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바울
갈2:11-16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거인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로 1년의 절반이 지나갑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마음으로는 세월이 지날수록 향기로워지는 포도주처럼 무르익는 인생을 살고 싶으나 삶은 늘 진부하기만 합니다. 가끔 길에서 세월의 기품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얼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인사라도 건네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미래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저절로 흘러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시간의 향기가 사라진 시대이기에 더욱 시간을 알차게 아름답게 사는 이들이 그리워집니다.
삶은 죽음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죽음을 꺼림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일수록 삶에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전통에 등장하는 성인들의 축일은 그들이 태어난 날이 아니라 죽은 날입니다. 죽음은 세상에서의 생을 마치는 날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상으로의 옮겨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6월 29일은 베드로와 바울의 축일입니다. 그들이 정확히 그 날 순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회전통은 오랫동안 이 날을 두 성인의 축일로 지켜왔습니다. 초대 교회를 대표하는 그 두 인물의 축일이 같다는 사실이 묘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베드로와 바울의 역할을 구분해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책임을, 바울에게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모로 대조적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지낸 측근 제자인데 비해 바울은 생전의 예수님과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출신이고, 바울은 국제도시인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철저한 랍비 교육을 받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노동자라면 바울은 지식인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중심에 속해 있었습니다.
두 성인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저는 격동의 시기인 16세기 말에 활동했던 그리스 출신의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엘 그레코는 이 두 성인을 한 화면 속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베드로의 왼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습니다. 가볍게 말아 쥔 채 명치께까지 들어 올린 오른손은 마치 뭔가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얼굴은 관조적이고, 눈길은 깊은 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에 비해 바울은 매우 지적이고 뜨거운 열정의 사람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왼손으로는 성경을 짚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진리를 납득시키기 위한 열정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오른손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나타내려는 듯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을 펴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예리하게 빛나고, 훤한 이마는 매우 지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감상자를 긴장시키지 않습니다. 둘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과 사랑, 활동과 관조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엘 그레코는 진리에 접근하는 두 가지 태도를 이 두 성인을 통해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 순교의 자리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순교로서 생을 마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이 편안한 죽음이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참 고통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들은 대체 어떤 열정에 사로잡혔기에 죽음이 예기되는 삶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것일까요?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산 소망을 갖게 된 성도들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벧전1:4)을 물려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벧전4:14, 16). 바울 사도 역시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는 현실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 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롬8:37)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넘어서는 더 큰 생명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순교를 그린 그림을 보면 한결같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차마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을 수 없다며 자기를 그렇게 처형해달라고 요구했다 합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로마 외곽에 있는 바울 기념교회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양 옆으로 가지런히 정비된 좁은 가로수 길을 지나 예배당 구역에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성인像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트상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는 말을 그치라는 뜻으로 한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습니다. 그런 포즈를 라틴어로 시그눔 하르포크라티쿰Signum Harpocraticum이라고 하는 데, 필요한 것 이외에는 말하지 말라는 표시입니다. 수도원 구역은 말을 그친 자리여야 합니다. 그 구역에 들어서면 바로 바울 사도가 참수당한 자리에 세웠다는 예배당이 보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목이 세 번 튀어 올랐고 목이 닿았던 곳마다 샘이 솟았다고 합니다. 그곳을 가리켜 트레 폰타네(Tre Fontane)라고 하는 데 ‘세 개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곳이 로마 시대부터 아쿠에 살비에 가도(viale delle Acque Salvie)라고 불리웠다는 사실입니다. 아쿠에 살비에는 ‘구원의 물’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이 있던 곳이기에 붙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름이 예사롭지 않게 들립니다. 바울의 순교의 피가 흘러 생긴 ‘세 개의 샘’, 바로 그곳이야말로 ‘구원의 물’이 발원한 곳이라는 뜻으로 새기면 견강부회일까요? 설사 그렇더라도 저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구원의 물을 마신 사람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자기 양심을 팔지 않고, 작은 이익을 위해 자기 영혼을 팔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롬14:8)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15:31)
바울 사도의 이러한 고백이 당당하고 든든한 그의 삶의 비밀입니다. 이 마음이 없어 우리 삶이 부실합니다. 이 마음이 없어 한국교회가 병들었습니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작은 고통에도 비명을 지릅니다. 커지고 부유해지려 하기에 오히려 죽었습니다. 익생왈상益生曰祥, 살고자 애쓰는 것 자체가 재앙입니다.
• 위기
많이 우회하긴 했습니다만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신앙의 거인은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위대한 혼은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 혹은 어떤 경우에라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도 지향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지만, 누군가 이정표가 되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높은 산봉우리들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법입니다. 베드로와 바울, 이 두 사람도 기독교 역사에서 거대한 산봉우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대면했던 한 순간을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가 안디옥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베드로가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안디옥 공동체는 이미 든든히 서 있었고,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아주 활발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그런 현장을 살펴보고 또 격려도 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화기애애한 애찬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흉허물 없이 어울렸습니다. 이미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르던 담장을 마음속에서 철거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형제자매들도 기뻤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가 그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주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애찬의 흥겨운 분위기는 예루살렘교회가 파견한 일단의 사람들이 도착하면서 깨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맞이하는 이도, 당도한 이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친교의 식탁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난감했던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자리를 뜨자 다른 유대인들도 자리를 떴고,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자리를 떴습니다. 이방 출신의 교인들은 괜히 죄인이 된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을 것입니다. 불같은 성격의 바울은 그런 태도와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위선을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위선을 덮어두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 모든 사람들이 직면하도록 만듭니다.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때 성립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압니다. 사사건건 대립하고, 들춰내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들로 인해 공동체는 붕괴됩니다. 소아시아에 있던 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들과 악한 자들을 가려내려고 눈을 부릅떴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들었습니다(계2:1-4). 옳음 때문에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 쉽습니다.
• 갈등을 회피하지 말라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처럼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거나 훼손될 우려가 있는 곳에서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드러내야 합니다. 환부를 감추어야 할 때도 있지만 도려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점에서 주저함이 없습니다. 바울은 두루뭉수리로 사람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권위인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종교 권력에게 잘 보이려고 생각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14b)
바울의 이런 책망을 베드로가 고깝게 여겼다면, 그래서 베드로가 바울에게 맞섰다면, 앙심을 품었더라면, 베드로는 반석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아팠겠지요. 또 부끄럽기도 했겠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화가 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매를 맞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질정叱正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이 일을 통해 베드로는 율법의 껍질로부터 벗어나와 은혜의 세계로 확고히 걸어 들어갔을 겁니다. 그때까지 바울 사도는 베드로의 이해와 호의에 빚진 자였지만, 이번에는 베드로가 바울에게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바울 사도의 그 말은 베드로가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내면에서 울려 퍼지지 않았을까요?
교우 여러분,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이들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는 가끔 책에 서명을 해달라는 이들에게 ‘길벗 ooo’라고 쓰기도 합니다. 길벗 혹은 도반道伴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그 길’, ‘예수의 길’을 걷는 길벗이 되었습니다. 엘 그레코의 그림에 나타나듯이 둘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는 오솔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길이 되어 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금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 우리 영혼이 더욱 맑고 깊고 따뜻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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