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모험
김기석(2019-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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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어느덧 절기는 백로에 이르렀습니다. 백로는 이맘 때 쯤에 흰 이슬이 내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흰 이슬로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태풍 링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모든 이들을 주님께서 품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의 격랑 속에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눈을 감고 산다면 모를까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우리 마음은 쉴 새 없이 까불립니다. 마음을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정하 시인은 ‘바람 속을 걷는 법 3’이란 시에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리는지, 허구 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 있다.”
가끔은 이유를 묻지 않고 묵묵히 제 생명을 살아가는 자연이 부럽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달아오른 영혼들이 맞부딪치며 내는 굉음이 귀를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슬픔은 정치가 우리 삶을 과잉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친밀해야 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우리는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는 것은 주체적 시민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현실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편가르기, 담 쌓기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부분적 사실에 편견과 감정을 뒤섞는 순간 진실은 사라집니다. 주전 5세기의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죽어간 장병들을 추모하면서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활동의 바탕으로 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각자 모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최선을 다하고, 전사(戰士)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뿐입니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상>, 박광순 옮김, 범우고전선 31, 1999년, p.175)
페리클레스는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사치에 빠지지 않고 지식을 사랑하지만 유약함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 즉 공공성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테네의 자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소리를 내는 일은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공정해야 하고, 진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 공정한 재판
오늘 우리가 레위기를 읽는 까닭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지향해야 할 세계를 가늠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레위기 17장부터 26장까지를 가리켜 ‘성결법전’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부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qadowsh)는 죄나 우상숭배와 무관한 것, 더럽거나 속된 것에 오염되지 않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성결법전이 말하는 거룩함이란 세상에서 단절되고 분리되어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서의 존재양식을 따라 사회적 약자와 미물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낮고 겸손한 태도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성결법전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서로 협력하는 존재로 지으셨지만, 사람들은 경쟁을 내면화한 채 살아갑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이들일수록 평화롭게 지내기 어렵습니다. 곁에 있는 이들이 내 욕망충족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욕망과 욕망이 충돌할 때 그것을 조정하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법 정신의 핵심은 공정입니다. 법은 자의적으로 집행되면 안 됩니다. 친소 관계에 따라 임의로 집행되는 순간 법은 권위를 잃게 되고, 사회는 혼돈에 빠지고 맙니다.
法을 뜻하는 글자는 원래 ‘갈 거去’ 자 밑에 ‘외뿔 양’을 뜻하는 ‘록鹿’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인들은 마을에 정의를 훼손하는 자가 있으면 신화적 동물인 외뿔 양이 그를 뿔로 받아서 마을 밖으로 제거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그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法은 ‘물 수氵’변에 ‘갈 去’ 자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물이 늘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평평해지는 성격을 법의 본질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법이 정치인이나 관료 혹은 대기업에는 관대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는 가혹하다면 법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가 시끄러운 것은 법을 안다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잣대로 법을 논하고 적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정함을 지키는 것도 거룩한 삶입니다.
∙ 헐뜯지 말라
거룩을 지향하는 이들은 남을 헐뜯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면 마음에 딱 드는 사람도 있지만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온 내력이 다 다르고 성격도 저마다 다릅니다. 성마른 이가 있고 느긋한 이가 있습니다.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도 있고 냉소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타적인 사람도 있지만 이기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왠지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선선한 사람, 남을 너무 강제하지 않는 사람, 지나치게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겸손한 사람과 만나면 기분이 좋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불쾌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과도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게 인생입니다. ‘아, 저 사람은 나하고 다르구나’ 하며 차이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다른 거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틀렸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을 고쳐주려 합니다. 그런 태도를 보일 때마다 서로에게서 멀어집니다.
누군가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헐뜯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히일rakiyl’은 ‘중상하다’, ‘수군거리다‘, ‘말을 옮기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비방이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참 불쾌한 일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말을 옮기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옮겨지는 과정 중에 저마다의 감정이 실리고 판단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공동체를 세우기는커녕 무너뜨리게 마련입니다. 세우는 말이 아니라 허무는 말이 횡행할 때 세상은 삭막해집니다.
성경은 이웃이 잘못된 일을 할 때는 타이르라고 말합니다. 바르게 살도록 권고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권고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충고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내가 비워지지 않은 채 하는 말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타이르려는 사람은 먼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백을 마련해야 합니다. 미쉘 꽈스트의 말이 제게는 참 적절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위해 당신을 잠잠해지게 하라. 그 사람이 당신 인생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무엇을 대면할 것인가? 만일 당신 속에서 주를 대면한다면 그는 새로운 평화와 새로운 기쁨을 맛보면서 용기백배하여 돌아갈 것이다. 티 없는 접촉은 우리를 하느님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미쉘 꽈스트, <참 삶의 길>, 조철웅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1989, p.132)
“그 사람이 당신 인생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무엇을 대면할 것인가?” 이 질문과 맞닥뜨렸을 때 잠시 심호흡을 해야 했습니다. 이 질문 속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티 없는 접촉’은 사랑에 근거한 접촉입니다. 미워하는 마음, 앙심을 품거나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으로는 한 사람을 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이익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건한 삶의 가장 큰 적은 ‘이익을 보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19:16b). 남산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동상의 기단 부분에는 안 의사의 좌우명이 적혀 있습니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이익에 직면하면 옳음을 생각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목숨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구절인데, 동상에 새겨진 글씨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여순 감옥에 갇혀 있던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 글씨라고 합니다.
이익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뜻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 해도 이익에 집착하면 추해지게 마련입니다. 이익 다툼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갈등의 뿌리입니다. 자주 들으신 말씀이겠습니다만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인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마음 쓰는 사람이라는 말일 겁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15: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죽어간 김용균 씨, 철로 작업 중 전동차에 치어 죽은 외주 노동자 A씨, 유명한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 과로로 순직한 소방관들과 집배원들, 철탑 위에서 정의 회복을 외치고 있는 김용희 씨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돈에 중독된 우리 사회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이익이 우선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몇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비소를 많이 취급하고 해로운 무기물을 취급하고, 또는 용해된 납이 들어 있는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게 해서”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건강의 문제를 그는 적극적으로 연결 짓고 있습니다. 국법을 해치거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도록 함으로써 영혼을 팔아버리도록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또 이웃의 육체를 해침으로써 이익을 도모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웨슬리 설교전집3>, 설교 50 ‘돈의 사용’, 대한기독교서회, 2006).
이익을 위해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이웃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일이요, 비인간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게 사는 이들은 거룩한 삶과 무관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성결법전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19:18b) 이 말씀은 19장 2절에 나오는 대명령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와 상응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은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게 대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귀결된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갈5:15)
주님께서 험하고 거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거룩한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세상 앞에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모험에 초대받았습니다. 발걸음이 다소 더디더라도 사랑으로 걷는 길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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