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희망, 참된 희망
시62:1-12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람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기울어 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너희가 죽이려고 다 함께 공격하니, 너희가 언제까지 그리하겠느냐?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저주를 퍼붓는구나.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내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내 견고한 바위이시요, 나의 피난처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니, 백성아, 언제든지 그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헛된 희망을 믿지 말며,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셨을 때에,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요,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 진부한 삶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금 계절은 빠르게 망종에서 하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맘 때 옛 사람들은 보리타작을 하면서 하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올렸습니다. 요즘 어떠십니까?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마음 속 풍경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 다니엘은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곁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 소리를 듣습니다. 걱정거리나 관심사는 제가끔 다르지만 범속하고 사소한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저녁 찬거리 걱정, 애들 교육 걱정, 직장 걱정…애인의 속마음을 몰라 애태우는 이도 있습니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심오한 사색에 빠진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삶은 어쩌면 그렇게 진부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살아야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적당히 이기적이어서 자기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저마다 중심이 되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용인하려 하지 않으니 긴장이 발생합니다. 세상이 평화롭지 못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너의 자리에 서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 없어 세상은 늘 위태롭습니다. 샬롬이 없는 세상, 안식이 없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다 지쳤습니다. 마음의 고요함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편 62편을 읽습니다. 이 시에는 히브리어로 'ak라는 부사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오직’ 혹은 ‘진실로’라고 옮겼고, 새번역 성경은 어떤 사물을 단독적으로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만’이라는 조사로 옮겨놓았습니다. ‘하나님만을’ 혹은 ‘하나님만이’가 그 예입니다. 시인은 그 단어를 통해 매우 단호한 어조로 우리 삶의 안식 혹은 평화는 하나님과 잇대어 살아가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서술하기 위해 ‘반석, 구원, 요새, 견고한 바위, 피난처’ 등의 다양한 은유를 동원합니다. 그는 하나님만 기다리기에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호한 선언은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은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아니면 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이라는 수렁에 빠져 들어가 오도 가도 못할 지경에 처하기도 했을 것이고, 의지가지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을 겁니다. 더 이상 바라볼 곳이 없을 때 비로소 하늘이 열립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닫힌 곳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시작됩니다. 초월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 영혼의 무게
시인을 절망으로 몰아간 것은 어떤 상황이라기보다는 가까운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들은 3절과 4절에서 ‘너희’라고 지칭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습은 3가지로 요약됩니다.
1) 기울어 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함께 공격
2)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떨어뜨릴 궁리만 함
3)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저주를 퍼부음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시인이 마치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게 죄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까 사람은 저마다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게는 이웃을 위한 여백이 없습니다. 그는 늘 경쟁적이고, 개인적이고, 난폭합니다. 그는 위계적 사고에 익숙합니다. 힘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힘 있는 사람 앞에서는 고분고분합니다. 하지만 그는 진실한 관계를 맺는 일에 무지합니다. 기울어 가는 담과 같은 사람을 밀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각박해집니다.
시인을 절망의 가장자리로 몰아붙이는 것은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마음으로는 저주하는 이들입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사람들을 꾀는 이들이 많습니다.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사들의 말은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축복의 중개인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복의 메시지를 던지는 설교자의 말은 또 얼마나 달콤합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호리는 이단종파들의 말도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 속에는 비수가 감춰져 있습니다. 그 비수는 자기 이익입니다. 교언영색, 감언이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는 이들과 사귀기보다는 차라리 욕쟁이 할머니에게 가서 시원하게 욕을 먹는 게 낫습니다. 예언자들의 말은 참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야 우리 영혼이 삽니다. 아브라함 헤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자의 말은 가혹하고 쓰며 가시가 돋아 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함 뒤에는 사랑과 인류에 대한 동정심이 숨어 있다…실로 장래에 닥칠 재앙에 대한 예언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뉘우침을 권하는 말이다…그는 ‘파멸의 메시지’로 시작하여 ‘희망의 메시지’로 끝맺는다…그에게 맡겨진 근본적인 사명은 지금 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며, 현재에 숨어 있는 것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미래를 열어 보이는 것이다."(루스 마커스 굿힐 엮음, <헤셀의 슬기로운 말들>, 한국기독교연구소, p.111)
영혼의 파탄을 바라지 않는다면 유혹자의 단 소리보다 예언자의 쓴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헛된 희망
인생의 단 맛과 쓴 맛, 그리고 신 맛을 다 본 시인은 자기가 참으로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그는 신분이 낮은 사람도 높은 사람도 저울에 달아보면 입김보다 가볍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허무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 때 오히려 자유의 공간이 열립니다. 신분이 낮다고 주눅들 것도 없고, 높다고 으쓱거릴 것도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사40:6-7)고 말했습니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이 사실을 절감했기에 시인은 백성들을 향해 말합니다.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헛된 희망을 믿지 말며,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10)
어느 지방단체장은 공무원들의 회식자리에서 건배를 제의할 때 ‘조배죽’이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조직을 배신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의 약자입니다. 들려오는 풍문에 의하면 ‘조배죽’ 하면 ‘예, 형님’ 하고 화답해야 한다더군요. 무슨 조폭들의 모임도 아니고…. 기가 막힙니다. 그들에게 술자리는 위계질서를 재확인하는 자리인 셈입니다. 그들은 국민들의 행복보다는 자기 조직을 건사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힘이 곧 정의’라고 믿는 불의한 현실을 강화합니다. 의가 무너진 세상의 단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하나님과 대적하는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이의 몫을 빼앗아 제 배를 채우려는 일도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시인은 그런 헛된 희망을 믿지 말고,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쌓는 방법은 흩어 나누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조세도피처에 재산을 은닉했다가 들통이 나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숨긴 비자금을 찾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통탄할 일입니다. 노자는 인위적인 조작을 하는 자는 반드시 무너지고, 한사코 움켜잡는 자는 반드시 그것을 잃는다(爲者敗之 執者失之, 노자 29장)고 말했습니다. 전혀 그른 말이 아닙니다. 붙잡고 숨기고 닫아두기에 우리 삶이 무겁습니다. 며칠 전 손택수 시인의 시를 읽다가 속이 후련해짐을 느꼈습니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손택수, <放心> 전문)
앞뒷문을 다 열어두었더니, 제비가 집을 관통하여 날아갔고, 그 순간 집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그래서 무방비로 뻥 뚫려버린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 몸의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더라는 것 아닙니까? 기가 막힌 순간입니다. 이런 느낌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움켜쥐기보다는 놓아야 합니다. 닫기보다는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꿰뚫습니다.
• 깨달음 나눔
시편 시인은 자기가 삶의 과정을 통해 절실히 깨달은 것을 귀한 선물처럼 우리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그것입니다. 당장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결국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잘 산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오늘 우리의 삶을 재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헤세드라는 말의 번역입니다. 헤세드는 그 백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시인의 고백이 적실한 것은 그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심연에서 그는 하나님의 눈동자와 만났습니다. 시편 139편의 시인은 주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더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 계시고, 스올에 자리를 펴도 거기도 계시고, 동녘 저편이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머물러도 주님의 손이 인도하여 주시고, 힘있게 붙들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히브리의 한 시인은 "날마다 우리의 주님을 찬송하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시68:19)라고 노래합니다. 주님과의 접속을 잃지 않는다면 삶이 힘겨워도 너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걷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희망의 뿌리입니다. 헛된 희망에서 풀려날 때, 참된 희망이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참된 희망을 가슴에 품고 인내로서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은 존귀와 불멸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푸르름이 더해가는 이 계절에 우리의 믿음도 더욱 의연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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