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바벨론에서 나오라

천국생활 2019. 9. 15. 17:57

바빌론에서 나오라

김기석(2019-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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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에서 나오라
사48:17-22
 

[주, 너의 속량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주, 네 하나님이다. 네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며, 네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하나님이다' 하셨다. "네가 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였어도, 네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네 공의가 바다의 파도같이 넘쳤을 것이다. 네 자손이 모래처럼 많았을 것이며, 네 몸에서 태어난 자손도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이며, 그 이름이 절대로 내 앞에서 끊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는 바빌론에서 나오너라.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서 도망하여라.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종 야곱을 속량하셨다' 하고, 즐겁게 소리를 높여서 알려라. 이 소식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들려주어라. 주님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인도하셨으나, 그들이 전혀 목마르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을 내셔서 그들로 마시게 하셨고, 바위를 쪼개셔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속량자 하나님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예배의 자리에 나온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임하시기를 빕니다. 이런저런 이들로 인해 날카롭게 변했던 마음이 원만한 보름달처럼 둥글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놓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곁길로 빠지기도 하지만 기어코 바른 지향을 되찾아야 합니다. 스페인 북부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이들은 누구나 다 한 두 번 길을 잃은 경험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순례를 포기한 이들은 없습니다. 잠시 당황하거나 고생을 좀 하지만 결국은 가야 할 길을 찾아가게 마련입니다.

살다 보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맬 때가 많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마땅히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편적 합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땅하다’는 단어는 ‘(대상이나 상태가) 잘 어울리거나 알맞다‘, ‘정도에 알맞다‘, ‘(이치로 보아) 그렇게 되어야 옳다‘는 뜻입니다. ‘마땅하다‘라는 말 속에는 어울림, 알맞음, 이치에 맞음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반대는 부조화, 과도함, 이치에 맞지 않음입니다. 그렇게 보면 마땅한 삶이란 낯선 이들 혹은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 욕망을 절제하면서 타자의 살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를 마땅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주, 너의 속량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속량자’는 ‘가엘(ga’al)의 번역어인데, 이스라엘에서 가엘은 친족의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형이 자식 없이 죽었을 때 가엘인 동생은 형수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을 형의 아들로 삼아야 했습니다. 가엘은 또한 가까운 친족이 가난에 내몰려 땅을 남에게 넘기거나 종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을 때 땅을 대신 사거나 몸값을 대신 지불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속량자’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치뤄야 할 대가를 대신 치루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란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로 파악되지 않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주, 너의 속량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로 소개한데 반해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주, 네 하나님이다. 네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며, 네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하나님이다.” 여기서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은 ‘나는 주’라고 할 때 ‘주’는 ‘여호와‘이고 ‘네 하나님’ 할 때의 ‘하나님’은 ‘엘로힘’입니다.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조금 더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대개 인간의 삶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억눌린 이들을 해방시키시는 하나님, 곧 역사의 주관자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엘로힘은 인간을 무한히 뛰어넘으시는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이 두 가지 호칭을 함께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마땅한 삶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가르쳐 유익하게 하고,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할 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마땅한 삶이란 어울리는 삶, 알맞는 삶, 이치에 맞는 삶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좋을 대로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율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이것을 가리켜 ‘전체의 뜻으로 수정(受精)된 마음’이라 했습니다. ‘전체’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율된 사람들은 자기 본성의 유혹을 뿌리치고 내면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요구와 명령을 따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예입니다.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도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황급히 그 자리를 회피하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멈춰 섰고, 부상자의 상처를 치유했고, 그를 안전한 곳으로 이송했습니다. 이게 마땅한 삶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모른 체 하고 제 갈 길을 재촉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고 하여 선한 의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현실과 마주치는 순간 공포심이 그들의 양심의 소리를 압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라고 하여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적당히 비겁하면 행복하다는 말이 반성조차 없이 유통되는 현실입니다. 이런저런 손해가 예상되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유지하지만, 자기에게 보복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물고 뜯기도 합니다. 이 알량한 정의감이 사회를 혼돈 가운데로 몰아갑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였어도 네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네 공의가 바다의 파도같이 넘쳤을 것이다. 네 자손이 모래처럼 많았을 것이며, 네 몸에서 태어난 자손도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이며, 그 이름이 절대로 내 앞에서 끊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사48:18-19)

‘네가 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였어도’라는 말이 참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음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은 마땅한 삶을 살지 못했기에 쇠퇴한 끝에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늘 자기 욕망대로 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평화와 공의의 열매를 거두려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세상이 온통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직함입니다. 우직함의 다른 이름은 십자가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옛사람은 대지약우大智若愚라 했습니다. 큰 지혜는 어리석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런 어리석음을 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끔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릴 때면 시몬 베드로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눅22:31). 우리 마음을 쥐고 흔드는 것이 사탄이 아닌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리석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견소포박見素抱樸하면 소사과욕少私寡欲이니라”(노자 19장). 노자의 말입니다. 순수한 것을 보고 질박함을 품으면 사사로움이 줄어들고 하고자 함이 적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근본을 자꾸 돌아보는 사람은 이익에 따라 흔들리는 일이 적어집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후미에


 당신의 뜻을 등지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아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바빌론에서 나오너라.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서 도망하여라.” 바빌론에서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팔자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잠시 동안은 그곳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 곳은 그곳이 아닙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바빌론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로잡아간 땅을 가리킵니다. 그곳에서 벗어날 때 해방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시점에서 성경을 읽는 우리의 바빌론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것들이 아닐까요? 누구에게나 바빌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열등감을 심어주고, 패배자의 쓰라림을 안고 살도록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 낙심, 쓰라림, 증오심도 우리를 사로잡는 바빌론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벗어나라 이르십니다.

저마다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비겁하게 처신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끔 그런 기억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등감이나 패배감, 쓰라린 기억, 분노, 증오심은 우리의 운명이 아닙니다. 투덜거리면서 거기에 붙박인 채 살면 안 됩니다. 그곳에서 벗어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바빌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인이 되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용서를 구할 것은 용서를 구할 때 자유가 유입됩니다.

물론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인내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침묵>의 작가로 유명한 엔도 슈사쿠가 그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나가시키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본 후미에(踏繪) 때문이었습니다. 후미에는 예수나 마리아의 얼굴이 그려지거나 새겨진 그림 혹은 동판이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 시대에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40만에서 6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예수나 마리아를 그린 그림을 밟게 했습니다. 신자라면 가장 소중한 분의 얼굴을 밟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연속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동판에 새기게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동판을 밟지 않으면 고문을 할 것이고, 끝까지 버티면 죽이겠다는 위협 앞에 섰습니다. 많은 이들이 살기 위해 그 동판을 밟았습니다. 엔도는 그 후미에를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후미에를 밟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과연 밟았을까?’ 그는 자기라면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하기보다는 후미에를 밟았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고백합니다(엔토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송태욱 옮김, 포이에마, 2018, p.185). 그는 자기처럼 나약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세상을 보고 싶어서 <침묵>을 썼다고 말합니다. 그는 나약한 자도 주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나약함을 핑계로 늘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느 순간 나약함을 딛고 일어서야 할 때가 옵니다. 겁 많은 자의 용기로 불의를 꾸짖을 때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유가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골방에서 숨어 지내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한 후 골방 문을 박차고 나와 당당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고난도 죽음의 위협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그들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절대 자유입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그리스도를 통해서 승리를 경험한 이의 고백입니다.

∙소리를 높이라


 은혜 안에서 자유를 경험한 이들은 “‘주님께서 그의 종 야곱을 속량하셨다’ 하고, 즐겁게 소리를 높여서”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 기쁜 소식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들려주어야 합니다. 바빌론에서 벗어나서 비록 사막을 지나야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오게 하심으로 그 백성을 도우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나눌 신앙의 이야기가 있는지요? 이런 저런 잡담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길을 택함으로 일어난 삶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바울처럼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도 있지만, 뚜렷한 변화의 계기를 만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는 오랫동안 은혜 속에 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나브로 옛 사람의 습관에서 자유로워진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그런 것입니다. 늘 개인의 문제에만 골몰하고 살던 사람이 공적 삶의 영역에서 책임적인 주체로 선 이야기들은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임을 자각하면서, 구원의 노래를 늘 불러야 합니다.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소음 속에 파묻히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평화와 공의의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우리의 운명이 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총 안에서 걷는 이만이 평화를 누립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김기석

지거 쾨더의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는 독일의 사제 화가입니다. 그림이 묵상의 좋은 매개라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그림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깊은 신학적 통찰을 그림 속에 녹여내고 있기에, 감상자들은 그림과 무언의 대화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작가가 숨겨놓은 메시지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림 감상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조차 그의 그림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익숙한 이야기 속에 숨겨진 낯섦을 해독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인식의 지평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밝고 강렬한 색채는 그림 해석은 어렵다는 일반인들의 정서적 두려움의 베일을 벗겨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거 쾨더는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역의 작은 도시 바서알핑엔(Wasseralfingen)에서 태어났습니다. 슈베비슈 그뮌트(Schwäbisch Gmünd) 국립공예학교에서 조각과 금속디자인을 공부했고,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예술학교에서는 미술과 예술사를 배웠습니다. 작가와 미술교사로 살던 그는 뒤늦게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침내 1971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교구 사제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구민들은 물론이고 많은 기독교 대중들을 성서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해 그림과 성경 이야기를 담은 여러 권의 묵상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를 기준은 우리가 교회에 속한 사람인지 여부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약자들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했던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구분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만족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 사이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귀가 닳도록 들어온 이들은 이런 메시지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의 고통에 눈을 감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밖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로 세상을 떠도는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대개 세상에서 꺼림의 대상이 되는 이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들과 연루되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 합니다. 연루됨 그 자체가 삶에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이들과 연루되기를 꺼리는 순간 ‘거룩한 삶’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거 쾨더는 한 화면 속에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여섯 부류의 사람들을 다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굶주린 사람과 헐벗은 사람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굶주린 사람은 화면의 맨 아래에 손으로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못자국이 선명합니다. 감상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헐벗은 사람은 벽면에 그려진 포스터에 등장합니다. 그 포스터에는 독일말로 ‘제3세계를 위한 옷’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한 공간 속에 많은 인물을 그릴 수 없어서 이런 장치를 사용한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간의 분할은 화가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람의 손과 그에게 빵을 나눠주는 사람의 손만 등장시킨 것은 어쩌면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는 말씀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사실 ‘베푼다’는 말은 조금 불편합니다. 그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시혜자와 수혜자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주는 사람은 자기의 선행에 만족할지 몰라도 받는 이들은 굴욕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고도 생색을 내지 않을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야 제대로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손으로만 표현된 나눔은 바로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도움을 받는 이들의 얼굴은 다 동일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린 문 앞에 선 나그네가 등지고 서있는 저편에 붉은 대지와 맑고 푸른 하늘이 아스라히 보입니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주 작게 그려진 그 십자가는 문 안쪽,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로 묶어주는 벼릿줄입니다.



이 그림에서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손‘입니다. 화면의 맨 아래에 등장하는 손만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돌보고 어루만지는 이들의 손이 도드라집니다. 어루만짐은 치유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결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낙인찍힌 이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의 접촉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를 감행했던 것은 그들의 존엄을 지켜주려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루만짐 혹은 접촉은 환대의 다른 표현입니다. 저널리스트인 고종석 씨는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어루만지다>>, 233)라고 말합니다.



‘손’은 우리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입니다. 손처럼 표정이 풍부한 것이 또 있을까요? 악수하는 손, 노동을 통해 세상과 교섭하는 손, 누군가를 때리는 손, 밀어내는 손, 쓰다듬는 손, 어루만지는 손, 기도를 위해 모은 손…. 손은 발화되지 않는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장편시 ‘흰 손’은 우리가 하나님께 내보여야 할 손이 무엇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심판의 자리에 나오는 신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 보여줍니다. “멀리서부터 머리 조아려 조아려/걸음마다 떨며 부르는 합창소리/‘감사와 찬송을 드리옵니다/영광과 존귀를 세세에 드리옵니다.’/‘죽을 죄인들 아무 공로 없사오나/우리 주 예수 흘린 피 믿습니다./모든 죄 대속해주심 힘입어/의롭다 해주심 얻을 줄 알고 옵니다.’“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굴을 들라시면서 “내 아들에 입 맞춘 네 눈동자를 보자./손을 내밀어라./그 피를 움켜 마셨을 그 네 손을.’” 보여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살과 뼈와 혼과 얼에 예수의 피가 배었다면, 남 위해 땀 흘리고 피 흘렸다면, 우리의 손이 ‘흰 손’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거 쾨더의 그림은 분주하기에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살라는 일종의 초대장입니다. 그 그림들을 읽으며 고요히 자신을 성찰할 때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낼 힘이 유입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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