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천국생활 2019. 11. 21. 07:17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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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눅13:18-2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겨자씨의 다음 경우와 같다.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누룩의 다음 경우와 같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

∙다른 세계를 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수능 시험을 마치고 이제 잠시 숨을 고르게 된 모든 수험생들에게도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스산한 초겨울,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더욱 그리운 계절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히 비유의 천재라 할 수 있습니다.

낯익은 것을 통해 낯선 것, 일상적인 것을 통해 거룩한 것을 그려 보이시니 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 예수>라는 책에서 세베대의 아들의 입을 빌어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시인으로 만드는 시인’이라 말했습니다. 시인은 다른 세계를 보는 사람입니다. 조각난 것들을 연결시켜 새로운 세상을 짓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다 시인입니다. 낯선 것,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하는 데 명수이니 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시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이승과 내세를 잇는/하나의 고리/목마름을 위한 향기로운 물이 있는 연못/아름다움의 강가에 심어진 한 그루 나무/굶주린 마음들이 잘 익은 열매들을 기르는 나무”. 시인은 새로운 세상을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의미에서 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적절한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주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이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셨던지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가져다가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가 그 가지에 깃들였다”. 이게 무슨 이야기이지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머리에 그려지십니까? 아마 현장에서 이 비유를 들었던 이들도 우리처럼 당혹감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그러합니다. 첫째,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겨자를 정원에 심는다는 것은 말썽을 자초하는 일임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겨자는 쓸모가 많은 식물이지만 잡초입니다. 그리고 심겨진 자리가 아무리 척박해도 잘 자라 정원을 온통 차지합니다. 겨자를 정원에 심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걸 모르실리 없는 주님이 어쩌자고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셋째, 초본과 식물인 겨자는 아무리 커도 3미터를 넘지 않습니다. 나무가 되었다는 말은 어쩐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식물학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주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유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라볼레‘(parabole)는 ‘옆에 놓다’라는 뜻입니다. 뭔가 비교 대상이 있어야 우리는 ‘크다/작다’, ‘많다/적다’, ‘아름답다/추하다’라는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 등장하는 겨자씨 혹은 겨자풀도 뭔가 명백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비유의 대상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그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비유에 등장하는 다른 구절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거기에 깃들였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다니엘서 4장을 연상했을 겁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두 번째 꿈 이야기입니다. 그는 땅의 한 가운데 아주 높고 큰 나무가 있는데, 그게 점점 자라서 튼튼하게 되고, 그 높이가 하늘에 닿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뭇잎은 무성했고, 열매는 풍성했습니다. 들짐승이 그 그늘 아래서 쉬고, 가지에는 하늘의 새들이 깃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꿈이 대제국을 건설한 느부갓네살의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흐뭇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나무를 베고서 가지를 꺾고, 잎사귀를 떨고서 열매를 헤쳐라. 나무 밑에 있는 짐승들을 쫓아 버리고, 가지에 깃든 새들을 쫓아내어라”(단4:14). 오만에 빠진 제국의 해체를 경고 혹은 예고하는 꿈입니다.

∙ 더 많은 관계, 책임, 헌신


 주님은 어쩌면 지중해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스스로 하늘에 닿는 나무를 자부하는 로마제국을 염두에 두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홀로 우뚝하여 다른 모든 나무들은 안중에도 없는 나무인 로마제국은 평화 세상을 연 것처럼 보이지만, 로마의 평화란 폭력과 착취로 유지되는 허구의 평화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로마 제국에 대비되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나라는 홀로 우뚝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자기 생명의 몫을 한껏 살아내고, 서로 어깨를 겯고 비바람 이겨내고, 또 누군가의 품이 되어 주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제국주의보다 더 음험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합니다. 스펙을 쌓고, 다른 이들이 누리는 것을 다 누리려 합니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거대 기술 사회, 거대 소비 사회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안락함과 편리함을 좇는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은 줄도 모르고 삽니다. 숨은 가쁘고, 마음의 여백도 사라졌습니다. 우정의 기쁨,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평안, 소박한 삶의 즐거움,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을 잃은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비사회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불편함을 자발적으로 선택합니다. 홀로는 그렇게 살기 어렵습니다. 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는 이들은 “더 많은 관계를 맺고, 더 많은 책임을 지고, 더 많이 헌신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스콧 새비지 엮음, <그들이 사는 마을>, 강경이 옮김, 느린걸음, p.24)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겨자풀들의 천국은 바로 이런 마음들을 통해 형성됩니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계수씨께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습니다. 한 알의 물방울이 되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 바다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지배적 자리에 서기보다, 낮은 자리에 서서 흉허물없이 어울리며 사는 것, 곁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느끼며 사는 것, 주님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라 말씀하십니다.

∙잔치가 시작되다


 이제 두 번째 비유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계시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이 비유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누룩의 발효 과정은 도덕적 타락의 은유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신구약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이 다가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온 집안을 뒤져 누룩과 누룩이 든 빵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유월절은 바로 그 다음날 시작되는 ‘무교절‘과 연결되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쓴 나물(merorim)과 누룩 없는 빵(matstsah)을 먹었습니다. 누룩을 삼간 것은 그것이 ‘옛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8:15). 누룩은 다른 이들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한다면서 할례를 받는 것과 구원을 연결시키는 그릇된 가르침을 경계하라고 말했습니다(갈5:9).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동일한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고전5:7). 바울은 묵은 누룩은 악의와 악독이라면서 믿음의 사람들은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이미지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 빗대 말씀하십니다.

비유를 듣는 청중들을 그보다 더 당황스럽게 한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도 누룩을 넣어 빵을 만드는 것이 당시 여성들의 일이었음을 모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데 여성을 주도적인 인물로 내세운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행동을 설명하는 단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누룩을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습니다. ‘섞어 넣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크립토(krypto)를 번역한 것인데 그 기본 뜻은 ‘감추다, 숨기다’입니다. 매우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옛 세계 한복판에 새로운 세계의 씨를 심는 사람으로 등장시킨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역사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성들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역사의 그늘 속에서 묵묵히 일해온 여성들, 세상의 아픔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할 줄 아는 여성들을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가루 서 말’이라는 말에도 놀랐을 겁니다. 당시의 부피 단위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 정도 분량을 가리킵니다.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한 가족이 먹기 위해 만드는 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 말’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을지 몰라도 예수님의 청중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이삭의 탄생을 예고하는 창세기 18장에 등장합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에 서있는 낯선 이들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장만할 터이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라고 권합니다. 그는 장막 안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창18:6)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 보듯 서 말 혹은 세 스아는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경축하기 위한 잔치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 어디에서나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셨다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운동을 가리켜 ‘밥상 공동체 운동‘이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 식구입니다. 그들은 밥만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눕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다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간 이야기에서도 밥 모티프가 등장합니다. 주님은 빈 그물질에 지친 제자들을 위해 해변에 숯불을 피우고 떡과 물고기를 구우셨습니다. 그들을 식구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 혹은 신의 없음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인간적인 연약함까지도 감싸 안으셨습니다. 그 가없는 사랑이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새로운 삶을 경축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음성을 따를 것인가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가 자리한 맥락을 잘 살펴야 합니다. 비유 바로 전에 나오는 것이 안식일에 등 굽은 여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며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던 여인이 주님의 도움으로 허리를 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성을 구원사의 주체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호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 스아의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베푼 잔치와 잘 연결됩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시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는 이들은 바깥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 이르셨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눅13:22-30). 좁은 문을 통과한 이들이 벌이는 흐드러진 잔치가 머리에 그려집니다. 겨자풀들의 천국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겨자풀에 안긴 셈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면서 누구보다 우뚝한 백향목이 되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삶의 기쁨을 나누며 살라 이르십니다.

 세상은 넓은 길을 보여주며 그 길에서 벗어나는 순간 루저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좁은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이라 가르치십니다.

 숙명론은 우리에게 아무리 애써 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우리를 길들이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시작하라 이르십니다.

탐욕과 이기심의 누룩을 제거하고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심는 것은 우리들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게 무르익어 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종교도 우상이 될 수 있다

김기석

종교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배를 타고 가던 한 힌두교도가 큰 폭포 쪽으로 그 배를 밀어내는 물살을 거스르기 위해 오랜 시간 싸웠다. 그 위대한 투사는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 노를 걸쳐 놓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 내 인생이 이 노래처럼 되게 하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 <토다 라바>에 나오는 구절이다. 물살과 더불어 싸웠지만 물살을 이길 수 없음이 분명해질 때 그는 노를 걸쳐 놓고 노래를 부른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에 그는 홀가분하게 죽음 앞에 선다. 죽음을 각오했기에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다. 범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기상이 느껴진다. 마지막 구절은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도 적혀 있다. 그의 문학과 생을 요약한 말인 셈이다. 믿음의 보람은 이런 당당함을 얻는 것 아니겠는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 한 마디 속에 모든 종교 경전의 핵심이 담겨 있다. 종교가 곧 진리는 아니다. 가장 종교적인 듯 보이는 사람이 진리와 무관할 때가 있다.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려움의 사슬에 묶여 사는 이들이 많다. 예수는 우리에게 종교를 가르치지 않았다. 참 사람다운 삶의 길을 가르치고 몸소 보여주셨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구원'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삶의 문제를 도외시한다. 구원받았다는 고백은 있으나 구원받은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채 드리는 제물의 향기가 역겹다고 하셨다. 종교조차 우상숭배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 시대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오용되고 있는 시대가 또 있을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저주하고, 전쟁을 선포하기도 한다. 자기 확장 욕망에 분칠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이들이다. 종교개혁 502주년을 맞이하는 지금도 교회 세습이라는 음습한 욕망과 작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교회 문제가 일간지의 사설이나 고발 프로그램에 등장한다. 어느 사이에 교회는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드 폰테스ad fontes, 이것은 종교개혁의 구호 가운데 하나이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기독교인의 근원은 예수 정신이다. 예수 정신의 핵심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무관한 타인은 없다. 모두가 아끼고 존중해야 할 이웃일 뿐이다. 



노자는 진리에 깊이 접속된 사람의 삶을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이라고 요약했다. 날카로움을 감추고, 얽힌 것을 풀어내고, 스스로 빛나려 하기보다 그 빛을 부드럽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티끌과 하나 된다는 말이다. 예수의 삶이 그러하지 않은가. 자기를 비워 종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가 스스로 빛나려함으로 어두워지고 말았다. 기가 막힌 전락이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주님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길은 예루살렘 성 동쪽에 있는 스데반 문 안쪽에서 시작되어 좁고 지저분하고 번잡스러운 시장통을 통과한다. 그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은 가방을 앞쪽으로 메고 가이드를 따라 종종걸음을 한다.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들은 그 길이 그렇게 시장통을 통과한다는 사실 자체를 속상해한다. 고요한 묵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이야말로 예수가 걸었던 길이 맞다. 



예수는 인간의 현실 저 너머에 있는 진리를 가리켜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발생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셨다. 진리는 바로 그런 곳에서 체현되어야 한다. 현실을 도외시한 진리 추구는 관념일 뿐이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그 교회가 중병에 걸렸다. 회복의 조짐보다 몰락의 조짐이 늘어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가 되기 위해 십자가를 택하셨던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기 확장 혹은 보존이라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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