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43 일
(시편 120-150편)
<내용 요약>
시편은 크게 다섯 권으로 나누입니다.
제 1 권 창세기 시편 집 (1-41편) – 복 있는 사람에서, 타락한 사람으로, 그리고 회복으로… (사람을 주제로 한 시편들)
제 2 권 출애굽기 시편 집 (42-72편) - 파멸과 구속 (이스라엘을 주제로 한 시편들)
제 3 권 레위기 시편 집 (73-89편) – 어두움 (성전을 주제로 한 시편들) 성막, 성전, 주의 집, 회중 등의 단어들이 거의 모든 시편에 등장함
제 4 권 민수기 시편 집 (90-106편) – 재앙과 보호하심 (땅을 주제로 한 시편들)
제 5 권 신명기 시편 집 (107-150편) – 완전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한 찬양들
오늘 우리들의 성경 통독은 시편 120-150편으로 이어집니다.
120-134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시리즈(하나님과의 교제를 향하여 가는 순례자들의 찬양들-광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언덕, 성전, 시온산,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의 견고함등이 찬양되고 있음), 135편: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 136편: 여호와께 감사하라, 137편: 바벨론에서의 포로들의 찬양, 138편: 전심으로 드리는 노래, 139편: 하나님은 누구신가? 140편: 악인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기도, 141편: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기도, 142편: 다윗의 고난의 시작, 143편: 다급히 도우심을 구하는 다윗의 기도, 144편: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찬양과 기도, 145편: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찬양, 146-150편: 할렐루야 시편들
<주요 통독 자료>
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시리즈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예배를 향해 가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그분과의 달콤한 교제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들어가기 위해 여행을 하는 순례자들의 노래입니다. 성전에 나아가면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서 그 백성들을 만나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험준한 돌짝 밭으로 유명한 유다 광야를 지나가야 합니다. 많이 거칠고 힘들겠지요.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던 그 유다 광야는 이 세상에서 돌이 많기로 가장 유명한 곳이랍니다. 유대인들의 조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 둘을 불러서 온 세상에 골고루 나누어 줘야 할 돌들을 두 천사에게 나누어 주면서 모든 나라들을 두루 다니며 골고루 나누어 주고 오라고 하셨답니다. 한 천사는 성실하게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나누어 주고 왔는데, 한 천사는 게으르고 악해서 유다 남부 광야에 다 쏟아 부어 버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계에 있는 돌들을 다 합친 것만큼의 돌들이 유다 남부 광야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나그네가 밤잠을 자려고 돌이 배기지 않는 땅을 몸 하나 누일 만큼도 찾을 수 없는 곳이 유다 광야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배자들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늘 그리 평탄하고 행복한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 저기에서 복병을 만날 수 밖에 없는 길이 될 것입니다. 안락함과 평화로움을 포기해야 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방해와 기대하지 않았던 돌발 변수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때아닌 친구들의 습격이나 혹은 많은 유익이 걸린 일들이 가로막고 서서 예배냐, 유익이냐 결정을 해야 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시리즈는 반복적으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시온산을 바라보고, 자신의 지난 날 함께 하셨던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바라보도록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전에 가는 것이 힘들어도 성전에 가기만 하면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다는 것, 성도의 교제의 만족이 있고, 섬기는 주의 종들을 인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것이 바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의 내용입니다.
2. By the Rivers of Babylon (137편)
저와 같은 세대를 산 분들은 보니엠의 “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를 누구나 기억할 것입니다. 그 노래의 가사가 바로 시편 137편의 내용입니다.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 당한 유다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 중, 2차 포로들은 바로 티그리스 강과 그발강의 만나는 지역에서 소위 왕의 운하(the Royal Canal)라는 엄청난 토목공사 현장에서 강제 노동을 착취 당하기 위하여 끌려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계 역사 가운데 엄청난 토목공사의 업적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인물입니다. 바벨론 본성인 공중궁전(the Hanging Garden)은 지면으로부터 약 2Km 가까운 높이의 공중에 지어진 궁전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엄청난 공사를 누가 다 했겠습니까? 바로 유대인들이 전쟁포로로 끌려가서 그 엄청난 공사들을 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강제노동을 착취당한 포로들이 부른 137편은 바벨론의 군사들이 그들에게 노동을 시키면서 간혹 휴식 시간에 그들을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던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노래 잘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찬양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시온의 노래들을 자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장난 삼아 부르도록 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포로 생활이 끝나고 다시 시온에 돌아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까지 다시는 이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 바로 이 시편의 내용인 것입니다.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두고 다시는 시온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결심한 유대인 포로들…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은 그들에게서 노래를 빼앗아 간 것입니다. 우리 성경 통독에 참여하는 모든 지체들이 이 세상에서 절대로 찬양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되지 않는 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3. 조직신학의 신론의 기초를 제공한 다윗의 시편, 139편
139편은 조직 신학의 신론의 뼈대를 제공해 주는 시편입니다. 다윗은 이 24절로 되어진 시편에서 정확히 6절씩으로 나뉘어 질 수 있는 네 개의 단원으로 “하나님은 누구신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여섯 절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전지하심(God’s Omniscience)”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 대하여 모르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나의 생각, 입술의 언어, 골방에서의 모든 비밀스런 행동, 내가 걷는 길…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에도 계시고, 우리의 앞에도 계시고, 우리의 뒤에도 계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니 우리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게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 보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KJV에서 1절을 보면 “Thou hast searched me and known me(주께서 나를 깊이 연구하시고 나를 아셨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지구상에 저와 여러분 한 사람만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면밀하게 살피시고, 연구하셔서 아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행복한 우리들입니까?
두 번째 여섯 절을 통해서 다윗은 우리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God’s Omnipresence)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늘에도 계시고, 음부에도 계시고, 우리가 새벽 날개를 치며 저 바다 끝에 도망친다 하여도 거기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땅 끝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결국 죽게 고생하고 물고기가 그를 토해 놓은 곳은 처음부터 그가 갔어야 했던 사명지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눈을 피해 어디론가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가장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세 번째 여섯 절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전능하심(God’s Omni-potence)에 대해 찬양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를 심히 기묘하게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체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묘하게 지으셨습니까? 이런 섬세한 디자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육체를 우연의 연결고리와 돌연변이의 연속인 진화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자는 참으로 다윗의 말처럼 바보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전지하심, 무소부재하심, 그리고 전능하심을 전부 “나”를 특별 관리 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으로 묘사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다윗 자신을 향한 너무나 아름다운 생각들은 바닷가의 모래알 보다 더 많이 갖고 계시다고 그는 노래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래서 마지막
여섯 절을 통해서 다윗은 우리 하나님과 자신의 사랑의 사귐에 대해 논합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큰 사랑을 받은 존재로서 당연히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자기 주변에서 쫓아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들의 무리와 함께 행하기 원하는 다윗의 소원들을 피력합니다.
하나님과 이런 사랑에 빠져서 사는 삶이야 말로 “사랑과 순종”이 주제가 되는 신명기적 삶이 아니겠습니까?
4. 할렐루야 찬양들(146-150편)
할렐루야로 시작하거나 끝맺는 찬양을 일반적으로 “할렐루야 시편”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시편 146-150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또한 “할렐루야”로 끝맺는 찬양들의 묶음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감격적으로 터져 나오는 성도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편 150편은 찬양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는 시편입니다.
먼저 “찬양은 어디에서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풀어줍니다.
우리는 성소에서 주를 찬양해야 하며, 또한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해야 합니다. 그의 권능의 궁창이란 우리가 숨쉬는 모든 대기권을 말합니다. 이 말은 곧 우리는 어떤 한 장소에서도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들판에서, 도시에서, 초막에서, 궁궐에서, 왕위에 있을 때나, 가난한 목동으로 양떼들의 똥이나 치는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찬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편입니다.
그 다음 이 시편은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찬양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찬양의 이유는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우리는 찬양해야 합니다.
그 다음 이 시편은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과 퉁소(플룻)로, 제금(심벌즈)들로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종류의 악기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악기도 연주할 수 없다 하여도 찬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으니까요. 숨쉬고 계십니까? 찬양하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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