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당부
막13:32-37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사정은 여행하는 어떤 사람의 경우와 같은데, 그가 집을 떠날 때에, 자기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녘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무렵일지, 이른 아침녘일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 종려주일
종려주일 아침,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던 우리들이 주님 앞에 모였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넘치면서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뭔가 둔중한 아픔 혹은 미열같은 불쾌감이 우리 영혼을 놓아주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을 아름답게 살아내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연일 폭로되는 공직 후보자들의 삶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소위 성공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삶이 비루하기 이를 데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절로 이런 탄식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너희 모두는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시14:2-3)
제 아무리 애써 보아도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유월절 무렵입니다.
유대인의 해방 기념절인 이때가 되면 각지에 흩어져 살던 이들이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 여행에 나섰습니다.
오랜 식민생활에 지친 이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압제자 로마를 몰아내주기를 고대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의 가슴마다 그런 꿈을 품고 있었으니, 유월절은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에서 주재하던 총독은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자기 휘하의 군대를 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군대의 상징인 깃발을 앞세우고, 기마대와 보병이 뒤를 따르는 그 행렬은 '까불지 말라'는 무언의 암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그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한 행렬이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흔들흔들 느릿느릿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행렬입니다.
늘 걸어다니시던 예수님이 왜 굳이 나귀를 타셨을까요?
그것은 상징적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솔로몬 왕이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때 다윗의 노새를 타고 기혼 샘으로 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귀를 타셨다는 말은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왕으로서의 입성으로 고백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군사력으로 적들을 무찌르는 왕이 아니라, 스스로 희생당하심으로 적들을 무력화시키는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저는 해마다 이즈음이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보곤 합니다.
그분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한다든지,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바라보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군중들의 외침과는 무관하게 고독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평온하게 수용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마음으로 여쭙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남기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저는 오늘의 본문이 주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으신 마지막 당부라고 생각합니다.
• 먼지처럼 쌓이는 죄의 습성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2)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마음의 보루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너진다니요? 가혹한 말이고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제자들은 반신반의하면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는지, 그리고 그때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명료합니다. 거짓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전쟁의 소문이 도처에서 들려오고,
그 때문에 기근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아지고, 참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이 박해를 받게 되는 때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나른한 행복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어떤 때는 맨발로 가시를 밟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자리로 데려가기도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와 운명을 같이 한 사이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운명은 뭔가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막13:13)
암흑이 지배하는 것 같은 혼돈의 시대는 새로운 존재이면서 우주적 왕이신 인자(Son of Man)의 도래와 더불어 끝날 거라는 것입니다.
그 날과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틀림없이 다시 오시겠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당혹감을 안겨줍니다.
그 ‘언제’가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고, 몇 십 년, 아니 몇 천 년 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그 때를 특정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고, 그 미지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여섯 절 밖에 안 되는 짧은 본문 속에 ‘깨어 있으라’는 단어가 4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잠에 빠지도록 하는 유혹이 세상에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적 유혹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를 제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리 없이 쌓이는 먼지처럼 조용히 우리를 사로잡아버립니다.
일상 속에서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시기, 분쟁, 적의, 오만함, 허영심이 켜켜이 쌓이면서
우리는 점점 신의 없는 사람, 무자비한 사람, 무정한 사람이 되어갑니다(롬1:29-31).
사람은 참 어쩔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17:9)라고 탄식했습니다.
젊은 날에는 너무 심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자꾸 살피고, 더러움을 말갛게 닦아주실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마음을 데려가지 않으면 금방 옛 삶의 인력에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저는 19세기의 프랑스 화가 가바르니가 세운 원칙을 참 좋아합니다.
"반드시 하루에 선線 하나라도!" 화가가 그러할진대,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철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삶의 원칙 세우기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산하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조현, <울림>, 시작, 127-8쪽 재인용)
이런 삶의 원칙을 지켜가기 위해 애쓸 때 삶은 아주 조금씩 죄의 인력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훈련되지 않은 삶은 무력한 법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앙의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고전9:27)라고 말합니다.
우리 믿음이 이렇게 무기력한 까닭은 다른 게 아닙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영혼은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새도 날기를 연습하고, 아기들도 배변 연습을 합니다.
육식동물들도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사냥을 배웁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기도와 금식, 말씀 묵상, 나눔, 섬김, 돌봄, 평화 추구, 생명 살리기를 위해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 물결에 부평초처럼 떠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카이로스
이 말을 저는 일상 속에서 거룩을 살라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떠난 거룩함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깊은 종교 체험을 했다는 이들이 오히려 더 오만하고 불손하고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들은 신비 체험 그 자체를 일종의 권력으로 바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깨어 있는 사람은 우리의 일상 속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비를 보기 시작합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던 야곱은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남의 발목이나 잡던 과거의 야곱이 그 밤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욕심을 다 내려놓으니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결국 보는 눈이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절실한 것은 깨어남입니다. 볼 눈이 열려야 합니다.
빈센트 반 고호는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닌 것들을 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어빙 스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호>, 최승자 옮김, 1993, 까치, 205쪽) 어쩌면 이게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들꽃 한 송이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공중의 새들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하는 이들은 궁핍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가끔은 마음이 화창한 봄날 같아서 누구에게나 너그러워지고,
세상을 두루 아름답게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이면 마음이 먹구름 낀 겨울처럼 변해서
모두를 냉랭하게 대하고, 세상을 잿빛으로 바라볼 때도 있습니다.
자꾸 이런저런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넘어짐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요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대로 사는 일에 자꾸 실패해도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검질김이 필요합니다.
빈센트 반 고호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어느 날 고호에게 단단히 화가 난 화가 마우베가
당신은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했으니 화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고호는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그게 화가임을 뜻하는 건가요, 그림을 판다는 게?
나는 화가란 언제나 무엇인가를 찾으면서도 끝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뜻한다고 생각했었죠.
나는 그건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찾아냈다’ 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나는 화가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단지 ‘나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고 노력하고 있으며 심혈을 기울여 몰두하고 있다’는
의미일 따름이죠."(어빙 스톤, 앞의 책, 211쪽)
저는 여기서 ‘화가’를 ‘성도’로 바꾸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이들은 덧거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쓰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그래도 영혼의 잠을 자지 않고 깨어서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나님이 맡기신 일로 여겨야 합니다.
직업 활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낙심하거나 강퍅해지지 말고
성도다운 삶을 계속하라면서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벧전4:7-10)
십자가를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기시기 전 주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소비문화가 사람들의 의식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이 시대, 만물의 피로함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이 시대에,
늘 깨어서 주님이 맡기신 일을 성심껏 받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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