼굴은 평온해 보입니다. 지친 기색은 없습니다. 자기 일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노동은 거룩해 보입니다. 죽지 못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눈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촛불을 든 채 작업장을 비춰주는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봅니다.



예수의 모습은 맑고 깨끗합니다.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촛불이 꺼질세라 한 손으로 바람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은 마치 빛을 투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촛불이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있으면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지만, 제게는 마치 예수의 얼굴에 드러난 하늘빛이 촛불을 거쳐 억센 요셉의 팔과 이마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광원은 촛불이 아니라 예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을 이어주고 있는 빛은 부자지간에 형성된 굳건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조르주는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은 짙은 어둠 속으로 밀어넣고 있습니다. 말을 주고받고 있지는 않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깊은 결속 감정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요함 속에 깃든 신성함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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