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열매
김기석(201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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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열매
눅13:6-9
(2019/07/07, 성령강림 후 제4주)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시간의 포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나날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남북미 정상들이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만나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대화의 문이 다시 열린 것을 보며 많은 이들이 기뻐했습니다. 한반도에 불어오는 평화의 바람에 어깃장을 놓으려는 듯 일본의 아베 총리는 반도체 핵심 소재 몇 가지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를 단행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익 앞에서는 상식과 신의, 염치 따위를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세태가 답답합니다.
교우들 가운데 만성피로증후군을 보이는 이들이 계십니다. 쉴 틈 없이 질주한 삶의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식일을 명령하신 주님의 뜻이 요즘처럼 깊게 새겨지는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느긋하게 지내는 것이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세상이 사람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는 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서 살 것을 요구합니다. 지금 우리는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를 검색을 통해 확보할 수 있습니다. 다들 똑똑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헛똑똑이들입니다. 삶을 누릴 줄 모르니 말입니다.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 암주이신 법인 스님은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이라는 책에서 현대인들이 “하늘, 구름, 별, 산, 꽃, 물소리, 바람소리, 흙을 멀리한 채 텔레비전과 인터넷, 스마트폰에 오감을 맡기고 있다“면서, 표정과 온기가 없는 그런 것들을 대하는 동안 우리 감각은 지극히 건조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소통과 교감이 일어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시간을 연구한 어느 학자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진정한 교육의 부재에서 찾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보는 법, 놀라는 법, 세부 사항에 집중하는 법, 생각하는 법, 충분히 이해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 대신 피상적인 활동만이 학교를 지배하며 그런 활동은 사회 어디서나 요구된다. 휴식은 가상의 적이 된다.”(칼하인츠 A.가이슬러, <시간>, 박계수 옮김, 석필, 1999, p.211)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배우지 못한 이들은 정보를 처리하는 데는 익숙할지 몰라도, 인간다운 공감의 능력은 갖추지 못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인간 소외가 심화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요즘 저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나오는 한 문장을 자꾸만 곱씹고 있습니다.
“하루 중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인 오전을 나는 그렇게 느긋하게 보냈다. 나는 부자였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햇빛 가득한 시간과 여름날이 모두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간을 마음껏 썼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캐럴 스피너드 라루소 엮음, <나는 어디서 살았으며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이지형 옮김, 흐름출판, 2015, p.77)
아침 햇빛을 한껏 즐기고 어디에도 매인 데 없이 느긋하게 보낼 수 있었기에 ‘나는 부자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나는 그 시간을 마음껏 썼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일까요? 분주하게 허둥거리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몇 해가 지났지만 그 나무에는 열매가 달리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13:7) 주인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이야기가 이쯤 진행되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기게 마련입니다. 내향적인 이들은 ‘나도 이 무화과나무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성할 것이고, 성경을 유비적으로 해석하는 데 익숙한 이들은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지기‘, ‘포도원‘과 ‘무화과‘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내려고 머리를 굴릴 것입니다. 과수원을 하는 이들은 자기들 경험에 비추어 그 무화과나무의 품종이나 토양의 문제를 분석하려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는 것이 이야기의 힘입니다. 이야기는 이론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석을 풍부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과 맥락을 살피는 일과 무관하면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평화와 안전 그리고 번영을 드러내는 일종의 기호로 사용될 때가 많았습니다.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의 시대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일생 동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왕상4:25).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포도원을 정성을 다해 일군 농부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기대와 실망을 드러냅니다. 주인은 포도원에 좋은 품종의 포도를 심어놓고 좋은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맺힌 것은 들포도였습니다. 실망한 주인이 말합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사5:5-6)
이사야는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포도나무는 주님께서 심으신 유다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서나 오늘의 본문에서 포도원주인이 기대한 열매는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 그리고 평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이들의 삶에 이런 열매가 없다면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겠느냐.” 포도원 주인의 이 호통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격노한 포도원주인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나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면서, 그렇게 했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때 찍어 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이듬해에 무화과나무에 과연 열매가 맺혔는지, 아니면 여전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찍혀 버렸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를 열린 결말로 맺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야기의 완결은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삶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예의 시간’입니다. 정의와 공의의 세상, 평화와 생명이 넘실거리는 세상을 만들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삶의 모호성을 받아들이라
그런데 이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발화된 맥락을 살펴야 합니다. 13장의 첫 머리에 누가는 그 땅에서 실제로 벌어졌음직한 끔찍한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들의 피를 희생제물의 피와 섞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자행된 사건인지 아니면 피식민지 백성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자행한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신 주님은 그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3:3). 주님은 그들에게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을 거론하시면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참혹한 살해 사건은 갈릴리 사람들을 들끓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지극히 평온한 것 같아 오히려 불편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선언하셨더라면 우리 마음이 시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로암 탑이 무너져 많은 이들이 죽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이들에 대한 깊은 애도를 표현하셨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에 소개된 주님은 너무 냉정하고 초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의 매체적 특성을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없었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기록자는 많은 이야기들을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략된 부분은 독자들이 상상력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것을 글 읽기의 원근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 사건들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려는 것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함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해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불확실함과 예측 불가능성이 우리 삶의 조건입니다. 전도서의 기자인 코헬렛은 삶의 모호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전9:11).
∙중력과 은총의 균형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허락받은 한정된 시간을 살아내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간은 사랑을 배우라고 주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사랑은 욕망이라는 중력에 이끌리는 이들을 하나님의 은총에 비끌어 매주는 일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회개‘입니다. 시몬느 베이유의 책 제목인 ‘중력과 은총’은 우리 삶을 잡아당기는 두 힘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중력은 죄와 과도한 욕심을 연료로 하여 힘을 키워갑니다. 중력은 우리 속에 불안감을 심어 놓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은총은 사소한 것들 속에도 하늘의 숨이 깃들어 있음을 보게 합니다. 중력은 무거움이고 은총은 가벼움입니다. 이 두 힘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 삶은 건강해집니다. 은총에 이끌려 사는 이들은 자기 파괴적인 열정에서 벗어났기에 자유롭고 명랑합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겹습니다. 그걸 우리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예된 시간을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으로 바꿔야 합니다.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삶의 시간을 허락해주신 까닭은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입을 맞추는 세상,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는 세상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끝끝내 지향하는 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의 시간을 통해 그런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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