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목소리를 내라

천국생활 2019. 9. 22. 17:46

목소리를 내라

김기석(2019-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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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내라
행18:5-11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는, 바울은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힘을 쓰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유대 사람들에게 밝혀 증언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반대하고 비방하므로, 바울은 그의 옷에서 먼지를 떨고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멸망을 받으면,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책임이지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 이제 나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겠습니다." 바울은 거기를 떠나서, 디디오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이방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고, 그의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회당장인 그리스보는 그의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주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린도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바울의 말을 듣고서,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환상 가운데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머물렀다.]

∙상실감을 넘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태풍 타파 때문에 지역에 따라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뭘 ‘타파打破‘하고 지나갈지 모르겠습니다. 별 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어제는 전국 도처에서 ‘기후 위기 비상행동‘ 거리 행진이 벌어졌습니다. 아이들부터 노년층까지 즐겁고 유쾌하게 동참했습니다. 학자들은 1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을 50% 이상 감축하지 않으면 지구는 핵전쟁에 버금가는 위험에 빠질 거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더 많이,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지구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불편을 즐겁게 선택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물건을 아껴 쓰고, 에너지를 덜 쓰고, 고기를 덜 먹는 삶으로의 전환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태풍 타파가 지나고 나면 우리 사회가 조금 차분하고 냉철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이 나라를 광풍처럼 몰아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청년들이 체감하는 현실의 공포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왠지 짠한 생각이 듭니다. 주눅든 것처럼 시르죽어 지내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청년 세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앞선 세대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경쟁은 치열하고 안정된 직업을 얻을 기회는 부족하기에 반칙과 특권에 더욱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삼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 즉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는 세대라는 말이 자조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세대 규정에 맞서 스스로를 ‘부유세대浮遊世代‘, 곧 모든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기존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세대라고 규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젊은 뮤지션인 전범선 씨는 “표류하는 자는 구해줘야 하지만 부유하는 자는 내버려 두어야 한다”며 기성세대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질 않아 우울감에 빠진 이들도 많습니다.

청년 정신이 쇠퇴할 때 그 사회는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1970-80년대에 청년기를 거친 이들은 억압에 대항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지만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동구권이 해체된 후 세상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 속에 확고히 편입된 이후 세상은 훨씬 각박해졌습니다. 고학력자는 늘었지만 일자리는 줄어들었습니다.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상실감에 빠지거나 원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문제는 모두의 욕망이 평준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상황이 어떠하든 다른 이들이 누리는 것을 다 누리고 살고 싶어합니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점점 벌어집니다. ‘대박’을 노리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대박’이라는 말은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를 얻겠다는 무의식을 반영합니다. 이드거니 자기 일에 충실하기 어렵습니다.

∙제자됨의 징표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우리 삶을 원점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있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다가 사과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토끼가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달리기 시작하자, 다른 짐승들은 영문도 모른 채 토끼 뒤를 따라 달렸다는 우화가 떠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문법에 따라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문법을 따라 산다는 말이 아닐까요?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일어난 제국들,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살던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정의‘라는 삶의 문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하고 무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당연한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하나님의 뜻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자각했습니다. 성경은 그런 무도한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이 그러하고,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박해를 받게 마련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것을 가리켜 보이는 기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기꺼이 박해와 시련 속으로 들어갑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을 거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아름다움은 그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함께 열어가자고 사람들을 초대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5-27)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배의 포기, 남을 짓밟으면서라도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의 폐기야말로 예수의 제자됨의 징표입니다. 그 욕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이웃의 신음소리에 반응하게 되고, 허심탄회하게 이웃과 더불어 삶을 경축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선한 이들의 침묵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빛 가운데 임하신 주님과 만난 바울은 완전히 삶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세속의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달려가던 그가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의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소아시아와 유럽을 떠돌며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고린도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연결되는 지점에 있는 도시입니다. 도시 양안에 항구가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에게해와 이오니아 해를 오가는 배들로 북적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직인들이 몰려들어 국제도시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음란한 도시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납니다. 그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주후 49년에 반포한 유대인 추방 칙령으로 로마에서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황제는 자기들 나름의 강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살던 유대인들이 국가를 위협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그들을 추방했습니다. 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 부부의 작업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경건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얼마 후 디모데와 실라가 고린도에 도착하자 바울은 장막 만드는 일을 그만 두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아마도 빌립보 교인들이 그 두 사람을 통해 보낸 후원금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선포는 단순 소박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의 도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준으로 보아 메시야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분’, ‘승리자‘, ‘위대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비방이 노골화되자 바울은 옷에서 먼지를 털면서 "여러분이 멸망을 받으면,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책임이지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 이제 나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겠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옷에서 먼지를 터는 행위는 결별을 나타내는 상징 행동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들어간 곳은 디도 유스도의 집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마침 회당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회당장인 그리스보도 바울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밤 바울은 환상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행18:9a-10) 이 구절은 뒤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고발과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하자 바울을 두고 "이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행18:13)라고 고발합니다. ‘선동한다’(anapeitho)는 단어는 통치자들에게는 늘 불쾌한 단어입니다. 그들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바울의 말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오히려 법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툭 하면 고소 고발을 남발하는 것은 참 딱한 일입니다. 혐의가 있건 없건 고발을 당하고,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나 법원에 출두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부담이 됩니다. 공의를 위해서 일한다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면 조금 의기소침해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마치 스타카토 식 단문으로 이어지는 이 명령은 매우 강력합니다.

∙길들여진 기러기의 슬픔


 악이 번성하는 것은 선한 이들이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편견에 차 있고, 뻔뻔하고, 자기 잇속을 차리는 데 발밭은 사람들일수록 목소리가 큽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점잖게 그들의 말과 주장을 반박해보지만 막무가내에 부딪히곤 합니다. 마치 담벼락에 부딪친 느낌이 듭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라’ 하십니다. TMI(too much information), TMT(too much talker)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소리를 지레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들려주는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기러기 한 마리가 내려와 날개가 퇴화해 날지 못하는 거위들에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푸른 하늘을 잊고 사는 거위들이 딱해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거위들은 그를 몽상가로 여길 뿐, 도무지 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외당하고 외면당하던 기러기는 끝내 의기소침해져서 자기도 거위처럼 날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래서 외칩니다. “거위는 절대 기러기가 될 수 없으나 기러기는 곧잘 거위가 돼 버린다. 경계하라!” 그는 인간 영혼이 얼마나 타락하기 쉬운지 이미 아프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저 광대한 세계를 가리켜 보이시는데 우리 시야는 온통 현실에만 붙박여 있는 것은 아닌지요? 똑같은 공간 속에 있어도 파리는 벽과 문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개는 벽과 문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벽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 그림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파스칼의 말대로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데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어 산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의 문제에 충실하면서도 더 큰 지평 속에서 자기 삶을 돌아본다는 뜻일 겁니다. 시선이 멀거나 높아지면 세상은 사뭇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이 자유를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먹고 사는 일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몰두하느라 하늘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늘의 뜻이 우리 속에 채워질 때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욕망의 힘이 약화됩니다.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꿈은 포기되어서도 안 되고 잊어서도 안 됩니다. 두려움 없이 새로운 세상을 지향해야 합니다. 기후 위기에 함께 대응하고, 분열된 세상에 일치의 기쁨을 가져가고, 증오와 편견을 내려놓고 사랑의 모험을 시작하는 것, 바로 이것이 새로운 세상에 초대받은 이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공동체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새로운 세상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주님은 멈추지 말고 목소리를 내라 하십니다.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새컬럼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김기석

지거 쾨더의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는 독일의 사제 화가입니다. 그림이 묵상의 좋은 매개라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그림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깊은 신학적 통찰을 그림 속에 녹여내고 있기에, 감상자들은 그림과 무언의 대화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작가가 숨겨놓은 메시지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림 감상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조차 그의 그림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익숙한 이야기 속에 숨겨진 낯섦을 해독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인식의 지평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밝고 강렬한 색채는 그림 해석은 어렵다는 일반인들의 정서적 두려움의 베일을 벗겨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거 쾨더는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역의 작은 도시 바서알핑엔(Wasseralfingen)에서 태어났습니다. 슈베비슈 그뮌트(Schwäbisch Gmünd) 국립공예학교에서 조각과 금속디자인을 공부했고,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예술학교에서는 미술과 예술사를 배웠습니다. 작가와 미술교사로 살던 그는 뒤늦게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침내 1971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교구 사제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구민들은 물론이고 많은 기독교 대중들을 성서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해 그림과 성경 이야기를 담은 여러 권의 묵상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를 기준은 우리가 교회에 속한 사람인지 여부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약자들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했던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구분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만족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 사이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귀가 닳도록 들어온 이들은 이런 메시지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의 고통에 눈을 감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밖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로 세상을 떠도는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대개 세상에서 꺼림의 대상이 되는 이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들과 연루되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 합니다. 연루됨 그 자체가 삶에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이들과 연루되기를 꺼리는 순간 ‘거룩한 삶’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거 쾨더는 한 화면 속에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여섯 부류의 사람들을 다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굶주린 사람과 헐벗은 사람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굶주린 사람은 화면의 맨 아래에 손으로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못자국이 선명합니다. 감상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헐벗은 사람은 벽면에 그려진 포스터에 등장합니다. 그 포스터에는 독일말로 ‘제3세계를 위한 옷’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한 공간 속에 많은 인물을 그릴 수 없어서 이런 장치를 사용한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간의 분할은 화가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람의 손과 그에게 빵을 나눠주는 사람의 손만 등장시킨 것은 어쩌면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는 말씀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사실 ‘베푼다’는 말은 조금 불편합니다. 그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시혜자와 수혜자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주는 사람은 자기의 선행에 만족할지 몰라도 받는 이들은 굴욕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고도 생색을 내지 않을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야 제대로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손으로만 표현된 나눔은 바로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도움을 받는 이들의 얼굴은 다 동일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린 문 앞에 선 나그네가 등지고 서있는 저편에 붉은 대지와 맑고 푸른 하늘이 아스라히 보입니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주 작게 그려진 그 십자가는 문 안쪽,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로 묶어주는 벼릿줄입니다.



이 그림에서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손‘입니다. 화면의 맨 아래에 등장하는 손만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돌보고 어루만지는 이들의 손이 도드라집니다. 어루만짐은 치유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결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낙인찍힌 이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의 접촉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를 감행했던 것은 그들의 존엄을 지켜주려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루만짐 혹은 접촉은 환대의 다른 표현입니다. 저널리스트인 고종석 씨는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어루만지다>>, 233)라고 말합니다.



‘손’은 우리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입니다. 손처럼 표정이 풍부한 것이 또 있을까요? 악수하는 손, 노동을 통해 세상과 교섭하는 손, 누군가를 때리는 손, 밀어내는 손, 쓰다듬는 손, 어루만지는 손, 기도를 위해 모은 손…. 손은 발화되지 않는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장편시 ‘흰 손’은 우리가 하나님께 내보여야 할 손이 무엇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심판의 자리에 나오는 신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 보여줍니다. “멀리서부터 머리 조아려 조아려/걸음마다 떨며 부르는 합창소리/‘감사와 찬송을 드리옵니다/영광과 존귀를 세세에 드리옵니다.’/‘죽을 죄인들 아무 공로 없사오나/우리 주 예수 흘린 피 믿습니다./모든 죄 대속해주심 힘입어/의롭다 해주심 얻을 줄 알고 옵니다.’“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굴을 들라시면서 “내 아들에 입 맞춘 네 눈동자를 보자./손을 내밀어라./그 피를 움켜 마셨을 그 네 손을.’” 보여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살과 뼈와 혼과 얼에 예수의 피가 배었다면, 남 위해 땀 흘리고 피 흘렸다면, 우리의 손이 ‘흰 손’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거 쾨더의 그림은 분주하기에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살라는 일종의 초대장입니다. 그 그림들을 읽으며 고요히 자신을 성찰할 때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낼 힘이 유입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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