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소스
계9:1-1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하나 있는데,
그별은 아비소스를 여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 별이 아비소스를 여니, 거기에서 큰 용광로의 연기와 같은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해와 하늘이 그 구덩이에서 나온 연기 때문에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나와서 땅에 퍼졌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전갈이 가진 것과 같은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풀이나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하지 말고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만을 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라는 허락이 내렸습니다.
그것들이 주는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와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그 기간에는 그 사람들이 죽으려고 애써도 죽지 못하고, 죽기를 원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그 메뚜기들의 모양은 전투 채비를 한 말들과 같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과 같은 것을 쓰고,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고, 쇠로 된 가슴막이와 같은 가슴막이를 두르고, 그 날개 소리는 마치 전쟁터로 내닫는 많은 말이 끄는 병거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것들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침이 달려 있었는데,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아비소스의 사자를 자기들의 왕으로 떠받들었는데, 그 이름은 히브리 말로는 아바돈이요, 그리스 말로는 아볼루온입니다.]
• 불통의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계절은 경칩에서 춘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직 그늘진 곳에 잔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봄 신명에 겨운 새들의 몸짓이 경쾌합니다.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신 주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호세아 선지자의 비전에 늘 감동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때 벌어지게 될 사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호3:21-22)
부름과 응답의 멋진 조화, 이것이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876년 오늘은 미국 보스턴 대학의 음성생물학 교수였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의 원리를 발견하고
그의 조수였던 왓슨과 최초로 통화를 한 날입니다.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소통은 잘 되고 있습니까?
문명의 불빛이 휘황할수록 하나님과의 소통의 문은 점점 닫혀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통이야말로 세계의 위기입니다.
• 인류의 핵 경험
내일은 일본의 동북 지역을 덮쳤던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지 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날의 참상에 전 세계가 전율하고 긴장했는데 마치 그게 오래 전에 벌어진 사건처럼 여겨집니다.
고통이나 충격은 시간 속에서 표백되게 마련입니다.
망각이 때로는 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병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망각하기에 더 큰 고통을 야기하는 때도 많습니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나치의 만행을 경험한 이들이 피로써 하는 하소연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핵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사고 현장에 접근할 수도 없었고, 그 상황을 통제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그곳에 터 잡고 살던 사람들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은 대양을 돌고 돌아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전의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오늘을 ‘제1회 탈핵 주일’로 지키는 것은 그 무서운 하늘의 경고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에 와서 <한일생명평화 콘서트>를 열었던 일본의 음악가들은 후쿠시마의 참상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열기 위해 세계 각지를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함께 왔던 사진작가 오가와 테츠시 씨의 사진을 보면서 저는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후쿠시마의 참상을 사진에 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살던 어린이들의 해맑은 모습, 그리고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풀꽃을 찍었습니다.
그는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요?
우리 삶은 많은 에너지를 사용함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에너지 사용량은 적정 수준을 넘은지 이미 오래입니다.
편리함에 중독된 탓인지 우리는 큰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불편한 삶을 선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인류의 문제를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과학기술이 그리고 정치권이 해결할 거라는 믿음 말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후 세 번의 큰 핵 재앙을 경험했습니다.
첫째는 1979년 3월 28일 새벽 4시경 미국 펜실바니아에서 일어난 스리마일 원전 사고입니다.
핵 발전소 2호 원자로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고정 밸브에 이상이 생겨 냉각수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잠이 부족했던 직원들이 제때에 대응하지 못해 대형 사고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1986년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입니다.
그것은 직원들의 조작 실수가 빚어낸 참화였습니다.
안전 테스트를 시일 내에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던 직원들이 자동안전장치를 차단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고가 나자 직원들은 매뉴얼의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비상 냉각 시스템을 꺼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체르노빌은 폭발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2000 평방 마일이 넘는 범위에 방사능 물질이 퍼졌습니다.
다섯 살 이하의 어린이 250만 명을 포함한 1,700만 명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방사능 오염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사고 이후 5년 만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평균수명은 74.5세에서 63.3세로 떨어졌고, 갑상선암은 700%나 증가했습니다.
셋째가 바로 후쿠시마 원전사고입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과학자들은 안전대책 마련에 부심했지만,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원전은 결코 깨끗한 에너지도 안전한 에너지도 아닙니다. 지속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원료인 우라늄은 고갈되어 가고 있고, 그나마 우라늄을 채굴하는 비용과 그것을 정제하는 데 드는
비용과 에너지도 천문학적입니다. 지금으로서는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도 없습니다.
우리 미래 세대들은 핵폐기물이 은폐된 땅 위에 집을 짓고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 메뚜기 떼
이 대목을 생각하면서 제가 떠오른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옛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열릴 때 인류가 경험하게 될 고통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곱 봉인이 열리고,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가 들려올 때 세계는 진통하는 산모처럼 크게 흔들렸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섯 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벌어진 일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별은 아비소스를 여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은 후기 유대교에서 타락한 천사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타락했기에 그는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아비소스’는 그리스어로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말입니다.
영어로 심연을 뜻하는 어비스abyss는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개역 성경은 그 뜻을 살려 무저갱無底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 생각만 해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극한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군대에서 담력훈련을 받을 때 무덤 속을 기어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빛 한 점 없는 동굴을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온갖 불길하고 불온한 것들이 머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인간의 능력이나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혼돈을 질서로 바꾸신 하나님은 어둠의 세력들을 그곳에 가둬놓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고인지 그 아비소스를 여는 열쇠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의 손에 주어졌습니다.
그 별이 아비소스의 문을 열자 스멀스멀 연기가 올라왔고, 그 연기는 해와 하늘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그 연기를 뚫고 메뚜기들이 날아올라 땅에 퍼졌습니다.
우리는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메뚜기 떼가 주의 날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표징임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가 메뚜기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수천 만 마리의 메뚜기 떼가 한번 지나가면 그해 농사는 끝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루에 자기 몸무게 이상을 먹기도 하는 메뚜기는 채소, 잎사귀, 꽃, 과일, 나무껍질까지 다 먹어치웁니다.
중근동 지역의 농부들과 유목민들에게 메뚜기는 재앙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아비소스에서 올라오는 메뚜기는 풀이나 뜯어먹는 예사 메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전갈이 가진 것과 같은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그 메뚜기의 모양에 대한 이례적인 묘사입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전투 채비를 갖춘 말들과 같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 같은 것을 쓰고,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습니다.
머리털도 있고, 사자의 이빨 같은 이빨도 있습니다. 쇠로 된 것 같은 가슴막이가 있고,
날개 소리는 많은 머리가 끄는 병거 소리와 같았습니다.
전갈과 같은 꼬리와 침이 달려 있었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국민 M.C인 메뚜기 유재석 씨와는 좀 다른 모습입니다.
차라리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우주 괴물과 같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매우 공격적이고 거칠어 보입니다.
그 메뚜기 떼는 풀이나 푸성귀 따위는 거들떠보지 말고,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만을
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재앙은 무차별적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계시록 저자의 견해입니다. 마치 애굽 전역을 덮쳤던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와 상인방에 어린양의 피가 있는 집은
그냥 넘어갔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메뚜기 떼의 괴롭힘은 다섯 달 동안만 지속됩니다.
왜 다섯 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메뚜기의 생애 주기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따름입니다.
메뚜기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죽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와 같은 고통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차라리 죽기를 바라지만 죽을 수조차 없습니다.
욥이 겪었던 고통이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아비소스의 문이 열리면서 전 세계로 번져가는 죽음의 공포를 생각하면서
방사능이 번져가는 지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저 묵시록적 상상력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화감독들은 핵 전쟁이 일어나 모든 문명이 파괴된 후의 상황을 종종 그리곤 했습니다.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일들을 보면 지금 우리가 너무 태평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방사능에 노출되어 평생 고생하는 이들을 생각해보면 전갈의 독을 가진 메뚜기의 습격을 당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어마어마한 재난의 가능성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할 수 없다는 말보다 무신론적인 말이 없습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기독교인의 삶을 불가능의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페적 사랑의 꿈은 소중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고 향상시키도록 추동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다는 것, 신앙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아비소스의 열쇠를 받은 땅에 떨어진 별을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스멀스멀 스며나와 하늘과 별을 가리는 연기를 막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어린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셨다는 이야기는 잘도 하면서,
가능성이 없다고 하여 아예 외면하는 것은 믿는 이의 모습이 아닙니다.
유럽에서는 원전을 늘리지 않으면서도 에너지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해마다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 집약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어쩌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이 시대의 소비주의야말로 우리의 애굽 혹은 바벨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혼돈의 물 사이에 궁창을 넣고 들어 올려
그 물을 갈라놓으심으로 공간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늘 위의 물과 땅 아래의 물은 언제든 다시 합쳐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바로 그런 사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노아가 육백 살 되는 해의 둘째 달, 그 달 열이렛날, 바로 그 날에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다"(창7:11-12)고 전합니다.
땅의 큰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홍수 문이 열렸습니다.
결국 혼돈의 물이 다시 합쳐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이었고, 파멸이었던 것입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혼돈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유대교 랍비들은 성전이 있는 시온산은 혼돈의 물을 덮고 있는 덮개(capstone)라고 가르쳤습니다.
성전이 태곳적 혼돈의 세력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의] 토대를 닦기 위해 땅을 파 들어갔을 때, 심연의 물[‘테호마’]은 땅으로 올라와 세상을 삼켜 버리려 하였다.
그때 다윗은 열다섯 개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를[시120-135편] 불러 그들을 잠재웠다."(존 D. 레벤슨, <시내산과 시온>,
홍국평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55쪽)
신화적인 이야기이지만 저는 가슴 찡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혼돈의 물, 아비소스의 문을 억제하는 덮개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노래가 넘치는 세상을 이길 힘은 생명을 노래하는 이들로부터 나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새로운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덜 소유하고 덜 쓰면서도 행복한 삶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비소스의 문을 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후쿠시마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던 오가와 테츠시의 소박한 꿈은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꿈입니다.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비소스의 문을 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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