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

천국생활 2020. 2. 17. 16:11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

김기석(202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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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
막7:31-37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였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유랑하는 설교자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가 주춤해지자 봄의 불청객 미세먼지가 찾아왔습니다. 이래저래 불편합니다. 그래도 우수 절기를 앞둔 때인지라 산수유는 벌써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삶은 계속됩니다. 그러니 힘겨워도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살아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유랑하는 설교자라고 말합니다. 랍비들처럼 어느 한 곳에 머물며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바람이 임의로 불듯 어떤 그리움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방 지역이라고 하여 외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마가는 주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더불어 정결한 삶에 대해 논쟁을 벌이신 후에 두로 지역으로 이동하셨다고 말합니다. 두로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조용히 지내기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기적 행위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은 많은 이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그리스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당혹스런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막7:27).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냉정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짐짓 냉혹하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과의 소모적인 논쟁으로 예수님이 심정적으로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저의 견해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막7:28). 딸의 치유를 원하는 어머니의 절박함은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언어의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었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어둠이 걷힐 날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의 일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습니다. 시돈은 두로보다 북쪽에 있는 지중해변의 도시입니다. 시돈을 거쳐서 간 데가볼리 지역은 갈릴리 호수의 동편 지역입니다.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한 곳은 아마 없을 겁니다. 괜히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이것은 이사야 9장의 예언과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들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고 말한 이사야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사9:1)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가가 전하는 주님의 행로는 이 예언의 실현이었던 셈입니다. 주님은 ‘어둠이 걷힐 날‘을 가져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주님은 사람들이 데려온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야말로 어둠 속에 갇힌 사람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이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막4:12) 말씀하셨습니다. 스승과 함께 있으면서도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8:18)고 책망하시기도 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어쩌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귀 먹었다고 번역된 단어 코파스kophos는 시력 혹은 청력이 ‘무디다’, ‘둔하다’는 뜻입니다. 말 더듬는다mogilalos는 말 역시 간신히, 힘들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왠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 사람을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십니다.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실 수 있는 분이 그를 따로 데려가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마가복음에는 이와 유사한 장면이 또 나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벳새다의 눈먼 사람을 만나신 주님은 그를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막8:23).

‘무리‘ 혹은 ‘마을‘은 익숙한 세계, 곧 통념이 작동하는 현장입니다.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익숙한 세계는 정신의 늪일 때가 많습니다. 익숙한 세계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기 어렵습니다. 모든 게 당연한 세계에는 감사가 없고 경탄이 없고 새로움이 없습니다. 시인 김승희 선생은 그래서 “당연의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의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그는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라”고 도발합니다. 이런 내용이 담긴 시의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2’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통념과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따로 불러 세운 것은 그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자기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없는 법입니다. 가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 훈련을 받은 이들의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머물고 있는 세계가 너무 협소하다는 사실을 알고 답답함을 느끼지만, 그 신앙의 틀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어도 공감은 하면서도 께끔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틀 밖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그를 따로 불러 세우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언의 성취
그런데 치유의 과정이 좀 독특합니다.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게 당시의 치유자들이 하던 행태를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침에 있는 치유력을 사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식을 사용하셨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을 당연의 세계, 익숙한 세계에서 끌어내려 하시는 주님이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하는 게 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었다는 말은 은유적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침을 뱉는다는 것은 대개 모욕의 의미인데 주님이 침을 뱉으신 까닭은 성경에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탄식하다는 뜻의 스테나조stenazo는 뭔가에 눌려 답답한 상황, 혹은 그로 인해 터져나오는 내적 신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서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8:23)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8:26).

주님의 탄식은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답답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낸 것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에바다‘는 명령법 수동태로 ‘열려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것이 언어인데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에 이 아람어가 몇 개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꽤 됩니다. 압바, 달리다쿰, 마라나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등이 그것입니다. 민중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말을 번역하지 않고 남겨둔 셈입니다. 표준어에 비해서 사투리 혹은 방언에는 그 지역 사람들의 정서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서울말을 쓰던 사람들도 고향 사람 만나면 고향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투리를 통해 정서적 일치 혹은 연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에바다‘라는 외침이 떨어지자 그는 곧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고 합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 역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의 날이 올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사35:5-6)

∙그가 하시는 일은 훌륭하다
결국 이 치유 이야기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 대한 놀라운 치유 이야기이지만,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통해 온전함을 회복한 그 사람은 말을 똑바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치유의 이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을 넘어 그가 메시아적 질서 속에 들어갔음을 암시합니다. 예수와 만나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만났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말대로 하자면 먹구름을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던 사람이 마음 속 구름이 스러져 푸른 하늘을 보게 된 겁니다(‘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머리를 덮은 쇠항아리를 하늘로 알고 있던 사람이 그 쇠항아리를 찢고 맑은 하늘을 보게 된 겁니다. 시인은 “아침 저녁/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볼 수 있는 사람은/외경(畏敬)을/알리라.”라고 노래합니다.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고, 차마 발걸음도 조심스럽게 살 것입니다. 이 사람의 경우 예수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거나, 쭈뼛거리며 살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습니다.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은 침묵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손자 손녀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도 이런 것일 겁니다. 얼마 전에 색맹으로 태어나 녹색과 적색을 구분하지 못하던 남자가 색맹 교정용 안경을 끼고 감동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아내가 생일 선물로 선글래스를 선물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안경을 쓰는 순간 뭔가 달라진 것을 느낍니다. 하늘도 보고 꽃도 보더니 울먹이기 시작합니다. 안경을 벗었다 다시 쓰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이들 눈을 들여다보라고 말합니다. 귀여운 아이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편은 돌아앉아 눈물을 훔칩니다. 그 눈물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불행의 무게를 떨쳐버린 사람과 목격자들은 주님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일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말리면 말릴수록 더욱더 널리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했습니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막7:39). 예수 믿는 사람들의 행적이 이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스스로 말 잘 한다, 영적으로 밝다 하는 이들의 말로 인해 개신교회는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해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들어야 할 말을 바로 들어야 우리 영혼이 맑아집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해야 할 말은 할 수 있어야 우리는 당당해집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에바다’라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 가슴에도 우렁우렁 들려오기를, 그래서 우리의 귀가 밝아지고 혀가 풀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뭉크의 ‘병든 아이’

김기석

에드바르 뭉크의 ‘병든 아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병에서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딸 때문에 마음이 다 졸아붙은 한 엄마의 편지였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낫게 해주시리라 믿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이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딸의 고통이 마치 자신의 믿음 없음 때문인 것 같아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이 주인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내 아이는 낫지 않느냐?’는 질문 앞에서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생명이란 ‘살라는 명령’이고 ‘명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생의 무게에 짓눌려 미처 삶의 의미를 구성할 여유조차 없이 그저 삶을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음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그런 고통스런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의 곁에 다가서서 그들의 비빌 언덕이라도 되어야 합니다. 눈물을 쏟든, 고함을 내지르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하면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절규’라는 그림을 떠올립니다. 세기말적 공포를 담아낸 그 그림은 한 번 본 사람들은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작품이 뭉크의 대표작인 것은 사실이지만 뭉크가 왜 삶을 그렇게 공포스럽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뭉크의 집안은 노르웨이의 명문가였습니다. 그 집안에는 예술가, 작가, 주교, 빼어난 역사가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의술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가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뭉크는 일찍부터 삶이 비극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누나인 소피는 그로부터 9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른 형제도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또 다른 누이는 정신 질환을 앓았습니다. 뭉크는 늘 자기도 결국 병에 걸려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는 “질병, 정신이상, 죽음 이라는 검은 천사들은 나의 요람을 넘겨다보았을 뿐만 아니라 일평생 나를 따라다녔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미혼이었던 이모 카렌이 집안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카렌은 뭉크의 예술가적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해준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오슬로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했지만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들은 외국에서 미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화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뭉크는 마네, 코로 등의 화풍을 익힐 수 있었고 플로베르나 에밀 졸라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더욱 과묵해진 아버지와 버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는 노르웨이에 유입된 프랑스의 카페 문화에서 정신적 출구를 찾았습니다.



뭉크가 스물 세 살 되던 해인 1886년에 완성한 ‘병든 아이’(the Sick Child, 119.5 × 118.5 cm, Nasjonalgalleriet, Oslo)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 그의 누나 소피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은 아주 좁은 방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움직일 틈조차 없어 보입니다. 마치 소피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곤경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폐결핵에 걸린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명보다는 죽음 쪽에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보입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기에 그는 커다란 베개를 침대 머리에 세워놓고 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베개 위로 보이는 검은 색 프레임은 거울일 겁니다. 거울은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필수품입니다. 그맘때면 누구나 나르시스가 되는 법입니다. 거울을 보고 또 보며 자기에 도취할 때입니다. 하지만 소피에게 그런 열정은 이미 사그라든지 오래입니다. 거울이 가려진 것은 그런 정황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침대의 좌측에 있는 문갑 위에는 약병이 놓여 있습니다. 희미하게 보입니다. 약조차 이젠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것일까요? 오른쪽 발치께엔 유리컵이 보입니다. 그게 어쩌면 소피에게 남은 생명의 불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약병과 물 컵은 소피의 다리를 덮고 있는 초록빛 담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피 곁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카렌일 겁니다. 죽어가는 조카를 보며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기에 그는 소피의 손을 가만히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무력감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그가 입고 있는 색은 검은색입니다.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색입니다. 단정하게 묶은 그의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맥없이 흐트러진 소피의 머리카락과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소피의 얼굴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이 비극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미 체념한 것일까요?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인 것일까요? 소피의 얼굴은 평안해 보입니다. 그런데 소피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자기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이 아닙니다. 창가에 드리워진 검은 커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희미하게 보이는 흰색이 그곳이 창문임을 암시합니다. 뭉크는 커튼을 검게 칠한 후 그 색을 조금씩 벗겨낸 것으로 보입니다. 가혹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러고 보니 그림 전체에 색을 벗겨낸 흔적이 드러납니다. 마치 푸른 색 녹이 낀 것처럼 보입니다. 인상주의 화풍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뭉크가 자기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습니다. 빛이 들어오는 곳이 보이지 않는데도 소피의 얼굴은 빛으로 충만합니다. 슬픔과 절망이 그를 완전히 삼킨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아서일까요? 소피가 기대고 있는 흰색 베개는 마치 후광처럼 보이지 않나요? 자기에게 품부된 삶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이들은 그들의 사회적 성취와 관계없이 아름답습니다. 



이 그림에서 내 눈을 사로잡고 있는 인물은 아픈 소녀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입니다. 얼굴조차 드러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문득 엔도 슈사쿠의 소설 <사해의 호반>이 떠오릅니다. 동양인의 정서에 부합하는 예수상을 천착하던 그는 이 작품에서 예수를 전능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그립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기적을 구하지만 그는 기적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병자를 낫게 하지도 못하고, 일거에 로마를 물리칠 영웅적 행동을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는 버림받은 병자들 곁에 머물면서 안타까워하며 그들과 밤을 지샐 뿐입니다. 엔도는 진정한 기적은 병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의 곁에 머물며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영혼의 온기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에서 세상의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의 옷자락을 보는 것은 좀 과한 상상인가요? 이 그림은 오늘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쾌적한 곳이 아니라 어둡고 답답한 곳을 찾아가 머물 때, 하늘의 빛과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아픔을 외면하면서 거룩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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