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암8:11-14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그 말씀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날에는 아름다운 처녀들과 젊은 총각들이 목이 말라서 지쳐 쓰러질 것이다. 사마리아의 부끄러운 우상을 의지하고 맹세하는 자들, '단아, 너의 신이 살아 있다', '브엘세바야, 너의 신이 살아 있다' 하고 맹세하는 자들은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외로움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여름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는데 역사적 현안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공직자 후보 청문회를 앞두고 날선 공방이 이어지고 있고, 정부는 지소미아 즉 한일 군사 정보 보호협정을 지속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려하는 이들도 있고, 모처럼의 시원한 결정이라고 반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마치 활화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처지입니다.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말끔하게 풀어낼 지혜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무도 풀지 못했던 프리기아 왕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 칼에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사실 그건 해결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혼돈을 풀어낼 알렉산더 대왕의 칼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듬거리면서라도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디더라도 지향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이라면서, 그 어려운 때의 징조를 여러 가지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딤후3:2-5). 언급되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 시대의 모습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 보입니다. 냉소와 조롱, 저주와 악담이 차고 넘칩니다.
며칠 전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웹사이트 글을 읽다가 깊이 공감이 되는 기도문을 만나 옮겨보았습니다. 이 기도는 찰스 E. 무어(Charles E. Moore)가 쓴 ‘고립이 일상이 된 시대의 외로움과 사랑Loneliness and Love in an Age of Isolation‘(2019/08/20)이라는 글 가운데 나오는데, 그는 깊은 자기 성찰을 거친 후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더 이상 주님이 창조하신 그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저는 저 좋을 대로 가식적으로 살았고, 죄와 부끄러운 욕구를 많은 가면 뒤에 감추며 살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기보다는 유한한 것들과 사소한 성취에 도취했습니다. 그것은 남들의 눈에는 그럴듯하게 보였겠지만 사랑의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상처투성이였고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그 모든 것이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돌보기보다 제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들과 동떨어진 채 살아온 탓임을 말입니다. 주님, 이제는 돌아서고 싶습니다.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이들이 참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싶습니다. 주님, 이제 옛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과 주님의 뜻이 그리고 주님의 방법이 이 세상에서 확고히 서게 해주십시오.”
세상은 점점 우리를 외로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남들이 우리를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좋을 대로 살려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외로움을 가중시킵니다. 자기에게 집중된 삶은 고립을 낳게 마련입니다. 고립은 삶을 축제로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걸림돌입니다. 축제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할 때만 누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은 아모스에게 길을 물어보려 합니다.
∙어두운 시대
아모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고도의 번영을 누리던 여로보암 2세(약786-746 B.C)가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보면 긍정적 평가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정치력만큼은 탁월했습니다. 그는 국력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고, 영토도 한껏 확장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북방의 강자 시리아가 무너지고 있었고, 앗시리아의 국력은 아직 미미했기 때문입니다. 호시절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빈부 격차가 극심해졌고, 탐욕이 일상이 되었으며, 약자들의 형편은 더욱 곤고해졌습니다. 부유층들은 안일했고, 사치를 일삼았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지자 사람들은 무정하게 변했습니다. 아모스는 그 시대가 위기에 처해있음을 직감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재난이 닥쳐올 날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너희가 하는 일은, 오히려 폭력의 날을 가까이 불러들이고 있다”(암6:3)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닥쳐올 환난을 미리 내다봤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미구에 벌어질 일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의 환상, 가뭄의 환상 이후에 그는 다림줄을 들고 성벽 곁에 서 계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다림줄은 심판의 예고입니다. 네 번째 환상은 여름 과일 한 광주리였습니다. ‘여름 과일‘을 뜻하는 ‘캐잇츠(qayits)‘는 ‘끝‘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케이츠(qets)’와 발음이 거의 유사합니다. 그러니까 여름 과일은 이스라엘이 끝장났음을 알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악마적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대했습니다. 아모스는 그 시대의 부자들을 이렇게 질타합니다.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 찌꺼기 밀까지도 팔아먹자 하는구나”(암8:6)
하나님은 그들이 한 일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대가 그렇게 악하게 변한 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우리 욕망에 반하는 것을 요구하곤 합니다. 욕망은 독점을 지향하지만 예언자들은 협동과 나눔을 요구합니다. 욕망은 지배를 추구하지만 예언자들은 섬김과 돌봄을 요구합니다. 욕망은 결핍에 주목하지만 예언자들은 값없이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떠합니까? 예언자들의 말은 여전히 경청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보다는 욕망의 부추김에 따라 움직입니다. 스스로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성경보다는 T.V나 SNS 혹은 유튜브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에 더욱 귀를 기울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율적으로 느끼고 사고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복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혹은 참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정보가 부족하여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생각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기근
우리는 지금 참 두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암8:11).
배 터지게 먹는 것 같은 데도 배가 고프고, 매 시간 물을 마시지만 목이 마른 상황, 뭔가 병적 징후임이 분명합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반석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감사와 감격이 있었습니다. 가끔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광야는 협동을 익히는 곳이었습니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절감했습니다. 서로 기다려주고, 이끌어 주고, 보듬어 주지 않으면 그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정착생활에 익숙해지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사람들은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리자 하나님의 말씀은 부담스럽기만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지향을 잃고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이 탐욕적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그 때나 지금이나 세속적인 사회의 현실입니다. 아모스는 그 까닭을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도 많고, 또 말씀을 배우려는 이들도 많습니다. 열정만 있으면 성경을 배울 길은 많습니다. 문제는 말씀과의 만남이 우리 존재를 새롭게 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 삶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 마음에 단 이야기만 취하고 다른 이야기는 흘려버린다면 우리의 에고만 강화될 뿐입니다. 많이 알고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가운데 자아가 강한 이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한때 우리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런 영적 갈급함이 없어 우리는 배고프고 목이 마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배경으로 하여 만든 복음성가도 떠오릅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오늘 우리는 어느 우물가에서 생수를 구하고 있습니까? 며칠 전에 목회실 식구들이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교우들과 만나 식사를 마친 후 주차장으로 내려왔습니다. 우리 기억은 차가 B66구역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한참 헤맨 끝에 우리가 차를 발견한 곳은 D66구역이었습니다. 엉뚱한 데 가서 찾고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 삶이 이런 것 같습니다. 영적 허기증과 목마름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는 엉뚱한 데서 해답을 찾곤 합니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참 말씀과 만나지 못합니다. 결국 아름다운 처녀들과 젊은 총각들이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소망의 무너짐입니다.
• 허망한 열정
이제는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우물에서 물을 찾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마리아의 부끄러운 우상을 의지하고 맹세하는 자들, 단과 브엘세바가 따르는 우상들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이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땅에 사는 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증오와 편견은 우상이 되어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합리적 의심은 필요합니다. 건전한 비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증오심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대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경청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경청되지 않는 곳은 전장으로 변하고, 그 땅은 묵정밭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육신이 되신 말씀인 예수님의 삶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일깨워주시는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이란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그 어떤 세력이 아니다. 인간 주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비판적 사유의 부재(absence of citical thinking)’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악한 자들이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엡4:14)
우리가 세상을 보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허와 혼돈과 흑암이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거친 말과 냉소가 상처 입힐 자를 찾아 떠도는 시대이지만, 따뜻한 말과 친근한 미소로 사람들 속에 하늘빛 고요를 심어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욕망의 전장에서 떠도느라 목마른 이들이 많지만, 누군가에게 시원한 물 한 잔 대접하는 마음으로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은 때일수록 지향을 분명히 하고 사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어둔 세상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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