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초월에 대한 감수성이 사라진 세상

천국생활 2013. 8. 16. 12:36

불경함을 무릅쓰고
민14:11-19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언제까지 이 백성이 나를 멸시할 것이라더냐? 내가 이 백성 가운데서 보인 온갖 표적들이 있는데,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겠다더냐? 내가 전염병으로 이들을 쳐서 없애고, 너를 이들보다 더 크고 힘센 나라가 되게 하겠다." 모세가 주님께 말씀드렸다. "이집트 사람이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주님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이집트 사람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집트 사람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주 하나님이 이 백성 가운데 계시다는 것과, 주 하나님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이셨다는 것과, 주님의 구름이 그들 위에 머물고, 주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 계시고,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 계셔서, 그들 맨 앞에서 걸어가신다는 것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을 처리하듯 단번에 죽이시면,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들은 나라들은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갈 능력이 없어서, 그들을 광야에서 죽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나 주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이 넘치어서 죄와 허물을 용서한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범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나는,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 삼사 대까지 벌을 내린다’ 하고 말씀하셨으니, 이집트를 떠날 때까지 이제부터 주님께서 이 백성을 용서하신 것처럼, 이제 주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암담한 우리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해방절을 앞둔 주일입니다.

해방 68년은 곧 분단 68년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긴 세월을 우리는 나뉘어 살아왔습니다.

 하나 됨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노력은 번번이 물거품이 되곤 했습니다.

15년 전 일본의 오사카에서 열린 남북기독자협의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예배당 회랑에 줄지어 놓인 대야 물에 손을 닦았습니다.

지난날의 은원을 닦아내자는 뜻이었습니다. 손을 닦고 함께 열을 지어 회의장 안으로 들어갈 때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나지막하게 노래를 읊조렸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 노래는 묘하게도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이라는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 때문에 늘 어색해하던 나도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원수 선생님이 가사를 쓰고, 홍난파 선생님이 1926년에 곡을 붙이신 이 노래는 가히 국민가요라 할 만합니다.

며칠간의 회의를 마감하며 참가자들이 함께 부른 곡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습니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통일은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민족적 과제처럼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즘 이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통일에 대한 회의도 깊고, 꼭 필요하냐고 말하는 이들도 늘었습니다.

분단 상황이 길어지면서 남북이 드잡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개성공단은 가까스로 닫힐 위기를 넘겼지만, 핵무장을 둘러싼 남북의 힘겨루기는 여전합니다.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찬 비전을 주지 못합니다.

소비심리는 매우 위축되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점점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는 땅의 사람들, 주류 사회에 의해 마치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유동하는 공포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고, 사람들의 심정은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종교조차 불의를 꾸짖지 않습니다.

언론과 교육과 문화계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삶이 깊어질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정치는 정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광장으로 내모는 나라가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절이 이러하기에 큰 정신이 그립습니다.


• 경계선에 선 사람
물론 어느 한 영웅이 나타나 산적한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압니다.

헤라클레스가 극복한 12가지 시련 가운데 하나는 아우게이아스의 마구간을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게이아스 왕은 소를 3천 마리나 가지고 있었는데 30년 동안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헤라클레스는 알페이오스 강과 페네이오스 강물을 끌어들여 하루 만에 청소를 끝냅니다.

역사에 이런 속 시원한 해결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누적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 눈 밝은 지도자가 꼭 필요합니다.

모세는 참 좋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경계선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히브리인으로 태어났지만 애굽의 왕자로 살았고, 바로와 하나님 사이에 서야 했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살아야 했습니다. 경계선 위에서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입니다. 어느 쪽도 만족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경계선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고독합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차라리 어느 한 편에 속해서 살아간다면 삶이 쉽습니다. 인습적인 삶은 모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늘 하던 방식대로 살면 됩니다. 권태롭기는 하겠지만 위태롭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삶은 언제나 인습적인 삶을 떠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순종의 결과는 떠도는 삶이었고, 그 삶은 언제나 위태로웠습니다. 그는 어느 곳에 가든지 주변인으로 살았습니다.

아내를 빼앗길 뻔하기도 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과 세리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했는데,

그것은 인습적인 삶과의 작별을 의미했습니다. 배와 그물, 혹은 세관은 그들이 떠나온 옛 삶을 상징합니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있던 광야 역시 경계선이었습니다.

그곳은 언제든 사막의 주인인 베두인족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고,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리는 곳이었고,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광야 공동체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는 사실이

제게는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라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종종 인용하는 말씀입니다만

어거스틴이 새 삶을 향해 떠나려 할 때 과거에 속한 것들이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는 조용히 속삭입니다.

"우리를 두고 떠나려는가?" 과거는 달콤했던 시간을 반추하도록 합니다.

그것을 뿌리치고 갈 힘이 없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정결하게 하소서. 그러나 지금은 그리 마소서." 언젠가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지금은 그 들큼한 향락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탈출 공동체는 어렵게 가나안의 목전에 이르렀지만 쉽게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그 땅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모두가 좋은 소식, 희망찬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한 소식은 마른하늘의 날벼락과 같았습니다.



• 절망이 번져갈 때
그들의 보고는 간결했습니다. 가나안 진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의 유보도 없는 단정적인 어투였습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한 요새처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규모 또한 엄청나서 자기들처럼 훈련되지 않은 이들이 감히 넘볼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상대방을 커보이게 만듭니다. 정탐꾼들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거인처럼 장대하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에 비하면 자기들은 메뚜기 같더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공포에 질린 영혼의 풍경을 이렇게 잘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셨던

가나안을 가리켜 정탐꾼들은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 부릅니다. 물론 이 말이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나안 농경문화 속에서 지주나 자기 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했다는 의미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탐꾼들이 그런 거대한 안목을 가지고 한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출애굽 공동체를 공황상태 속에 빠뜨렸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홍해 앞에서 느꼈던 공포보다 더 심한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정탐꾼들의 보고가 잘못되었다면서

용기를 내자고,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다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자고 외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사람들의 아우성과 통곡 소리가 광야에 울려퍼졌습니다. 원망하는 말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하는가 하면, 차라리 광야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에 대한 원망도 노골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왜 우리를 이끌어내 칼에 맞아 죽게 하나?

왜 우리 아내들과 자식들을 사로잡히게 만드는가?

급기야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들의 지도하에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이들도 나왔습니다.

부글부글 끓던 그들의 마음은 탈출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불꽃만 일어나면 모세고 아론이고 할 것 없이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사방이 가로막힐 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엎드림 밖에는 없습니다.

절망의 심연 앞에서, 출애굽 공동체가 막 해체되려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기들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그들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렸습니다. 자기들의 무지와 무능력을 자인하는 자세였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창세기는 혼돈과 어둠과 공허가 가득하던 세상을 두루 뒤덮던 하나님의 영을 묘사한 후 ‘빛이 있으라’ 하는

주님의 명령에 빛이 생겼다고 전합니다. 가장 깊은 어둠, 가장 깊은 절망 앞에 서 본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은산철벽인지 백척간두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가능성이 끝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되는 법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실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없는 백성 때문에 역정이 나셨습니다. 불신앙이란 신뢰의 철회 혹은 폐기입니다.

그것은 또한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망각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불신앙을 당신에 대한 멸시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전염병으로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모세에 대한 애정은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없애버리겠지만 모세를 통해 큰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을 치려고 높이 치켜든 하나님의 팔을 꼭 붙듭니다. 불경하다고 야단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철없는 백성을 차마 버릴 수 없었습니다.

• 하나님의 팔을 잡다
인권변호사이신 한승헌 선생님은 기독교신앙을 일컬어 ‘차마이즘’이라 했습니다.

자기가 인권변호사의 길로 접어든 것은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붙잡힌 젊은이들을 변호인조차 없이

차마 홀로 법정에 세울 수 없어서, 겁 많고 소심한 자기가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쓴 단어가 ‘차마이즘’입니다.

믿음은 순종을 포함하지만 순종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이웃에 대한 책임을 통해 성숙해집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가고 계신 하나님 앞을 가로막고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합당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가련한 사람들을 위해 불경함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자기를 끊을 수 없다던 바울 사도가 9장에 와서는

동족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조차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그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9:19)

스스로 종이 되는 자유처럼 큰 자유가 또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는 모세도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설득하려 애씁니다.

자기가 이해한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를 과감히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지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예 문제도 거론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상징되는 불의한 질서를 전복시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새 세상의 꿈을 펼치기 위해 시작하신 그 원대한 역사가

그대로 좌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인간적인 위계사회를 철폐하기 위해 시작하신 출애굽의 꿈이

광야에서 잦아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지시만 받고 살았던 사람들과 언약을 맺기 전에

그들의 동의를 구하시던 그 하나님이 두고두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이 넘쳐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와 허물을 모른 척 넘어가시는 분은 아닙니다. 불신앙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모세는 그것조차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모세의 이 기도를 읽고 또 읽으면서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우리에게는 국민들을 이렇게 사랑하는 지도자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머리좋은 사람들이 모인 정치판이 가장 시끄러운 까닭이 무엇일까요?

 대의명분과 달리 그들은 공익보다는 자기들이 속한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치인들만을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종교계든 경제계든 교육계든 문화계든 상황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초월에 대한 감수성이 사라진 세상,

모든 생명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이제 사탄에게 넘어갔던 지배권을 회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는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먼저 우리들 사이에 드리운 분리의 담들을 허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벽도 밀다보면 문이 된다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실천의 선봉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가르고 나누는 일보다 하나 되게 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이 나라를 분단의 질곡에서 건져낼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미움과 분열과 갈등을 확대재생산함으로 이익을 보는 이들의 의도를 폭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온몸을 던져 하늘과 땅, 유대인과 이방인, 계층과 계층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래서 서로 만나게 하심으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옛 질서와 새 질서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힘겹지만 평화의 세상을 열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삶이 힘겹더라도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쓸 때 삶의 무게는 가벼워집니다.

이 신앙의 비밀을 깨달아 오늘도 내일도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