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더 깊은 곳으로

천국생활 2019. 10. 10. 10:14

더 깊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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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곳으로
히5:11-14
(2019/10/06, 세계성찬주일)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여러분의 귀가 둔해진 까닭에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위기에 처한 교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빕니다. 태풍 미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로하시고 재기의 용기를 불어넣어주시기를 빕니다. 돼지열병으로 인해 파주, 김포, 강화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돼지들이 살처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처리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공무를 수행하는 것이라 해도 산 목숨을 거두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큰 부담을 안겨주게 마련입니다. 주님이 그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이래저래 세상에서 타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각 교단 총회에서 결의하거나 논의한 일들은 우리 사회의 일반 상식을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다면서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말을 반성조차 없이 사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말일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광장에 나가서 자기들의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의사 표현은 진중하고 담백해야 합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5:37).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용당하고 동원된 기독교인들이 누구보다 가련합니다.

계몽주의의 모토는 ‘sapere aude’, ‘감히 스스로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소스가 불분명한 가짜 뉴스에 속아 영혼까지 팔아넘기면 안 됩니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래서 질정叱正받기를 꺼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거짓의 도구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지향하며 사는 사람인지를 늘 생각하며 사는 것, 하나님께 길을 여쭈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가 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며 역사를 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증오와 혐오로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없습니다.

생명과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하는 기독교인들이 혐오의 도구로 활용될 때 교회의 문은 닫힐 겁니다. 주님의 탄식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요즘 아주 괴롭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마23:37). 이 말씀이 가슴에 우렁우렁 울려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의 교회들 때문에 가슴에 멍이 드셨습니다.

∙먹감나무처럼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숙한 믿음의 자리에 이르렀어야 할 신자들이 여전히 초보적인 지경에 머물고 있는 현실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다시 배워야 하는 현실은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아기 때는 젖을 먹어야 하지만, 조금 더 자라면 이유식을 먹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여전히 젖만 고집한다면 곤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젖만 먹으려 하는 신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달콤한 이야기에만 반응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상처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는 살면서 입은 상처와 아픔의 기억들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잠깐 아프다가 낫는 상처도 있지만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아물지 않는 상처도 있습니다. 상처는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상처가 치유되려면 먼저 정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무고하게 당한 이들의 억울함이 해소되지 않으면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불의는 단죄되어야 하고, 희생에는 보상이 뒤따라야 합니다. 일제시대의 정신대 문제나 징용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은 여전히 정의가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폭력에 의해 어려움을 겪은 이들의 한도 풀려야 합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벌어진 일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여 그 문제에만 붙들려 살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자산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자기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먹감나무는 제 몸에 난 상처를 그윽한 무늬로 바꿀 줄 압니다. 내 상처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아픔과 눈물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 곁에 머물려 할 때 우리 상처는 무늬로 바뀌게 됩니다.

히브리서 5장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모두의 구원자가 되셨는지를 인상깊게 그려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와 같이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을 느끼시는 분이었습니다. 목석처럼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분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다 맛보셨기에, 주님은 우리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히5:2). 놀라운 고백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영적 분별력
믿음의 사람들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각을 갖춰야 합니다. 영을 식별하는 능력이야말로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이러저러한 생각이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식별하지 못할 때 우리는 악한 자들의 꾀에 넘어가게 됩니다. 분별의 기준을 딱 정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며, 죄에 대한 슬픔과 눈물, 그리고 평화스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 영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쉬워집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우리에게 슬픔과 불편함,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키고, 두려움을 심어주기에 그리스도를 따라 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로버트 훼리시, <관상과 식별>, 심종혁 옮김, 성서와 함께, 1996, p.87 참조). 간단합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이들일수록 자기 상처만 헤아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초보적 믿음의 자리에서 벗어나 더 깊은 영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두렵더라도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멋진 세계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모험을 시작해야 합니다. 호수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영에 익숙하지 않을 때는 가장자리를 맴도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영에 익숙해지면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매일 안전한 가장자리에서 머물면 수영은 늘지 않습니다.

믿음도 그러합니다. 자아의 한계에서 벗어나 이웃들의 아픔의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을 나눠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불의한 세상에 맞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변두리로 내몰린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의 아픔과 눈물에 응답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윤리신학자인 리차드 니버는 이런 사람을 일러 ‘책임적 자아’(responsible self)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세상의 아픔을 우리 속으로 끌어들여 정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몸으로 체득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 믿음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김기석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1226년 10월 3일, 기독교 2천 년 역사상 가장 그리스도를 많이 닮았다고 상찬받는 성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세속적인 권력까지 손에 쥔 교권주의자들이 주님의 교회를 망가뜨려 놓고 있을 때, 그는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가난의 영성’을 주창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프란체스코가 아직 세속적인 생활에 몰두하던 어느 날 꿈에 다미아노 성자를 만났던 일화를 들려준다. 



성인은 누더기를 걸친 채 맨발로 지팡이에 의지한 채 울고 있었다. 깜짝 놀란 프란체스코가 성인에게 천국에 계신 것 아니냐고, 천국에도 눈물이 있냐고 물었다. 다미아노는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면서 그 눈물은 아직도 지상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한다. 성인은 이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위험에 처했다면서 속히 잠에서 깨어나라면서 말한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여.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네. 그리스도께서 위험에 처해 있으니 어서 일어나게.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네의 등으로 떠받치게. 온 교회가 나의 작은 예배당처럼 퇴락하고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고 있다네. 교회를 일으켜 세우게!”



프란체스코는 그것을 하늘의 부름으로 받아들였고 이후의 그의 삶은 무너진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바쳐졌다. 하나님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비웠기에 그는 자유로웠다. 앎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과 남보다 크게 보이고 싶은 허영심을 버리자 신적 사랑이 그의 속을 가득 채웠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 같은 그의 속에 숨결을 불어넣어 하늘의 소리를 발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된 채 바라본 세상은 신비 그 자체였다. 그는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부른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무정물까지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 새삼 그가 그리워지는 것은 ‘가난의 영성’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현실이 암담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회됨은 규모에 있지 않다.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고, 사용 가능한 재정이 넉넉할 때 사람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크기의 신화에 속절없이 굴복한다. 하지만 크기와 영성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가 된 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교회성장 신화에 몰두하면서부터이다. ‘성장‘이 암암리에 지상과제가 되는 순간 예수 정신은 스러지기 십상이다. 본(本)과 말(末)이 뒤집힐 때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교회 밖 사람들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각 교단의 총회가 열리는 가을이 참 괴로운 계절이 되었다. 교회는 욕망을 중심으로 맴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초월의 빛을 비추어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따라서 각 교단 최고 의결기관에서는 그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심도 있게 논의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장벽을 쌓는 일에 몰두하거나, 자신들이 제정한 헌법을 특정한 교회와 개인의 편의를 위해 왜곡한다. 토라는 재판할 때에 가난한 사람이라 하여 편을 들지도, 힘 있는 사람이라 하여 두둔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공의와 정의의 토대가 무너지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찰적 지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 사람들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상실할 때 종교는 쇠락기에 접어든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스위스 북동부 알프스 산맥에 속한 해발 2700미터의 피졸산 정상 밑자락에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사라지는 빙하를 애도하는 장례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기후변화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이들이라면 피조물들의 신음소리에 어떻게든 응답해야 한다. 



세상이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 경쟁이 심화되면서 혐오와 적대감의 언어가 늘어나고, 공감의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 땅 끝에 서 있는 이들이 많다. 교회는 그들의 설 땅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는 신앙을 넘어서야 한다.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교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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