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통독

35일 통독 욥15-31장

천국생활 2016. 7. 6. 15:25

 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35 일

 

 


(욥기 15-31장)

<내용 요약>
욥기는 크게 세 단원으로 나누입니다.
1. 하늘의 광경과 땅의 일들(1-2장)
2. 대화(3-41장)
3. 욥의 갑절의 축복(42장)
오늘 우리들의 통독은 욥기 15-31장을 통해 계속됩니다.

15장: 엘리바스의 2차 변론
16-17장: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18장: 빌닷의 2차 변론
19장: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20장: 소발의 2차 변론
21장: 욥의 답변
22장: 엘리바스의 3차 변론
23-24장: 욥의 답변
25장: 빌닷의 3차 변론
26-31장: 욥의 답변

<주요 통독 자료>
1. 욥과 친구들의 변론의 요지
우리는 욥기에서 고대인들의 싸움이 참으로 철학적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 이 일이 현대 사회에서 일어났다면 벌써 한 차례 논쟁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다짐이 오가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끝나버렸지 않았을까요? 고대인들의 싸움은 상당히 철학적인 긴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아무튼 욥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의 논지는 3단 논법에 의하여 정리될 수 있습니다. 대명제: 하나님은 죄 지은 자를 심판하시고, 고통스럽게 하신다. 소명제: 욥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 결론: 고로 욥은 죄인이다. 어제 통독자료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엘리바스는 계속 욥을 위선자라고 비난했고, 빌닷은 욥에게 숨겨진 죄가 있다고 추궁하고 있고, 소발은 욥이 거짓말쟁이라 비난합니다. 엘리바스는 일종의 경험주의자(Empiricist)였으며, 빌닷은 일종의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였으며, 소발은 일종의 율법주의자(Legalist)입니다. 인간의 문제에 종교가 접근하는 세 가지 방식을 이 친구들이 대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경험주의, 전통주의, 율법주의… 하지만 이런 종교적 접근이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 체계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친구들이 욥을 다그치자, 욥의 마음은 점차 억울함으로 들어차게 됩니다. 그래서 욥은 더욱 힘을 주어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친구들의 변론처럼 자신이 죄를 지어서 이런 고통을 받는다면, 이 세상에는 자기보다 더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많은데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억울함에 들어찬 욥이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2-33]” 이것이 모든 인생들의 외침입니다. 여기 판결자라는 단어가 뉴킹제임스 성경에 보면 <Mediator; 중보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중재자가 되어줄 중보자의 필요성… 이것이 바로 모든 인생들의 외침인 것입니다.

2. 인간에게 진정한 탈출구가 있는가?
어제 우리의 통독 범위의 끝에 있었던 14:14에서 욥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우리 한글 성경의 번역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구절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이 구절을 킹제임스 성경에서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If a man die, shall he live again? All the days of my appointed time will I wait, till my change come.” 이 구절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나리이까? 나의 변화가 올 때까지 나의 정해진 때의 모든 날들을 나는 기다리나이다.” 뜻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욥은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왜 모든 것을 잃어야만 했는가? 왜 모든 재산을 잃어 버려야 했는가? 왜 모든 가족을 잃어 버려야 했는가? 왜 건강을 잃어 버려야 했는가?” 그래서 욥은 “정녕 이것이 삶의 전부란 말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겨우 이것을 위해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났단 말인가?” “무덤은 결국 모든 것에 끝을 가져오는 것인가? 아니면 그 무덤 저편에도 삶이 있는 것인가? 혹시 다른 형태의, 다른 차원의 삶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욥은 아직 이 시점에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욥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할 뿐”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욥은 그런 고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말 올바르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쳤는데, 의롭게 살려고 애썼는데, 자신에게는 오직 고난뿐이고, 21:1-16까지의 말씀을 보면, 악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날의 유예된 호황을 누리다가 느닷없이 음부에 떨어지지만, 자신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욥에게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는 엘리바스의 이 철딱서니 없는 변론은 욥을 더욱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누구보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욥은 갈수록 억울하고, 미칠 듯이 답답한 것입니다. 처음엔 욥을 위로하겠다고 욥에게 다가왔는데, 가면 갈수록 친구들은 욥을 더 괴롭게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만 옵니다. 욥이 친구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Miserable comforters)이로구나(욥 16:2).” 이 구절의 영어 번역인 Miserable comforters라는 말이 무섭습니다. “너희는 날 위로해 준다고 와놓고는 날 끔찍하게 만드는 위로자들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입을 열 때마다 욥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는 것입니다.


3. 극에 달한 욥의 교만
욥의 친구들과의 변론은 욥을 점점 더 자극했고, 마침내 욥은 끝간 데 없는 교만을 보입니다. 욥기 29장을 읽고 또 읽어보십시오. 여기에서 점점 더 커지는 단어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나의, 나를, 내가, 나는, …”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의롭게 살았는지를 강조합니다. 마침내 29장은 I, My, Me, Mine Chapter라고 불리어지는 자기 퍼레이드로 귀결됩니다. 그는 젊은 날부터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는 부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었고, 그가 만지는 것마다 황급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갈대아에서 참으로 모범시민이었고, 젊은이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구제의 사람이었으며, 과부를 구제하기 위한 기금을 운영하고 있었고, 맹아학교의 이사였고, 장애자 복지 시설의 원장이기도 했습니다. 노숙자들을 위한 보호시설의 원장이기도 했고, 동시에 경찰청의 최고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29장의 내용을 읽어보십시오. 욥은 마치 신데렐라처럼 살았습니다. 밤 12시 정각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의 마차는 호박으로 변했고, 그의 아름다운 옷자락들은 모두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세어 본 바로는 29장에서 욥은 “나”, “나의” 혹은 “나를”이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모두 39회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문장마다 주어를 덜 생략한 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29장을 보시면 I, My, Me, Mine이라는 단어가 모두 52회 언급됩니다. 그의 바닥에 감추어져 있었던 교만이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입니다. 사실상 욥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훌륭한 의인입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숨은 우월감과 교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욥 자신이 자아를 제대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논쟁에서 승리한 욥, 그러나…
결국 친구들은 엘리바스와 빌닷이 세 차례, 소발이 두 차례 번갈아 가며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욥을 항복시키려 했지만 고통만 안겨주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욥이 26장에서 31장까지 장장 여섯 장에 걸친 마지막 여덟 번째 변론으로 세 친구들에게 답변을 하자, 소발은 이제 변론을 포기하고 욥이 대승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일 우리가 읽게 되는 욥기의 마지막 통독 분량에서 욥은 복병을 만납니다. 이제껏 침묵하며 지켜만 보고 있었던 또 다른 인물, 엘리후가 욥에게 변론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변론을 통해서 욥은 단 한 마디도 대꾸를 할 수 없도록 무너져 버립니다. 그리곤 결국 이제까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왔던 것은 모두 귀로 듣기만 했던 것에 불과했다는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비로소 하나님을 눈으로 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변론에서 우리는 욥기의 주제가 확실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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