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일어나십시오
∙장장추야長長秋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광복 74년이 다가옵니다. 나라가 독립한 지 이미 오래 되었건만 아직도 마음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는 일본 덕분에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면서 일본에게 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종군 위안부는 자발적인 성매매 자영업자였다고 말하기도 하고, 징용공 문제를 두고는 조선인에게 일자리를 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에 동조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일본과의 문제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일본의 진보적 시인인 오구마 히데오가 1935년에 발표한 ‘장장추야長長秋夜’라는 장시를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1935년은 일본정부가 전통적인 조선복 즉 ‘흰옷’ 입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해라고 합니다. 오구마 히데오는 자국의 야만적인 조치에 항거하여 이 시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여인들이 “푸른 달빛이 내려다 보는 마을 지붕 아래” 모여 앉아 긴긴 가을밤을 지새며 다듬이 방망이로 ‘똑딱똑딱’ 두들겨 풀을 먹이고 주름을 펴 만든 흰 옷을 더 이상 입지 못하게 되었을 때, 몇몇 노파가 이를 거부하고 늦은 밤 산길 낭떠러지를 지나 달아났습니다.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일본인들이 이 노파들을 막아세우고는 이들을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리면서 노파들이 입고 있는 “조선의 전통적인 흰 옷”을 가져온 먹으로 새까맣게 더럽혔습니다. 밤이 지나 새벽이 오자 노파들은 새까맣게 더렵혀진 그 흰 옷을 빨기 위해 강가로 갑니다. 그들은 그 더럽혀진 옷을 강물에 담가 헹군 뒤 돌 위에 올려놓고 서로 ‘아픈 미소’를 주고받으면서 다듬이 방망이로 두드렸습니다. 방망이질이 계속되면서 검은 자국이 씻겨 나갔습니다. 오구마의 장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때리는 방망이도 울고 있다
맞는 백의도 울고 있다
두드리는 노파도 울고 있다
맞는 돌도 울고 있다
모든 조선이 울고 있다”
(임철규, <고전>, p.326-7, 註35에서 재인용)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후’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광경이 머리에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는 조선옷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시커먼 먹물로 더러워졌습니다. 그 옷을 빨기 위해 울면서 방망이질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비웃는 무리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지금 고통스런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이들을 한껏 조롱하는 무리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찌하여
시편 10편은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1절)라는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어찌하여‘라는 단어에는 원망과 슬픔과 아울러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기대 등 복합적인 감정이 묻어 있습니다. 지금 시인의 삶은 마치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롭습니다. 곤경에서 벗어날 길도 없고, 도와줄 이도 하나 없습니다. 고아 의식이 이런 것일 겁니다.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쓸쓸함 그리고 씁쓸함이 시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를 그렇게도 힘들게 하는 상황은 무엇일까요?
악인들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악인들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히는 현실을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인 그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실망이 그를 괴롭힙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의 인간됨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타인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보이거나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은 참 인간적‘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자기보다 힘이 약하다고 하여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거나 괴롭힌다면 그는 참 인간의 길에서 멀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악인이란 ‘악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인간됨을 부정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구하면서도 절망을 추수하는 것은 이웃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입니다. 행복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질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데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아침기도에는 ‘오늘 우리가 누군가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절박한 처지에 빠진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그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악인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의 시인이 그들의 행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심, 탐욕, 모독, 멸시, 뻔뻔함, 코웃음, 기만, 폭언, 욕설, 악담, 학대, 포악….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타자 부정’입니다. 이 모든 단어에는 타자에 대한 존중, 이해, 사랑이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건 그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할 뿐입니다. 시편 36편의 시인도 비슷한 현실을 겪은 것 같습니다.
“악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역의 충동만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 양양하고, 제 잘못을 찾아내 버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시36:1-2)
∙고아들을 도우시는 하나님
악인은 동료 인간에 대한 경멸을 넘어 하나님까지 경멸합니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에 관심이 없으며, 얼굴도 돌렸으니,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가련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쓰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지킬 능력이 없는 이들은 하나님께 하소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절박하게 부르짖습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12절)
구약에서 ‘주님, 일어나십시오’라는 표현은 대개 거룩한 전쟁의 맥락에서 나타납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일어날 때면 "주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원수들을 흩으십시오.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주님 앞에서 쫓으십시오"(민10:35)라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나중에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이 득세하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일어나시면 인간의 모든 무모한 시도는 끝이 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자신이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세상은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학대받는 이들이 억울함을 살피시고 악인들을 징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이르면 학대자들은 마치 지붕 위의 풀처럼 다 자라기 전에 시들게 마련입니다(시129:6). 학대받는 자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의지가지없는 사람들의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께 시인은 기도합니다.
“악하고 못된 자의 팔을 꺾어 주십시오. 그 악함을 샅샅이 살펴 벌하여 주십시오.”(15절)
이런 탄원은 탄원으로만 그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악을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악하고 못된 자들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 순응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슬로 대학 교수인 박노자 교수는 일본 사회를 가리켜 권위주의 사회라고 진단합니다. ‘튀면 안 된다’는 것이 그 사회 구성원들이 내면화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일본 사회를 ‘쏠림 사회’라고도 설명합니다. 대세에 순응한다는 말일 겁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정말 역동적입니다. 그래서 늘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다양한 생각들이 표출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것이 곧 악을 용인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믿는 이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탐욕, 모독, 멸시, 기만, 폭언, 뻔뻔함은 우리 신앙과 무관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삽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시인은 “주님은 영원무궁토록 왕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합니다. 때로는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고, 숨어 계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그 통치는 약한 자들에 대한 돌봄과 악한 이들에 대한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기울여 주십니다. 고아와 억눌린 사람을 변호하여 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억압하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17-18절)
캐나다의 신학자인 브라이언 왈쉬와 실비아 부부는 ‘제국’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지금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성서에서 증언되고 있는 새 백성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국은 생산과 소비의 관리에 미친 듯이 사로잡혀 있지만, 이스라엘은 안식일 준수를 통해 그 삶이 선물임을 인식하도록 부름받는다. 제국은 노예의 고통과 억압의 경제에 의해 지탱되는 데 반해, 안식일을 지키는 이스라엘은 가난한 자와 낯선 자, 나그네와 고아, 과부를 돌봄으로써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지탱된다.”(브라이언 왈쉬·실비아 키이즈마트, <제국와 천국>, 홍병룡 옮김, Ivp, 2011년, p.109)
우리가 정녕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며 산다면 우리는 삶이 선물임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 질주를 멈추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우리 삶을 하나님의 마음에 연결하는 소중한 노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 머물며 참 안식을 누릴 때 우리는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과 지배를 지향하는 세상의 폭력성을 직시하면서 사랑과 섬김의 아름다움을 삶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늘 바쳐야 할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더럽혀진 흰옷을 방망이로 두들겨 빨던 그 노파들처럼 우리도 마음 속의 절망과 두려움을 자꾸만 떨쳐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물들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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