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김기석(20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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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도 우리는 마음 졸이며 지냈습니다. 두 달간 이어진 호주의 산불로 수많은 동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기후 위기가 얼마나 재앙적인지를 보여준 사례입니다. 미국과 이란이 전쟁의 위기를 가까스로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격추되는 참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정치 상황도 혼란의 연속입니다. 중첩된 어둠 혹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세속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현실을 성경 혹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보는 일에 익숙합니다. 시각 조정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이스라엘은 출애굽 사건, 광야에서 맺은 언약,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소명, 성전 건축 등 일련의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그들은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멀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평등 사회의 꿈도 퇴색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 그들에게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익숙해진 삶의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상들이 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전 6세기에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보물들을 약탈당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참극을 겪은 그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은 회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나?‘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호의를 거두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없나?‘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고통을 겪을 때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당면한 문제가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여성신학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말에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두려움은 공기도 빛도 없는 좁은 공간이다. 그 안은 숨 막힐 듯 답답하고 어둡다. 돌아설 공간조차 없다. 오직 한 방향만 볼 수 있을 뿐이다.”(Barbara Brown Taylor, The Preaching Life, Cowley Publications, 1993, p.93). 두려움과 어둠, 그리고 절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자기가 직면한 현실의 실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알아차린다 해도 해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던 질문은 이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가 송두리째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
∙일꾼을 세우시는 하나님
그때 하나님은 눈 밝은 한 사람을 세워 다른 이들의 눈을 열어주게 합니다. 그가 한 개인인지 집단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를 ‘고난 받는 종’이라고 부릅니다. ‘종’이라는 용어는 말은 그의 신분이 천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위임된 직무를 공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의 종을 보아라’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원래의 문장은 ‘보아라, 나의 종을’입니다. ‘보아라’(hen)라는 단어가 맨 앞에 나옵니다. 이 단어는 본문을 41장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앞장에서 이사야는 우상들의 허무함을 가리킬 때 이미 이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참으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가 하는 일도 헛것이니, 너희를 섬겨 예배하는 자도 혐오스러울 뿐이다.”(사41:24)
“보아라, 이 모든 우상은 쓸모가 없으며, 그것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일 뿐이요, 헛것일 뿐이다.”(사41:29)
새번역은 24절의 맨 앞에 나오는 ‘hen’ 그러니까 ‘보아라’를 생략하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42장 1절에 나오는 ‘보아라’라는 단어는 우상들의 허무함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먼저 사람을 세우십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야기를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우리의 손과 발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난받은 종’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를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는 사람,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붙들어 준다는 말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준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지지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택한 사람이란 표현 속에 담긴 것은 모든 일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있지만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러한 소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오셨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1:11)
하나님은 그에게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영을 뜻하는 루아흐(ruah)는 하나님의 숨을 뜻합니다. 그 숨은 뭔가를 창조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숨을 쉬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실 때 먼저 당신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충만함 속에 있을 때 일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고난 받는 종이 해야 할 일은 뭇 민족에게 공의(mishpat)를 베푸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무너진 온갖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도록 하는 것이 그의 직무입니다. 그 관계 회복의 대전제는 ‘아낌과 존중’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 마음이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편협한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세상을 무한경쟁의 나락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편협한 신앙이 세계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분열을 정당화하기 위해 호명되는 현실이 슬픕니다. 현실이 이러하기에 더욱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이들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품성
하나님의 일꾼들이 일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거리에서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드러내거나, 과시하거나, 선동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장애인들과 그룹 홈을 하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탄절에 어느 교회에 단체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품고 교회에 갔는데, 교회 앞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불우이웃과 함께 하는 성탄절’, 함께 갔던 모든 분들이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그 추운 날 교회 마당에서 바베큐를 했는데, 여러 사람이 축사를 하면서 정작 당사자들이 말할 기회는 주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소외였습니다.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일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를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 자체가 오만함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습니다. 그들의 예민한 영혼은 취약해진 사람들과 가련한 사람들의 형편을 잘 헤아립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사회적 세계에서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의 벗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정결법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그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불결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몸에 손을 대셨고,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수용되고 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마음을 열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모두 상한 갈대처럼 가슴에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대개는 그 아픔을 숨기려 합니다. 그 아픔이 누군가에게 약점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한 갈대 같은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면 우리는 하늘의 선율을 노래하는 갈대 피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런 숨을 불어넣고 싶어하십니다.
힘겨운 인생길을 걷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 속에 심어주셨던 빛이 죄와 욕심으로 인해 흐려졌습니다. 우리도 선하게 살고 싶고 맑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선함의 불씨는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불씨를 나누어줄 이들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는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또한 새로운 삶을 꿈꿉니다. 오늘 우리는 날마다 만나는 이들 속에 숨겨진 불을 꺼뜨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불이 다시 타오르도록 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눅12:49) 하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진리로 공의를 베풉니다. 진리를 뜻하는 에메트‘emeth는 확고함, 신실함, 믿음직함, 안정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는 언제나 지향을 분명히 하고 삽니다. 가끔 흔들릴 수는 있지만 지향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연약한 이들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세상을 열기 위해 그는 끝없이 노력합니다.
∙새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
이런 일은 하나님의 종이 해야 할 일이지만 실은 하나님이 이미 하고 계신 일입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그분의 사랑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시인들도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랴?“(시118:6)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편에 서려고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말하는 것은 협잡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의를 이루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둔 세상의 빛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갇힌 사람을 해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가두는 일은 실로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욕망에 갇혀 살고, 어떤 이들은 원망에 갇혀 살고, 어떤 이들은 가난에 갇혀 살고, 어떤 이들은 이데올로기 혹은 자기 의에 갇혀 삽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본문을 읽으시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4:18). 삶은 복잡하지만 지향이 단순하면 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들은 이런 비전을 품을 수 없습니다. 새번역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9절은 ‘보아라’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보아라) 이제 내가 새로 일어날 일들을 예고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꿈을 그의 종들에게 숨기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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