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그루터기

천국생활 2019. 7. 14. 17:52

그루터기

김기석(2019-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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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
습3:9-13
 

[그 때에는 내가 뭇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를 섬기게 할 것이다. 에티오피아 강 저너머에서 나를 섬기는 사람들, 내가 흩어 보낸 사람들이, 나에게 예물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너는 나를 거역한 온갖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거만을 떨며 자랑을 일삼던 자를 이 도성에서 없애 버리겠다. 네가 다시는 나의 거룩한 산에서 거만을 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도성 안에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남길 것이다. 이스라엘에 살아 남은 자는 나쁜 일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고, 간사한 혀로 입을 놀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잘 먹고 편히 쉴 것이니,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희망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스바냐는 주전 7세기, 유다 왕 요시야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북방의 강자였던 앗시리아는 멸망을 앞두고 있었고, 바벨론은 아직 역사의 무대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는 인간이 마련한 안전장치가 무용지물이 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역사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습1:12)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충고를 들을 생각도 없고,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수직의 중심이 무너지면 인간 세상은 전장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지도자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였고, 재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거만했고,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총체적 난관입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나라가 온통 쓰레기더미로 변했습니다. 사방에서 악취가 풍겨 나옵니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럴 때면 사람들은 판을 갈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혁명의 꿈은 그렇게 잉태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얼굴만 바꾸는 혁명은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혁명의 열기가 환멸로 바뀌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엉킨 실타래를 풀 듯 하나님은 하나하나 무너진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에 착수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거역하는 나라들, 공의와 자비를 버리고 힘의 논리와 폭력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쏟으십니다. 스바냐는 그 날 온 땅에 불이 붙는 것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날은 악한 이들은 물론이고 선한 사람들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 불은 파괴하는 불이기도 하지만, 정화하는 불이기도 합니다. 마치 용광로가 불순물을 걸러주는 것과 같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함께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인간애가 깨어나기도 합니다. 고통은 자기 초월의 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희망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 깃든 빛을 봅니다.

∙말의 회복
불로 역사를 정화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 때에는 내가 뭇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를 섬기게 할 것이다“(3:9). 말이 살아야 역사가 삽니다. 말이 혼탁할 때 사회의 토대인 신뢰는 허물어집니다. 불교도 인간이 말로 짓는 죄가 중하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입으로 짓는 죄를 ‘구업口業’이라 하는 데, 거짓말과 조작 그리고 허언을 일삼는 망어(妄語), 남을 비방하거나 이간질하는 말인 악구(惡口), 달콤하고 듣기 좋지만 실은 상대방의 마음을 해치거나 명예를 손상시키는 말인 기어(綺語)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회복을 말의 신실함을 회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말을 다루는 직업인들, 즉 종교인, 언론인, 교사, 작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올바른 말, 살리는 말, 참된 말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 어떤 이들이 한 말을 ‘팩트 체크’ 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은 참 우울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입술이 깨끗해진 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 말은 그들이 더 이상 제국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강제, 지배, 독점이 아닙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전에 무심히 불렀던 찬양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사랑하며 섬기리”.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흉과 허물을 보기보다는 그들 속에 잠재된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호명해주고, 지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 시몬에게서 ‘반석’ 곧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냉소주의적이었던 나다나엘에게서 거짓이 없는 참 사람을 보셨습니다. 입술이 깨끗해진다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의 길에 접어든 이들일수록 타인에 대해 냉혹하고, 비판적입니다. 자기-의가 강해서 남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불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늘 화를 내고, 성난 표정을 짓고, 부정적인 말을 일삼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요즘 들어 예수님께서 위선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고 하신 말씀이 자꾸 떠오릅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마23:13)

선교신학자 호켄다이크는 “선교는 매력의 감염“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염’이라는 단어는 ‘다른 풍습이 옮아서 물이 듦‘ 혹은 ‘병원체가 몸 안에 들어옴’을 뜻하는 말로 대개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지만 ‘매력의 감염’이라는 말은 참 산뜻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합니다. 겉꾸민다고 될 일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하나님의 현존을 상기시킬 때 매력의 감염이 일어납니다. 믿지 않는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들을 보고 매력을 느끼기보다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면 참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바냐는 이렇게 매력적인 이들을 보며 세상 곳곳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져와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평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하여 자랑을 일삼는 이들을 제거하십니다. 자기 힘에 도취되어 들떠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아낄 줄 모르던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않으십니다(출34:7). 하지만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돋아나는 새싹처럼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만해 한용운은 ‘알 수 없어요’라는 시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의 단초로 그루터기처럼 남겨두신 이들은 백향목처럼 우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온순하고 겸손한 백성‘입니다. 사실 이 번역은 조금 유감입니다. 어떤 사람의 품성을 나타내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남겨두시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들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아니이’aniy’)과 ‘비참한 사람들‘(‘댈dal‘)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민초들, 즉 뽑히고 또 뽑혀도 기어코 다시 몸을 일으키는 잡초와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곤궁했고, 법적 보호도 받지 못했고, 착취와 억압의 희생양이 되곤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출애굽 공동체를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심어주시면서 그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러주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남을 억울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출22:21-22). 실패와 서러움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낮은 자리에 선 이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여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충남 홍성에는 풀무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는 ‘위대한 평민’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현주 목사는 위대한 평민을 나름대로 이렇게 정의합니다. “태산처럼 높은 뜻을 들판처럼 낮은 자리에서 삶으로 실현하는 사람”(홍순명,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 이야기> 첫째 묶음, 부키, 2003, p.9에 나오는 추천의 글 중에서). 어떻게 보면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을 정의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땅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헌신하라고 부름 받은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는 이들은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밑바닥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땅으로 쏟아지는 기도
이스라엘의 남은 자, 곧 새로운 세상의 그루터기로 부름받은 이들은 악을 멀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악이고,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 남을 속이는 것이 거짓입니다. 악과 거짓을 미워하는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단초입니다. 요즘 우리는 국제질서의 냉혹함에 놀라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경계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단을 고착화함으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 합니다. 세상을 떠도는 난민들은 설 곳이 없습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의 꿈이 부질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기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평화를 만드시는 주님의 삶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탄원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기도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되는 법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301호실’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부서진 번개불/까맣게 속이 타는 빛의 씨알들/처럼//왜 자꾸만/기도가 하늘에서 쏟아질까/이 작은 방에//쓰리고 아픈 눈물에 젖은 기도들이/뼈 마디마디 울리는 기도들이/하늘도 되돌려주는 기도들이//이젠 세상으로 흩어질 밖에 없어라/어두워 오는 하늘 아래/파아란 횃불로 타오르려고”. 탁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향해 바치는 기도가 오히려 우리에게 쏟아진다니 말입니다. 하늘이 기도를 우리에게 되돌려줍니다. 우리가 바로 기도의 응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하면서 꿈꾸는 세상을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세력에 항거해야 합니다. 생명을 해치는 사람과 제도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의 표지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교회는 더불어 사는 기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도 빛의 알갱이가 되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반딧불이 하나하나는 미약하지만 반딧불이들이 모여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일 때 우리는 시원의 세계를 꿈꾸게 됩니다. 어두운 세상에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의 그루터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한계 초월자들

김기석

한계 초월자들



이십 대를 막 통과하고 있는 젊은이와 정말 우연히 마주 앉았다. 어느 때부터인지 젊은이들이 묻기 전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는 터였다. 무슨 일을 해도 헤덤비는 일이 없지만, 댕돌처럼 단단한 인식의 기초 위에서 처신하던 그가 비스듬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다가 무심한 듯 툭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은 젊은 날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견딤’이라는 단어 속에 그가 앙버티고 있는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래서 소환된 나의 젊은 날은 방황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치열한 인식욕과 시대의 어둠에 맞서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난 늘 흔들렸다. 흔연하게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없었던 회색인의 초상이 떠올랐다. 현실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틈 혹은 불일치가 버거웠다.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허무감이었다. 모두가 확신의 언어로 말하는 곳에서 허무감에 사로잡힌 채 허둥거린다는 게 죄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허무감은 집요했고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변명 삼아 그 시절을 견뎠다.



삼십 대 중반의 어느 날 문득 허무감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한 번도 싸워 이겨보지 못한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지내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방황의 시간이 그친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많은 세월이 흘렀다. 방황하던 젊은 날은 아련한 꿈처럼 저 먼 곳에 있고, 더 깊은 인식을 위한 모험에 나서지 못하는 굼뜬 존재가 여기에 있다. 타락이다. 한때 하구에 밀려온 썩은 생선을 두고 경쟁하는 삶에 등을 돌린 채 높이 그리고 빨리 나는 일에 몰두하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을 꿈꾸기도 했다. 외롭고 쓸쓸한 길, 몸과 마음이 여윌 수밖에 없는 그 길에서 언제 벗어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산에 오르는 산악인들이나 극지를 찾아나서는 이들에게 ‘왜 위험한 일을 자초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행위는 무용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용성을 모든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에게 무용한 일에 몰두하는 이들은 무책임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책무는 자기를 초월하는 데 있다지 않던가? 유용성에만 매달리면 영혼은 납작해지게 마련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넓게 만든 사람은 고향의 지리학자처럼 느긋한 인식가가 아니라, 미지의 대서양을 거쳐 새로운 인도를 건너간 무법자들이며, 현대인의 영혼의 심층을 인식한 사람들은 심리학자나 학자들이 아니라, 시인들 중 무절제한 자들, 즉 한계 초월자들이다.” 인간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전령들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성경은 경계선을 가로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인종, 피부색, 종교, 빈부귀천을 가르고 차별과 배제를 통해 자기 계급의 이익을 공교히 하려는 이들은 경계선 만들기에 몰두한다. 경계선은 ‘내 편’과 ‘네 편’을 가름으로 경계선 저 너머의 세상을 적으로 돌려세운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낯선 세상을 떠돌았다. 그렇게 함으로 복의 매개자가 되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애굽을 떠나 광야로 들어감으로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내면화했다. 예수는 당신의 몸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분리의 장벽을 허무셨다. 폭력에 기반한 로마의 평화가 허구임을 폭로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이룩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몸으로 입증했다. 한계 초월자들은 기득권자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안일한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땅의 인력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전우익 선생은 참 삶이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라 말했다. 버릴 것을 버릴 때 삶이 가벼워진다. 붙잡아야 할 것을 든든하게 붙잡을 때 삶이 부유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철 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순례자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 아닐까? 순례를 그치는 순간 영혼은 낡아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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