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게 싸워 이기기
시34:8-14
[너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라.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큰 복을 받는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그를 경외하여라. 그를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젊은 사자는 먹이를 잃고 굶주릴 수 있으나,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어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젊은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들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겠다.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구냐?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또 누구냐? 네 혀로 악한 말을 하지 말며, 네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 하나님의 눈물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창조절기의 막바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반추하며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 보아야 할 때입니다. 돌아보면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우리를 당신의 품에 받아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힘겹지만 현실을 이겨낼 힘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셨습니다.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주님께 사정을 아뢰고 해결의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때로는 즉각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물론 그 기도를 거절하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절조차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고, 또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지금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미술관 관장 집에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의 눈물>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비싼 작품이랍니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그분과 가족들은 행복의 눈물을 흘렸을까요? 저는 성도들의 집에는 <하나님의 눈물>이라는 작품이 한 점씩 걸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작품은 물론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가슴에 그려야 할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고 없고의 차이는 실로 엄청납니다.
저는 사랑은 무능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모든 힘을 다 동원합니다.
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해내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덜어드리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결국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훈련’과 ‘신실함’입니다.
믿음의 삶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 길을 통과해야 했던 것은 애굽에 사는 동안 몸과 마음에 밴 노예적 삶의 습성을 씻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눈치껏 살면서 밥이나 굶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 벗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위해서는
온갖 위험과 불편이 도사리고 있던 광야를 지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광야야말로 하나님의 학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납득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뜻에 순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실함입니다.
• 감사
이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34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7절까지가 첫째 부분이고,
8절부터 14절까지가 둘째 부분,
그리고 15절부터 22절까지가 셋째 부분입니다.
먼저 첫째 부분의 음악으로 이야기하자면 장조입니다. 시는 아주 명랑한 강박强拍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주님을 늘 찬양할 것이니, 주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 내 입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1)
이어서 시인은 함께 기뻐하자며 자신의 노래에 비천한 자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비천한 자the afflicted’는 그저 못난 사람 혹은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불의한 이들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는 이들, 새 사냥꾼의 덫에 걸린 것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어찌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시인은 그런 이들을 자기의 찬양 속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어려움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길래 그는 고난의 어둠 가운데서도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는 절망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분이시고, 두려움에 빠진 이를 건지시는 분이셨습니다(4).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사람을 지키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주시는 분이셨습니다(7)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이들을 고아처럼 홀로 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이들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고난이 우리 삶에 유익이 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도 어렵고 또 그 뜻을 수행할 생각도 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의 어리석고 연약한 이들을 들어 스스로 지혜롭고 강하다고 장담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고전1:27).
사실 어려움이 중첩될 때면 우리 마음의 여백은 점점 사라집니다. 삶에 대한 감사와 경탄이 자취를 감추고, 다른 이들을 관용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삶에 개입하시고, 건지시고, 지키신다는 확신을 갖는 순간 삶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됩니다. 제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정말 놀랐던 것 가운데 하나는 불의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오신 분들이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의의 최후 승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이미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짓밟히고 천대받아 마음에 시커먼 멍 자국이 가실 길 없는 사람들을 부르는 곳은 기쁨의 노래판입니다.
시편 137편의 시인은 “우리는 바빌론의 강변에 곳곳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1)고 고백합니다. 그들의 울음은 참 비통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어 놓은 것을 보고, 압제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3) 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시인은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며 만일 자신이 그런 노래를 부른다면, 그리고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오른팔이 말라비틀어지고,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34편의 시인은 새로운 노래로 그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했던 말처럼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느8:10)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불의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화만 내면 안 됩니다. 명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함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누군가 치는 장단에 ‘얼쑤!’ 추임새도 넣어야 합니다. 싸우면서도 스스로 거칠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싸움은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 새로운 세상 만들기
둘째 부분은 그렇게 하나님의 선율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세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하늘의 길은 땅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야곱이 꿈에 보았던 층계도 땅에서 하늘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땅의 길을 제대로 걷지 않고는 하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급진성은 무엇일까요?
너무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늘을 보자는 것 아닐까요?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농부들의 삶의 자리, 그물을 던지고 거두는 어부들의 삶의 자리, 여인들이 밀가루 반죽을 하고
빵을 굽는 바로 그 자리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깃든 자리임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또 살아내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함께 피와 땀을 흘려 만들어가야 할 세상입니다.
오늘의 시인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구냐?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또 누구냐?”(12)
‘나다’라고 대답하려면 먼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시인은 그 삶의 길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멋진 삶의 첫 번째 조건은 악한 말,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말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해치고 죽이는 말입니다. 베고, 찌르고, 가르는 말이 횡행하는 시대입니다.
이어주는 말, 북돋는 말, 감싸 안는 말을 회복해야 합니다. 몇 달 전 교회에서 ‘비폭력대화’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참 폭력적입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입에 달고 사는 욕만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단정적인 말, 판단하는 말, 비난과 냉소, 말의 독점, 경청하려 하지 않는 것…거짓말도 넓게 보자면 폭력입니다.
남을 속여 어떤 형태로든 자기 이익을 꾀하려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용하는 말이 달라지면 세상과 이웃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집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은 정말 깊은 통찰입니다.
둘째는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 표어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입니다. 멋지긴 하지만 그대로 살려면 참 어렵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 티를 내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피하는 것이 소극적인 대응이라면 선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인 선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선한 일은 평화를 이루는 일이고,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모로코의 여성운동 단체 가운데 드림위버Dream Weaver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카펫을 함께 짜면서 카펫의 무늬 속에 숨겨진 여성사를 연구하기도 하고, 거기서 얻어진 수입금으로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는 단체입니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웅진지식하우스, 148쪽).
그들은 꿈을 짜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은 생명이라는 날실과 평화라는 씨실로 하나님 나라를 짜는
헤븐위버Heaven Weaver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14b).
이 요구가 아주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평화가 무너진 현장을 외면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것을 남의 일처럼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회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 누가 의로운 자인가?
시편 34편의 셋째 부분은 의로운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눈은 의로운 사람을 살피시며, 주님의 귀는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다.”(15)
“의인이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시고, 그 모든 재난에서 반드시 건져 주신다.”"(17)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19)
의로운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살피시고’(15), ‘들으시고’(17), ‘가까이 계시고’(18), ‘건져주신다’(19)는 말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의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의로운 사람’ 하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용감하게 불의에 맞서는 사람을 일단 생각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기 안위를 계산하지 않고 뛰어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착한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그런 이들을 사랑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적당히 비겁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용감한 사람만을 의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의인이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말한 후,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상하지요?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정의로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에서 힘 좀 쓴다는 이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빼앗기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 주류 사회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사람들, 그래서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은 그들을 의지가지없는 신세로 만드는 세상을 걸어 하나님 앞에 제출된 고발장입니다.
함께 살아가야 할 이들의 기본권을 억압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채워주려 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은 악한 일을 하는 자를 노려보시며, 그들에 대한 기억을 이땅에서 지워 버리신다.”(16)
지금 우리 삶은 어떠합니까? 불의한 세상에 공모자가 되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함께 찬송과 기도를 바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회복적 정의에 동참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힘들더라도 그 길에 접어드는 순간 우리는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입구에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삶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모든 불의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사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불의와 어둠이 짙은 세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드는 이들이 필요한 법입니다.
늘 삶에 대해 감사하고 또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주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유대교의 지혜서에는 “주여, 저의 깨어진 가슴 조각을 모아 성소를 만들겠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온다고 합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가장 깊이 그리고 심하게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그 상처를 극복하고 생명을 향해 돌아서면
그는 다른 이들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생명과 평화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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