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45 일
(잠언 10-24장)
<내용 요약>
잠언서는 크게 다섯 단원으로 나누입니다.
1. 지혜와 어리석음의 비교(1-9장)
2. 솔로몬의 잠언-솔로몬 자신에 의하여 기록되고 편집됨 (10-24장)
3. 솔로몬의 잠언-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함 (25-29장)
4. 아굴 왕의 잠언 (30장)
5.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잠언 (31장)
오늘 우리들의 성경 통독은 잠언 10-24장으로 이어집니다.
10-24장은 위에서 요약된 것처럼, 솔로몬에 의하여 저작되고 또 솔로몬에 의하여 편집된 잠언 집입니다. 어제 우리가 다루었던 1-9장은 전체가 잠언은 아니었습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특성들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교훈의 내용들이었고, 간간이 잠언들이 등장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10장부터는 매 절이 잠언들의 연속입니다. 마치 당알당알 포도송이들이 달린 것처럼 그렇게 잠언들이 탐스러운 열매로 가지마다 달려있는 것이 잠언서의 특성입니다.
<주요 통독 자료>
1. 지혜로운 아들과 미련한 아들
솔로몬은 잠언들을 들려주면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항상 대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잠언서에서 우리는 끝없이 계속되는 대조법적으로 나열된 문장들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10:1에서 솔로몬의 첫 번째 잠언을 보십시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참으로 진리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들에게 있어서 자기 아들이 지혜로운 일들을 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자랑스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보면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사명이 다 완수된 것 같은 만족을 얻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은 선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왜 자랑은 아빠의 것이고 근심은 어머니가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미련한 아들은 그 어미에게 크게 근심을 끼칩니다. 자녀에 대한 고통으로 아버지가 자살을 했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마는… 그러나 자녀의 고통을 인하여 어머니가 자살을 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좀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식들이 잘못을 하면 아버지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함께 싸잡아 나무랍니다. “당신은 집에서 도대체 뭐해? 아이가 이 꼴이 되도록 뭘 한 거야?"라고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싶으면 아빠는 말합니다. “에이, 그까짓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치지 뭐…” 이런 식의 말을 어머니가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그 모친 마리아가 결례의 날들을 모두 마친 후에 예수님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아식을 갖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것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헌아를 위하여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것을 보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 아기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시므온이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서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4-35)” 물론 예수님의 경우는 요셉이 일찍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 종종 나오지만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그 모친 마리아의 마음이 칼로 찌름을 받는 것 같은 고통을 받게 되리라는 시므온의 예언은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솔로몬의 잠언은 대조적인 것들을 병행시켜서 잠언의 가르침을 극대화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 문학의 시의 특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시입니다.
2. 미움과 사랑
10:1의 첫 번째 잠언이 그런 것처럼 10:12에서도 우리는 같은 패턴의 잠언을 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미움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여기에서 많은 경우 “다툼”이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단어가 바로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Hatred stirs up strife”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stirs up”은 마구 휘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휘저으면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미움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갈등의 요인들을 휘저어서 다 일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툼은 점점 더 커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덮어두면 편안합니다. 모든 것들이 다 가라앉고 맙니다. 여기 지저분한 물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가령 진흙탕 물이 있다고 합시다. 가만히 덮어두면 더러운 것들이 다 가라앉아서 물이 아주 맑게 보입니다. 하지만 휘저어 보십시오. 이내 새빨간 진흙탕 물이 다 올라와서 온통 물들을 더럽게 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들 속에는 많은 약점들이 있고, 또 죄성들이 아직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휘저어 놓으면 속에서 온갖 복잡하고 추한 것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이용하는 자가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인생들의 마음 속에 그저 미움의 씨앗 하나만 떨어뜨려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온통 우리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습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온갖 것들이 용솟음을 치게 됩니다. 이런 미움은 급격히 전이됩니다. 덮어두고 넘어가도 좋을 일들을 사사건건 끄집어 내서 휘젓게 됩니다. 결국은 다툼이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7:9은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미움과 정 반대의 일을 합니다. 사랑은 파헤치기 보다 따뜻하게 덮어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린 아기가, 혹은 귀여운 손자가 설탕 한 통을 카펫 바닥 위에 다 쏟아놓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유~ 귀여워라! 설탕도 예쁘게도 쏟았네? 이것 좀 보세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아무리 봐도 이 아이는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난 것 같아요. 어쩌면 설탕도 이렇게 예술적으로 쏟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가장 아름답고 선명하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고, 모든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문둥병자도 예수님께는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만져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3. 소가 없으면…
소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밭을 갈 수 있지요? 짐을 싣게 할 수도 있고 짐차를 끌게 할 수도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소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소에게 새끼를 낳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를 기르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꼴을 베러 나가야 합니다. 옥수수 대궁이나, 또한 들에서 풀을 베어다가 소를 먹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설령 사료를 가지고 소를 먹인다 하더라도 새벽마다 나와서 소를 먹이기 위하여 죽을 쑤어야 합니다. 구유는 항상 먹을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보통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소를 키우려면 외양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외양간은 항상 더러운 소의 배설물들로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쇠파리 같은 더러운 것들이 우글거립니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외양간을 수리해 주어야 하고, 또 청소해 주어야 합니다.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소를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소를 없애버리면 아마 구유는 깨끗하겠지요? 꼴을 먹이기 위해서 수고를 해야 할 필요도 없겠지요? 더러운 냄새가 나는 외양간을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겠지요? 하지만 소가 없다고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은데 이제 그 모든 것들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어에 “No pain, no gain!”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고자 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너무나 편안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잠언 11:15은 말합니다.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골치 아픈 일을 당하기 싫거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선다면 그는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 NKJV이란 번역본을 보면 여기 “타인”이 단순히 타인이 아니라, stranger입니다. 이는 “근본도 잘 알지 못하는 외인”이라는 뜻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 수상한 방랑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외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바보 같은 짓 따위는 하지 말라. 그런 일은 너에게 많은 불편과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다. 그런 일에 관여하는 것이 평화롭게 사는 방법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잠언을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이 잠언을 따르셨다면 우리들은 아무도 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바로 근본도 없는 외인, 즉 죄인으로 이 땅에 태어나 사망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던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한 보증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잠언의 근본적인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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