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천국생활 2019. 10. 21. 12:54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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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롬15:7-9
(2019/10/20, 창조절 제8주, 야외예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우울한 시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현존 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은 받아들이심입니다. 허물 많고 죄 많은 우리들을 하나님은 내치지 않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구원받음의 체험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정의했습니다. 마치 탕자를 맞아들였던 그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품에 안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여짐의 체험‘은 참 소중합니다. 거칠고 냉랭한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적대적인 시선과 말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 마음에 멍이 듭니다. 서양에서는 우울함을 ‘푸른 악마‘(blue devil)라고 한답니다. 우울에 빠진 영혼의 핏기 잃은 창백한 모습을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적대적인 말과 시선으로 인해 가슴에 멍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우울감에 많이 시달립니다. 누군가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그들의 설 자리를 허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떠밀리다가 결국 벼랑 끝에 서는 이들이 많습니다.

‘설리‘라는 예명을 썼던 ‘최진리’ 씨가 악플과 혐오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당당해 보였던 그의 극단적인 선택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당함의 이면에 있던 여린 속살이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실명이든 닉네임이든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고 무정한 말들을 쏟아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불만과 욕구를 배설하는 것일 테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폭력이라는 생각은 아예 없는 것 같습니다. 수치심을 자극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말들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은 점점 빈곤해진 까닭입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신성보다 권력을, 정신보다 물질을 추구하는 시대’를 가리켜 ‘궁핍한 시대’라 했습니다. 지금은 분명히 궁핍한 시대입니다. 도무지 여유가 없습니다. 타자를 위한 여백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머뭇거림


 믿음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은 주인에게서 달아났던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몬1:17). 받아들임 혹은 맞이함 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가 나와 사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해도 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평화가 시작됩니다. 김현경 교수는 환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가 내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는 것이 환대의 기본입니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씨가 부른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기억하시나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노랫말이지만 우리 삶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 ‘나의 어둠’, ‘나의 상처’, ‘내 생각’ 등이 다른 이들을 찌르고 밀어내고 있지 않은지요? 다른 이들을 내 방식대로 바꾸어 놓으려 할 때 불화가 생깁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확신이야말로 평화의 적입니다.

며칠 전 어느 법조인과 만난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오랫동안 판사를 지낸 그 분은 법관들이 제일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종교인이고, 둘째는 교수, 그리고 셋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다른 이들의 말에 좀처럼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너무들 당당합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머뭇거림(hesitation)‘이 그것입니다. 머뭇거림은 결단성 있게 딱 잘라서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사람을 대할 때 서슴없이 그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어떤 사람을 깊이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선입견에 따라 사람을 재단하기보다는 판단을 자꾸 유보해야 합니다. 누구든 낯선 곳에 가면 거침없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행동거지를 바로 하려 애씁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런 조심스러움이 없어서 세상이 난장판입니다.

교회는 받아들임을 연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나무 뒤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때 아담은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창3:10b)라고 대답합니다. ‘벗음’, ‘두려움’, ‘숨음’, 이 세 단어야말로 시간 속을 바장이는 우리 삶의 실상을 제대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벗은 몸을 남들에게 드러내기 싫어하는 것처럼 연약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연약함은 실패의 징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이들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세상이기에 우리는 강한 척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모욕과 수치심에 내몰린 이들은 자꾸 움츠러듭니다. 세상이 그들을 ‘비존재’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자꾸 겪다 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실패, 거절, 버림받음, 인정받지 못함, 질병, 죽음 등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를 치장하거나 권력 뒤에 숨으려 합니다. 잊혀지거나 밀려나고 싶지 않다는 바람 때문에 사람들은 유명해지려 하거나, 다른 이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선원으로 살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당시의 세계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장벽을 허물기 위해 인위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잔뜩 주눅 들어 사는 이들 곁에 다가가서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해주었을 뿐입니다. 우리 마음이 유한한 인간이 겪는 슬픔의 지층까지 내려갈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고통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신경림 선생의 시 ‘파장罷場’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너 잘 났느니 나 잘 났느니 따지지 않고 흉허물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마20:28) 이 마음이 없어 온통 지옥입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은 “내 이름을 이슈마엘이라고 해두자(Call me Ishmael)”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작중인물인 이슈마엘은 지갑에는 거의 돈이 한 푼도 없고 육지에는 흥미를 끌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배를 타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원들을 마구 부려먹는 선장도 아니었고, 배삯을 치른 승객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일개 선원으로서 바다에 나간다”(허먼 멜빌, <모비딕>, 김석희 옮김, 작가세계, p.35). 선원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살 때 비애가 적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일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선장처럼 지시하고, 승객처럼 뭔가를 요구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공동체는 분란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선원으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이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선물로 주신 분입니다. 어제 이어령 교수께서 인터뷰를 통해 하신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라면서,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우리도 주며 살아야 합니다. 일치와 나눔과 섬김의 기쁨으로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만남을 통해 빚어진 희망과 기쁨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들이 환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만드십시오. 주님은 그런 우리의 실천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아멘.




새컬럼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김기석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1226년 10월 3일, 기독교 2천 년 역사상 가장 그리스도를 많이 닮았다고 상찬받는 성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세속적인 권력까지 손에 쥔 교권주의자들이 주님의 교회를 망가뜨려 놓고 있을 때, 그는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가난의 영성’을 주창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프란체스코가 아직 세속적인 생활에 몰두하던 어느 날 꿈에 다미아노 성자를 만났던 일화를 들려준다. 



성인은 누더기를 걸친 채 맨발로 지팡이에 의지한 채 울고 있었다. 깜짝 놀란 프란체스코가 성인에게 천국에 계신 것 아니냐고, 천국에도 눈물이 있냐고 물었다. 다미아노는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면서 그 눈물은 아직도 지상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한다. 성인은 이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위험에 처했다면서 속히 잠에서 깨어나라면서 말한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여.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네. 그리스도께서 위험에 처해 있으니 어서 일어나게.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네의 등으로 떠받치게. 온 교회가 나의 작은 예배당처럼 퇴락하고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고 있다네. 교회를 일으켜 세우게!”



프란체스코는 그것을 하늘의 부름으로 받아들였고 이후의 그의 삶은 무너진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바쳐졌다. 하나님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비웠기에 그는 자유로웠다. 앎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과 남보다 크게 보이고 싶은 허영심을 버리자 신적 사랑이 그의 속을 가득 채웠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 같은 그의 속에 숨결을 불어넣어 하늘의 소리를 발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된 채 바라본 세상은 신비 그 자체였다. 그는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부른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무정물까지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 새삼 그가 그리워지는 것은 ‘가난의 영성’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현실이 암담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회됨은 규모에 있지 않다.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고, 사용 가능한 재정이 넉넉할 때 사람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크기의 신화에 속절없이 굴복한다. 하지만 크기와 영성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가 된 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교회성장 신화에 몰두하면서부터이다. ‘성장‘이 암암리에 지상과제가 되는 순간 예수 정신은 스러지기 십상이다. 본(本)과 말(末)이 뒤집힐 때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교회 밖 사람들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각 교단의 총회가 열리는 가을이 참 괴로운 계절이 되었다. 교회는 욕망을 중심으로 맴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초월의 빛을 비추어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따라서 각 교단 최고 의결기관에서는 그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심도 있게 논의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장벽을 쌓는 일에 몰두하거나, 자신들이 제정한 헌법을 특정한 교회와 개인의 편의를 위해 왜곡한다. 토라는 재판할 때에 가난한 사람이라 하여 편을 들지도, 힘 있는 사람이라 하여 두둔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공의와 정의의 토대가 무너지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찰적 지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 사람들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상실할 때 종교는 쇠락기에 접어든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스위스 북동부 알프스 산맥에 속한 해발 2700미터의 피졸산 정상 밑자락에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사라지는 빙하를 애도하는 장례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기후변화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이들이라면 피조물들의 신음소리에 어떻게든 응답해야 한다. 



세상이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 경쟁이 심화되면서 혐오와 적대감의 언어가 늘어나고, 공감의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 땅 끝에 서 있는 이들이 많다. 교회는 그들의 설 땅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는 신앙을 넘어서야 한다.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교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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