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 안에서 살다
김기석(2019/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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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만 저는 오늘 마틴 루터에 집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늘의 교회 상황이 매우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한 동안 개신교 전래 이후의 폭발적 성장을 자랑했습니다.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자화자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빠르게 거품이 빠지고 있습니다.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이전에 교회가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고, 교회는 변화하는 세상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외적 성장에 골몰한 나머지 내적인 성숙을 도외시한 결과입니다.
언론은 개신교회와 목사들의 추한 몰골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따라 성실하게, 경건하게 사는 이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은 대중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도취에 빠진 목회자들의 이름이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들은 게토화된 사고와 언어로 자기들만의 철옹성을 쌓아올린 채 교회를 사유화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빙자하여 대중들을 선동하고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랑과 평화와 일치의 복음을 전해야 할 기독교가 미움과 갈등과 분열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영이 사람들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민적 교양조차 없는 이들이 사람들의 영적 지도자를 자처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속상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칭하셨지만, 우리는 그 거룩한 소명을 받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혼돈과 어둠을 만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개신교회는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습니다. 혹세무민하며 면벌부(indulgence)를 팔아 제 배를 불렸던 타락한 중세의 교회와 오늘의 개신교회가 뭐가 다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일부 목사들이 디트리히 본회퍼의 저항을 자기들의 정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유하는 현실이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독일 교회는 그 불의한 권력 아래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히틀러가 매우 위험한 인물임을 간파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국교회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목회자들에게 지원금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함으로 그들을 고사시키려 했습니다. 그때 일단의 젊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시작한 것이 ‘고백 교회‘ 운동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도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사람들을 그 운동에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주저했습니다. 에큐메니칼 협의회의 책임자인 앙리오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그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 내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은 결단할 때이지 하릴없이 하늘의 신호를 기다릴 때가 아닙니다. 하늘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은 난제의 해결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에큐메니칼 협의회도 결단해야 합니다. 에큐메니칼 협의회는 오류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독일에 있는 형제들─이 대단히 중요한 결단을 날마다 새롭게 내리는데도, 오류를 걱정하여 행동하지 않고 입장 표명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내가 보기에 사랑에 위배되는 것 같습니다. 결단을 늦추거나 결단의 때를 놓치는 것은 믿음과 사랑으로 잘못된 결단을 내리는 것보다 큰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에버하르트 베트게, <디트리히 본회퍼>,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4년, p.550)
오류를 범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말이 통렬합니다. 1521년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납치되어 숨어 지낼 때 루터가 동료인 멜랑히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감하게 죄를 지으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이기신 승리자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신뢰하고 기뻐하십시오.” 옳고 그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면서 용감하게 일에 뛰어들라는 말입니다. 루터의 그 말이 본회퍼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본회퍼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고백, 오늘날 독일에 필요한 것은 고백입니다.…이 단어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대의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잠자고 있는 자로 발견되어서야 쓰겠습니까?” 히틀러가 거짓 주임을 폭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백‘이란 우리의 죄를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과 같은 분이 누굽니까? 주님은 약한 사람을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며, 가난한 사람과 억압을 받는 사람을 약탈하는 자들에게서 건지십니다. 이것은 나의 뼈 속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시35:10) 독일의 고백교회는 바로 이런 신앙에 따라 살기로 작정한 이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어둠의 시대
오늘의 본문은 요시야 임금 시대에 벌어졌던 종교개혁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개혁 운동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유다 역사의 일부를 살펴야 합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인 므낫세 임금은 열 두 살에 왕이 되어 쉰 다섯 해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선한 왕으로 평가받는 히스기야의 아들입니다. 히스기야는 대대로 특권을 누리며 살던 귀족들의 권한을 축소시켰습니다. 귀족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대놓고 저항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므낫세가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그들은 왕을 에워싼 채 급격한 정치적 변동이 위험할 수도 있다며 강대국의 그늘 아래 머무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왕을 설득했습니다. 므낫세는 귀족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칩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었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자면 일반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에 우상숭배도 창궐했습니다. 므낫세는 온갖 이방제의를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세라 목상을 깎아 성전 앞에 세우기도 했습니다(왕하21:7). 지방 성소인 산당은 지방 토호들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손을 잡고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 시대를 가리켜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 시대(왕하21:16)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정을 펼치던 므낫세가 죽자 그 아들인 아몬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몬도 아버지처럼 살다가 결국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남왕국 유다의 암흑기였습니다. 요시야는 아몬의 아들로 겨우 여덟 살에 왕이 되어 31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왕좌에 오른 지 18년째 되던 해 요시야는 퇴락한 성전을 수리할 것을 명합니다. 어느 날 힐기야 대제사장이 성전 수리 중에 발견했다며 서기관 사반에게 율법책을 가져왔습니다. 사반은 율법책을 왕 앞에 가져가서 큰소리로 읽었습니다. 학자들은 그것이 신명기 역사서의 일부였을 거라고 말합니다. 오랫동안 잊혀졌거나 망실되었던 것이 발견된 셈입니다. 왕은 그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는, 애통해하며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왕하22:11). 왕은 신하들을 훌다 예언자에게 보내서 그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해석해달라고 청합니다. 여성 예언자인 훌다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훌다는 ‘깊이 뉘우치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옷을 찢고’, ‘통곡’한 요시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 땅에 내리려던 재앙을 유보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에 사로잡혀
그 소식을 들은 요시야는 사람을 보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소집했습니다. 왕이 성전에 올라갈 때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물론이고 모든 백성이 함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서기관들은 성전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낭독하여 들려주었습니다. 시내산 언약을 맺을 때 모세가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과 원칙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왕이 먼저 “주님을 따를 것과, 온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과, 이 책에 적힌 언약의 말씀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언약“을 주님 앞에서 세우자 온 백성도 그 언약에 동참했습니다.
바야흐로 무너졌던 신앙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국가적 규모로 거행되었습니다. 권력자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남이야 어찌되었든 나의 욕망이 채워지면 그만이라는 이기적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국가의 중추로 재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사회 개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은 ‘코스모스’(cosmos)의 번역어인데, 일반적으로는 세상을 뜻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대중, 그리스도의 뜻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호의적인 사람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소명은 그렇게 편협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개혁의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가르침입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겨났습니다. 무생물로부터 고등생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숨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외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흔하고 사소한 것 속에서 영원을 봅니다. 경외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하나의 장터가 되고 맙니다. 생이 선물이요 신비임을 아는 사람은 어떤 대상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입니다.
예수님은 육화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들,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사람들 곁에 다가서셨습니다. 성과 속,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등 사람을 가르는 장벽을 철폐하심으로 서로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이 세상을 갈라놓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불안을 만들어냅니다. 불안은 우리 삶의 토대를 갉아먹는 쥐와 같습니다. 불안의 해독제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신뢰와 감사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신뢰하고 감사하는 삶을 의도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교회는 고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함의 기쁨을 맛보는 곳이어야 합니다. 독일출신의 학자인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행복이란 에워싸이는 것, 즉 어머니 품 안에 보호된 상태의 모사물”이라고 말합니다(<미니마 모랄리아>, p.159). 교회는 가슴 시린 사람들을 에워싸는 어머니의 품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 점에서 부족함이 많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대로 지금은 ‘고백’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 길들여졌는지를 아프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진실합니까? 지금 이 땅에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을 닮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시 다짐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주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개혁되어야 하는 것은 제도로서의 종교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지향이 먼저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맺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도 새로운 언약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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