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名實相符
눅19:1-10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러서 쳐다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 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려고 왔다."]
• 삭개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 순례길에서 여러분은 꼭 만나야 할 그분을 만나셨습니까?
순례란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늘과 땅과 내가 오롯이 일치함을 느낄 때 우리는 중심에 당도했다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순례는 어떤 장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기 위한 떠남의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헤매던 성배는 사실은 ‘주님의 마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마음과 깊이 만났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길에 예수님은 여리고라는 유서깊은 도시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종려나무가 우거진 숲을 이루는 그곳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사연도 많은 곳입니다.
성경은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한 가인은 에녹을 낳고, 그를 기념하여 도시를 만들었다고 전합니다(창4:17).
도시생활이 각박한 이유를 아시겠지요? 형제 살해라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이가 만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기에 다양한 삶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지만,
제한된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경쟁하다보니 인심은 각박해지고,
분쟁의 소지가 아주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삽니다.
경쟁이 삶의 원리가 되고 있는 곳에서 타고난 생의 조건이 좋지 않은 사람은 참 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삭개오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아주 제한적입니다.
그의 부모가 지어주었을 이름 삭개오는 그리스 말 ‘자카이zakai’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자카이는 ‘순진함’ 혹은 ‘정결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름 속에는 부모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삭개오의 부모는 아들이 깨끗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삭개오는 민족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 채 살았습니다. 로마에 부역하는 세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키가 작았다는 사실입니다.
평균보다 조금 작은 것이 아니라, 아주 작았습니다. 이제는 상상력을 발동해 볼 차례입니다.
그가 세리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다른 삶의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키가 작았기에 늘 무시당했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강한 권력 의지의 사람이 되게 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찌 됐든 세리장의 지위에까지 올라갔으니 나름대로 출세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많이 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채울 길 없는 외로움이 깃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돈과 권력을 가졌으니 주변에 사람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들과 속마음을 나누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돈을 매개로 한 관계, 혹은 권력을 매개로 한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 만남
그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듯이 새로운 존재인 예수에 대한 소문은 이미 널리 퍼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일 뿐 아니라, 누구도 정죄하거나 경멸하지 않는 분이라는 소문 때문이었을까요?
삭개오는 예수가 여리고로 들어온다는 풍문이 들려오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세관 밖으로 뛰어 나갔지만, 예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올 길을 예상하고 달려가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먼발치에서나마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상한 목마름 혹은 그리움이 그를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움이 지극하면 이루어진다지요? 예수는 삭개오가 오른 나무 앞에 멈춰 섰습니다.
예수의 눈길을 따라 군중들의 시선도 그를 향했습니다. 조금 창피했습니다.
그런데 꿈결같은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 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예수의 음성에는 어떠한 경계심도 멸시도 없었습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벗을 부르는 것 같은 다정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 말 한 마디를 듣는 순간 그의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치 체기처럼 꽉 막혀 있던 뭔가가 쑥 내려간 것 같았습니다.
마치 오랜 방황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늘 의식하곤 하던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인간의 구원체험을 ‘받아들여짐의 체험’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풍랑이 이는 난바다에서 시달리다가 영원한 포구에 닻을 내린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안식이고 샬롬입니다.
예수는 뭐라 설교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뿐입니다.
아니, 오히려 ‘네 신세를 지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삭개오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목마름을 품고 바다로 흐르는 냇물처럼 예수를 보고 싶은 마음에 나무에 오른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존 웨슬리는 구원의 질서를 설명하면서 교회 역사에는 없던 새로운 용어 하나를 사용했습니다.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 of God)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도록 미리 주신 구원의 선급금입니다.
그 은총이 아니고는 부르심에 응답할 수도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를 볼 수 있기를 바랐던 타는 듯한 그 목마름,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선행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나무에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악랄하게 살던 삭개오, 자기 이름값을 못하고 살던 삭개오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같이 맑아진 삭개오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에서 서둘러 내려와 예수를 집에 모셨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수는 기꺼이 삭개오의 손님이 되셨습니다.
• 존재의 변화
예수가 자리에 앉자 삭개오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습니다.
자기의 재산 가운데 절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지위를 이용해 사람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벌었던 돈,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앉아
사실상 그를 지배해왔던 우상이 보좌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설명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삭개오의 이야기는 존재론적 변화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회개는 그 결과라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그런 변화를 기뻐하며 경축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려고 왔다."
삭개오는 이제야 자기 이름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깨끗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깨끗’이라는 단어를 파자해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깨’는 ‘깨우침’라는 뜻이고, ‘끗’은 ‘끝’이라는 것이지요.
"진짜 깨끗한 건 진리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죄악 세상을 끝내야 한다."
삭개오는 그런 의미에서 깨끗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와 만나 진리의 세계로 들어섰고, 죄의 결과였던 재산 나눔을 통해 옛 삶을 끝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채 살아온 그에게 마침내 구원이 이르렀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은 법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대조되는 다른 한 인물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는 바로 전 장에 등장하는 부자 젊은이입니다.
그는 신실하고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이 살았고,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문
제는 그도 또한 영혼의 헛헛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도 어떤 목마름에 이끌려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영생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수는 그를 대견하게 여기시면서도 그를 붙들어 매고 있는 족쇄를 보셨습니다. 그 족쇄는 재산이었습니다.
뭔가를 움켜쥐고 있는 손으로는 다른 것을 붙잡을 수 없는 법입니다.
놓아야 잡을 수 있고, 버려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심하며 예수를 떠나갔습니다.
그가 떠나간 후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유함’을 경건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인습적 신앙을 해체하는 수술 칼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놀라 서로에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대답은 간명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 어디로 흘러가는가?
부자 젊은이는 자기를 신뢰했기에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었고,
삭개오는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기에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야말로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였던 것입니다.
절망의 고치를 짓고 그 속에 칩거하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 영적으로 비상하는 날개를 얻게 되었습니다.
羽化登仙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신앙이 습관이 된 것은 아닙니까?
우리 삶이란 예수의 마음을 얻어, 하나님이라는 중심과 오롯한 일치를 지향하는 순례인 것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 보아도 경건하고 신실해 보이는 신앙인이라 해도 ‘진정한 기독교인 altogether christian’이 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완전’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온전한 크리스찬’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도 중심이신 하나님과의 접속을 잃지 않으려고
늘 깨어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가끔은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이웃을 애린의 마음으로 대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듯 온전한 크리스찬들은 걸림돌을 디딤돌 삼아 하나님을 향한 도약을 간행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바다를 향해 흐르고 또 흐르는 저 강물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을 향해 잘 흘러가고 있습니까?
듣고 계십니까?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겠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주님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있습니까?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드리고 있습니까?
사순절은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남은 순례의 여정을 통해 주님의 마음과 더 깊이 접속되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당부 (0) | 2013.03.30 |
---|---|
어디로 흘러가는가? (0) | 2013.03.22 |
핵공포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0) | 2013.03.14 |
아비소스 (0) | 2013.03.13 |
민주적 통치 (0) | 2013.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