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사랑와 인내로 걷는 길

천국생활 2019. 9. 3. 15:36

사랑과 인내로 걷는 길

김기석(2019-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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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인내로 걷는 길
살후3:1-5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퍼진 것과 같이, 각처에 속히 퍼져서, 영광스럽게 되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또 우리가 심술궂고 악한 사람에게서 벗어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을 굳세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명령한 것을 여러분이 지금도 실행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실행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주님 안에서 확신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시는 것과 같이 인내하기를 바랍니다.]



∙창조절에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창조절 첫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창조절기를 지키는 이유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우리 삶을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돌아봄의 방향은 둘입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맡겨진 세상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인식하고 사는 이들은 경거망동할 수 없고, 피조물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동물도 식물도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존재합니다. 파괴되고 있는 삼림, 강과 바다, 땅과 대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창조절은 피조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하나님 안에서 점검할 것을 요구합니다. 절제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명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겸허하고 신실하게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사람 낭비가 심한 시대입니다. 자기에게 상해를 입힌 자를 죽였다고 아내들에게 자랑했던 라멕의 노랫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겸손하고 따뜻한 얼굴, 밝고 천진한 웃음과 만나기 어렵습니다. 성난 얼굴,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넘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아끼고 존중하고 북돋우며 살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이런 이중적 책임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현대 문명 혹은 주류 세계의 가치관에 대한 일종의 저항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사회적 통념에 따라 처신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에 세상에서 낯선 사람 혹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런 걸 아셨기에 주님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b).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 영혼을 빼앗겨 버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왜곡하거나 입맛에 맞게 변형시켜 소비합니다. 십자가는 도처에 서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경청되지 않습니다. 우리 욕망을 거스르는 말씀은 외면당하기 일쑤입니다. 설사 듣는다 해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말대로 성경에 밑줄을 그을 게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속의 문법을 따라 삽니다. 끝없이 불안을 부추기는 현실만 바라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연대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각처에 속히 퍼져서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참 말씀만이 세상을 정화하고, 사람들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기에 하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분명히 목마른 영혼들이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의 지각을 깨뜨려줄 한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목마름, 그리움, 간절함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말씀과 만나면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치 어미 닭이 알을 쪼아 줌으로 병아리가 부화하듯이 말씀은 그들을 변화시켜 새로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농부가 뿌리는 씨는 대부분 허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알찬 결실로 이어지는 씨앗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싹이 나지 않은 곳에는 움씨를 뿌려주면 됩니다. 사도들이 한 일이 그런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심술궂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선의를 품고 산다고 하여 늘 선한 보응을 기대할 수 없는 게 삶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과의 아름다운 관계맺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확보하거나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이들일수록 다른 이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을 어떻게 하든지 조롱하고 끌어내려 악에 물들게 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과 만날 때마다 우리 영혼은 멍이 들고, 그 멍이 점점 커지면 우리는 작은 자극에는 비명을 지르게 됩니다. 결국 용기를 잃고 세상에 길들여진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세상과 맞설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적 삶을 꾸준히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확신의 피력이지만 동시에 격려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신뢰해줄 때 우리는 자꾸만 무력해지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습니다. 시몬이 절망에 빠지려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던 것은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요1:42) 하셨던 주님의 음성이 그의 속에서 쟁쟁하게 울렸기 때문일 겁니다. 걸려 넘어지고, 물에 빠지고, 부인하고, 주저하는 베드로를 기어코 새로운 존재로 바꿔 놓은 것은 그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으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신뢰는 곧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은 사랑이 식은 세상, 삭막한 세상입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삶의 울타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지만 주님도 우리를 믿으십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지요.



∙ 몸싸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시는 것과 같이 인내하기를 바랍니다”(살후3:5). 바울은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로마서에서 그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는 자기의 영적 무력감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롬7:18).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오랫동안 젖어든 삶의 습관이 우리의 의지와 지향을 제멋대로 바꿔놓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바울은 주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을 이끄셔서 사랑과 인내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막연히 참는 것이 아니라,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회의의 순간이 찾아와도 위험이 닥쳐와도 달콤한 유혹이 찾아와도 애초의 지향을 버리지 않을 때 우리 속에 영혼의 근육이 생깁니다. 국제정의선교회 대표인 게리 하우겐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미식축구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번쩍이는 헬멧, 널찍한 어깨 보호대, 새 유니폼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아홉 살에 난생처음 미식축구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어머니께 이 정도면 충분한 경험이 되었으니 이제 연습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친 몸싸움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순순하게 그렇게 하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유니폼과 장비는 내일 감독님께 돌려 드리면 되겠구나.” 어머니의 말씀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니폼만 입고 몸싸움은 별로 안 하는 그런 선수가 될 길은 없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유니폼만 걸치고 부딪히고 멍드는 일은 요리조리 피해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게리 하우겐, <정의를 위한 용기>, 이지혜 옮김, Ivp CLF, p.112ff).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그는 몸싸움이야말로 미식축구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이라는 기본 동기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창조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이 주님의 신뢰 속에서 무르익어 가야 합니다. 피조물을 돌보고, 곁에 있는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과 인내로 걷는 그 믿음의 길에서 기쁨과 보람을 추수하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를 듣다

김기석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를 듣다



하나님, 허위단심으로 하나님의 산을 찾아가던 엘리야의 마음이 떠오릅니다.

이 여름, 주님의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왕상19:12)을 듣고 싶습니다. 

들뜬 마음 가라앉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늠해봅니다.

주님, 우리들이 평화의 바람, 생명의 바람이 되어 

분단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게 해주십시오. 아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은 바야흐로 바캉스 시즌이다. 바캉스는 ‘~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다’라는 뜻의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바캉스란 그러니까 분주한 일상을 잠시 떠나 비일상적인 공간과 정서 속에 머물며 자기를 비우는 행위와 연관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일과 자기의 쓸모를 입증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많은 일들을 떠나는 것은 그 자체로 해방감을 준다. 일상과의 거리두기, 자기 비움은 또 다른 생기를 모셔 들이기 위한 능동적 행위이기도 하다. 자기 비움의 계기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엘리야의 경우가 그러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야훼 사이에서 흔들리던 백성들에게 누가 참 하나님인지를 입증해보였다. 그리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기손 강 가에서 도륙했다. 그 소식을 아합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한다. 갈멜산의 엘리야라면 이런 위협 앞에 흔들릴 리가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엘리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급히 일어나 유다의 브엘세바로 도망친다.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주었던 엘리야의 처신에 적용된 단어들은 ‘두려워서’, ‘급히’,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등이다..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이다. 엘리야는 영웅에서 졸지에 반(反)영웅으로 전락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인간이다. 어떤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오히려 무력감이나 공허감에 빠지기도 한다.



뙤약볕 밑을 터벅터벅 걷다가 로뎀나무 아래 앉은 그는 무력감 속에서 하나님께 말한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왕상19:4) 그런데 혼곤한 가운데 잠이 찾아온다. 잠은 두려움과 고독의 심연으로 내몰리던 그의 마음에 조그마한 틈을 만들어주었다. 그때 한 천사가 그를 깨운다. 잠에서 깨어난 엘리야는 자기 머리맡에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음을 보았다. 엘리야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또 다시 잠이 빠졌다. 그가 잠든 동안 주님은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듯 그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계셨던 것일까?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하고 이른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리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 있는 동굴에서 밤을 보냈다. 종교학에서 ‘동굴’은 재생 속은 거듭남의 장소 혹은 참된 인식의 현관이라는 말이다. 일상과 구별된 그 자리, 그 가물가물한 관문에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물으신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도 아니고 ‘함’도 아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그가 누구인지,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엘리야는 가슴에 울혈처럼 맺혀있던 말을 쏟아낸다.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던 자기 삶,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백성들에 대한 고발, 지붕 위의 참새처럼 외로운 자기의 처지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하나님의 질문과 엘리야의 대답은 이처럼 어긋나고 있다. 이 어긋남이 해소되기까지는 또 다른 절차가 필요하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이 명령은 출애굽 여정 가운데 벌어진 한 사건을 상기시킨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기들을 이끌 신이라 경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염증을 느낀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동행하지 않겠다 하신다. 모세는 하나님께 진노를 거두어달라고 청하는 한편, 그 일에 가담한 이들을 엄중하게 처벌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백성과의 동행을 거절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침내 동행의 약속을 받아낸다. 모세는 그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청한다. 하나님은 그를 바위 위에 서 있으라고 하신 후에 그의 곁을 지나가셨다. 동행의 약속이 그렇게 가시화된 것이다.



엘리야는 새로운 모세가 되어 하나님 앞에 선다. 크고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났으나 그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났지만 주님은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격정의 소용돌이가 다 지나간 후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열정과 환멸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그의 영혼을 고요히 가라앉혔다. 엘리야는 외투 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동굴 어귀에 섰다. 그리고 새로운 소명을 듣고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갈 용기를 회복한다. 삼복(三伏) 더위 한복판을 지나면서 우리는 무엇을 비워내야 할까?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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