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사랑의 모험

천국생활 2019. 9. 8. 17:37

사랑의 모험

김기석(2019-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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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험
레19:15-18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어느덧 절기는 백로에 이르렀습니다. 백로는 이맘 때 쯤에 흰 이슬이 내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흰 이슬로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태풍 링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모든 이들을 주님께서 품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의 격랑 속에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눈을 감고 산다면 모를까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우리 마음은 쉴 새 없이 까불립니다. 마음을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정하 시인은 ‘바람 속을 걷는 법 3’이란 시에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리는지, 허구 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 있다.”

가끔은 이유를 묻지 않고 묵묵히 제 생명을 살아가는 자연이 부럽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달아오른 영혼들이 맞부딪치며 내는 굉음이 귀를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슬픔은 정치가 우리 삶을 과잉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친밀해야 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우리는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는 것은 주체적 시민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현실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편가르기, 담 쌓기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부분적 사실에 편견과 감정을 뒤섞는 순간 진실은 사라집니다. 주전 5세기의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죽어간 장병들을 추모하면서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활동의 바탕으로 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각자 모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최선을 다하고, 전사(戰士)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뿐입니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상>, 박광순 옮김, 범우고전선 31, 1999년, p.175)

페리클레스는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사치에 빠지지 않고 지식을 사랑하지만 유약함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 즉 공공성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테네의 자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소리를 내는 일은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공정해야 하고, 진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 공정한 재판


 오늘 우리가 레위기를 읽는 까닭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지향해야 할 세계를 가늠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레위기 17장부터 26장까지를 가리켜 ‘성결법전’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부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qadowsh)는 죄나 우상숭배와 무관한 것, 더럽거나 속된 것에 오염되지 않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성결법전이 말하는 거룩함이란 세상에서 단절되고 분리되어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서의 존재양식을 따라 사회적 약자와 미물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낮고 겸손한 태도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성결법전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서로 협력하는 존재로 지으셨지만, 사람들은 경쟁을 내면화한 채 살아갑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이들일수록 평화롭게 지내기 어렵습니다. 곁에 있는 이들이 내 욕망충족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욕망과 욕망이 충돌할 때 그것을 조정하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법 정신의 핵심은 공정입니다. 법은 자의적으로 집행되면 안 됩니다. 친소 관계에 따라 임의로 집행되는 순간 법은 권위를 잃게 되고, 사회는 혼돈에 빠지고 맙니다.

法을 뜻하는 글자는 원래 ‘갈 거去’ 자 밑에 ‘외뿔 양’을 뜻하는 ‘록鹿’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인들은 마을에 정의를 훼손하는 자가 있으면 신화적 동물인 외뿔 양이 그를 뿔로 받아서 마을 밖으로 제거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그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法은 ‘물 수氵’변에 ‘갈 去’ 자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물이 늘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평평해지는 성격을 법의 본질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법이 정치인이나 관료 혹은 대기업에는 관대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는 가혹하다면 법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가 시끄러운 것은 법을 안다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잣대로 법을 논하고 적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정함을 지키는 것도 거룩한 삶입니다.

∙ 헐뜯지 말라


 거룩을 지향하는 이들은 남을 헐뜯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면 마음에 딱 드는 사람도 있지만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온 내력이 다 다르고 성격도 저마다 다릅니다. 성마른 이가 있고 느긋한 이가 있습니다.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도 있고 냉소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타적인 사람도 있지만 이기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왠지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선선한 사람, 남을 너무 강제하지 않는 사람, 지나치게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겸손한 사람과 만나면 기분이 좋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불쾌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과도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게 인생입니다. ‘아, 저 사람은 나하고 다르구나’ 하며 차이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다른 거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틀렸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을 고쳐주려 합니다. 그런 태도를 보일 때마다 서로에게서 멀어집니다.

누군가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헐뜯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히일rakiyl’은 ‘중상하다’, ‘수군거리다‘, ‘말을 옮기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비방이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참 불쾌한 일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말을 옮기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옮겨지는 과정 중에 저마다의 감정이 실리고 판단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공동체를 세우기는커녕 무너뜨리게 마련입니다. 세우는 말이 아니라 허무는 말이 횡행할 때 세상은 삭막해집니다.

성경은 이웃이 잘못된 일을 할 때는 타이르라고 말합니다. 바르게 살도록 권고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권고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충고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내가 비워지지 않은 채 하는 말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타이르려는 사람은 먼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백을 마련해야 합니다. 미쉘 꽈스트의 말이 제게는 참 적절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위해 당신을 잠잠해지게 하라. 그 사람이 당신 인생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무엇을 대면할 것인가? 만일 당신 속에서 주를 대면한다면 그는 새로운 평화와 새로운 기쁨을 맛보면서 용기백배하여 돌아갈 것이다. 티 없는 접촉은 우리를 하느님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미쉘 꽈스트, <참 삶의 길>, 조철웅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1989, p.132)

“그 사람이 당신 인생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무엇을 대면할 것인가?” 이 질문과 맞닥뜨렸을 때 잠시 심호흡을 해야 했습니다. 이 질문 속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티 없는 접촉’은 사랑에 근거한 접촉입니다. 미워하는 마음, 앙심을 품거나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으로는 한 사람을 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이익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건한 삶의 가장 큰 적은 ‘이익을 보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19:16b). 남산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동상의 기단 부분에는 안 의사의 좌우명이 적혀 있습니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이익에 직면하면 옳음을 생각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목숨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구절인데, 동상에 새겨진 글씨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여순 감옥에 갇혀 있던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 글씨라고 합니다.

이익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뜻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 해도 이익에 집착하면 추해지게 마련입니다. 이익 다툼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갈등의 뿌리입니다. 자주 들으신 말씀이겠습니다만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인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마음 쓰는 사람이라는 말일 겁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15: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죽어간 김용균 씨, 철로 작업 중 전동차에 치어 죽은 외주 노동자 A씨, 유명한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 과로로 순직한 소방관들과 집배원들, 철탑 위에서 정의 회복을 외치고 있는 김용희 씨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돈에 중독된 우리 사회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이익이 우선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몇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비소를 많이 취급하고 해로운 무기물을 취급하고, 또는 용해된 납이 들어 있는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게 해서”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건강의 문제를 그는 적극적으로 연결 짓고 있습니다. 국법을 해치거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도록 함으로써 영혼을 팔아버리도록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또 이웃의 육체를 해침으로써 이익을 도모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웨슬리 설교전집3>, 설교 50 ‘돈의 사용’, 대한기독교서회, 2006).

이익을 위해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이웃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일이요, 비인간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게 사는 이들은 거룩한 삶과 무관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성결법전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19:18b) 이 말씀은 19장 2절에 나오는 대명령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와 상응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은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게 대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귀결된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갈5:15)

주님께서 험하고 거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거룩한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세상 앞에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모험에 초대받았습니다. 발걸음이 다소 더디더라도 사랑으로 걷는 길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김기석

지거 쾨더의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는 독일의 사제 화가입니다. 그림이 묵상의 좋은 매개라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그림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깊은 신학적 통찰을 그림 속에 녹여내고 있기에, 감상자들은 그림과 무언의 대화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작가가 숨겨놓은 메시지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림 감상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조차 그의 그림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익숙한 이야기 속에 숨겨진 낯섦을 해독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인식의 지평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밝고 강렬한 색채는 그림 해석은 어렵다는 일반인들의 정서적 두려움의 베일을 벗겨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거 쾨더는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역의 작은 도시 바서알핑엔(Wasseralfingen)에서 태어났습니다. 슈베비슈 그뮌트(Schwäbisch Gmünd) 국립공예학교에서 조각과 금속디자인을 공부했고,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예술학교에서는 미술과 예술사를 배웠습니다. 작가와 미술교사로 살던 그는 뒤늦게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침내 1971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교구 사제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구민들은 물론이고 많은 기독교 대중들을 성서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해 그림과 성경 이야기를 담은 여러 권의 묵상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를 기준은 우리가 교회에 속한 사람인지 여부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약자들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했던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구분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만족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 사이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귀가 닳도록 들어온 이들은 이런 메시지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의 고통에 눈을 감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밖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로 세상을 떠도는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대개 세상에서 꺼림의 대상이 되는 이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들과 연루되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 합니다. 연루됨 그 자체가 삶에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이들과 연루되기를 꺼리는 순간 ‘거룩한 삶’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거 쾨더는 한 화면 속에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여섯 부류의 사람들을 다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굶주린 사람과 헐벗은 사람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굶주린 사람은 화면의 맨 아래에 손으로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못자국이 선명합니다. 감상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헐벗은 사람은 벽면에 그려진 포스터에 등장합니다. 그 포스터에는 독일말로 ‘제3세계를 위한 옷’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한 공간 속에 많은 인물을 그릴 수 없어서 이런 장치를 사용한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간의 분할은 화가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람의 손과 그에게 빵을 나눠주는 사람의 손만 등장시킨 것은 어쩌면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는 말씀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사실 ‘베푼다’는 말은 조금 불편합니다. 그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시혜자와 수혜자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주는 사람은 자기의 선행에 만족할지 몰라도 받는 이들은 굴욕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고도 생색을 내지 않을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야 제대로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손으로만 표현된 나눔은 바로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도움을 받는 이들의 얼굴은 다 동일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린 문 앞에 선 나그네가 등지고 서있는 저편에 붉은 대지와 맑고 푸른 하늘이 아스라히 보입니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주 작게 그려진 그 십자가는 문 안쪽,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로 묶어주는 벼릿줄입니다.



이 그림에서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손‘입니다. 화면의 맨 아래에 등장하는 손만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돌보고 어루만지는 이들의 손이 도드라집니다. 어루만짐은 치유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결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낙인찍힌 이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의 접촉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를 감행했던 것은 그들의 존엄을 지켜주려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루만짐 혹은 접촉은 환대의 다른 표현입니다. 저널리스트인 고종석 씨는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어루만지다>>, 233)라고 말합니다.



‘손’은 우리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입니다. 손처럼 표정이 풍부한 것이 또 있을까요? 악수하는 손, 노동을 통해 세상과 교섭하는 손, 누군가를 때리는 손, 밀어내는 손, 쓰다듬는 손, 어루만지는 손, 기도를 위해 모은 손…. 손은 발화되지 않는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장편시 ‘흰 손’은 우리가 하나님께 내보여야 할 손이 무엇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심판의 자리에 나오는 신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 보여줍니다. “멀리서부터 머리 조아려 조아려/걸음마다 떨며 부르는 합창소리/‘감사와 찬송을 드리옵니다/영광과 존귀를 세세에 드리옵니다.’/‘죽을 죄인들 아무 공로 없사오나/우리 주 예수 흘린 피 믿습니다./모든 죄 대속해주심 힘입어/의롭다 해주심 얻을 줄 알고 옵니다.’“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굴을 들라시면서 “내 아들에 입 맞춘 네 눈동자를 보자./손을 내밀어라./그 피를 움켜 마셨을 그 네 손을.’” 보여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살과 뼈와 혼과 얼에 예수의 피가 배었다면, 남 위해 땀 흘리고 피 흘렸다면, 우리의 손이 ‘흰 손’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거 쾨더의 그림은 분주하기에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살라는 일종의 초대장입니다. 그 그림들을 읽으며 고요히 자신을 성찰할 때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낼 힘이 유입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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