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세고 용감하라
수1:5-9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 함께 계시는 하나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입동이 지나면서 늦가을의 정취가 제법 좋습니다. 지난 한 주간도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사셨는지요. 지난 주간 전 세계인의 눈과 귀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집중되었습니다. 결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저는 오바마의 당선 연설을 주의 깊게 들어봤습니다. 그의 연설에서 빠지지 않는 여러 요소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 일치에 대한 호소, 함께 만들어 가야 할 희망, 그리고 강대한 미국에 대한 비전이었습니다. 그는 역시 대중 연설의 귀재입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는 그의 말에 열광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가 빚과 불평등, 그리고 지구온난화로 인해 위협받지 않는 세상을 누리게 하고 싶다고 말할 때 저는 ‘아멘!’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대목은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또 존중받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면서, 미국은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군대에 의해 보호받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모든 사람이 자유와 존엄을 누리며 살아갈 평화의 세계를 이루고 싶다고 말했지만 왠지 공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군대와 군사력으로 만들어지는 평화는 언제든 무너질 수밖에 없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세상에서 가장 큰 낭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소중한 자원이 파괴하는 일에 동원됩니다. 전쟁은 악마적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몽상가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새로운 평화를 꿈꾸어야 합니다. 그 평화의 세계는 아낌, 섬김, 나눔, 돌봄이라는 가치가 소중히 여겨질 때 열리는 세계입니다. 경쟁과 효율과 힘이 숭상되는 세상에서 평화를 꿈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세상에 대해 끝없이 말해야 합니다. 어리석다는 말을 듣더라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는 살벌합니다. 그렇기에 평화에 대한 갈망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의 본문은 탈출 공동체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 줍니다. 출애굽을 이끌었던 1세대 지도자인 모세가 세상을 떠나자, 여호수아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모세를 모셔왔던 그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 때문에 그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책임은 요단강을 건너(cross over)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백성들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핵심은 건넌다는 말에 있습니다. 요단강은 옛 삶과 새 삶의 경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준 것도 바로 그런 의미였을 겁니다. 하나님은 조금 위축되어 있던 여호수아를 여러 가지 말로 격려 하십니다.
• 굳세고 용감하여라
때로는 누군가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무너져 내리는 우리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도 합니다. 벼랑 끝에 서있는 듯 삶이 위태로울 때, 그래서 자포자기적인 추락의 유혹이 찾아올 때, 말없이 다가와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겠습니까.
“너희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3b).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5)
놀랍고도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근세사에서 이 말씀은 오용된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수립하면서 그 땅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랜 세월 나라 없이 떠돌던 그들이 자기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을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을 내쫓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상황이 뒤바뀌어 이스라엘이 야금야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의 장벽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큰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을 출애굽이라는 맥락과 분리시키면 안 됩니다. 히브리의 하나님을 자처하신 하나님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밑바닥 계층을 이루던 이들을 모든 사람의 기본적 인권이 존중되는 자유와 평등의 세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이 그들을 맞아들여 함께 살자고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강성한 원주민들은 그들을 함께 살아야 할 이웃으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체제를 뒤흔들 위험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들에게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면서 여호수아에게 ‘굳세고 용감하라 Be strong and courageous’고 세 번씩이나 당부하십니다(6,7,9). 굳건한 반석과 같았던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은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낙심한 이들에게 힘을 내라고 말할 때가 많지만 그 말처럼 힘이 안 되는 말도 드물 겁니다. 용기를 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굳세고 용감하라는 말은 내면의 힘을 끌어올리라는 말이라기보다는, 내가 네게 힘을 불어넣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백성답게 비전을 가슴에 품고 그 비전을 위해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대입 수학능력 시험이 끝났습니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성적이 좋든 나쁘든 홀가분한 느낌이 들 겁니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았던 소식이 들려옵니다. 수능 시험 직전과 직후에 성적을 비관하여 세상을 버린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떨어진 꽃봉오리를 보는 것 같아 아팠습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삶을 구성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못한 우리의 책임입니다.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다른 삶을 상상할 능력이 없었기에 그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멀고 깊은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절망과 비관 쪽으로 몸을 돌리기 쉽습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사진작가 유별남의 사진전을 보고 왔습니다. 사진 가운데서 별이 총총 빛나는 밤하늘을 담은 사진이 유난히 제 눈을 끌었습니다. 작가에게 물었더니 오리온좌와 시리우스라고 말했습니다. 모처럼 눈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리고 나그네살이에 어지간히 지쳤던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라고 하셨던 주님의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별 하늘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가슴에 맺혔던 어떤 울울함이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을까요? 그 광대함 앞에 설 때 우리를 괴롭히던 삶의 문제는 좀 상대화됩니다. 별 하늘을 오랫동안 응시하다 보면 별이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을 밝혀주는 신비한 빛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산다는 것은 걸어서 별까지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별은 그리움의 대상일 것입니다. 우리의 그리움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제게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용감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이웃에 대해 책임적인 사람이 됩니다.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놀라운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능해서도 안 되고 무책임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격려하시는 겁니다.
•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라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당신의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으실까요?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그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또 읽어 그것을 내면화하고 또 그것을 몸으로 살아볼 때 비로소 말씀 속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교인들은 ‘성경 공부’를 참 열심히 합니다. 찻집에 가보면 삼삼오오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성경공부가 피상성에 머물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미풍이 되어 우리를 감싸기도 하고 우리 속에 생명의 기운을 싹틔우게도 합니다. 때로는 예리한 검처럼 우리의 나태한 삶과 영혼을 베고 때로는 묵직한 망치처럼 우리의 헛된 망상을 타격해 깨뜨리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 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 빌립 집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읽는 것을 이해하냐?’(행8:30)고 묻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침묵시키는 시대라는 말이 맞을 겁니다. 듣기 좋은 말만 가려듣고, 불편한 말씀은 도리질하며 떨쳐버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배움의 기회가 주어져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만큼 안다는 뜻인가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뜻을 정한 후 왕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단6:10). 뜻을 정하고 살아도 넘어지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말씀과 만나는 시간을 자꾸 유보합니다. 할 일 많은 여호수아에게 율법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공부하고 성심껏 실천하라고 하신 것은 그래야 그에게 품부된 일을 감당할 힘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낙담의 사전적 정의는 “바라거나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실망하고 맥이 풀리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홀로 결단해야 하는 시간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의 몰이해로 인해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도 철없는 백성 때문에 마음이 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 모든 백성을 제가 배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그들을 품에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민11:12)
모세는 ‘나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호수아도 그런 순간을 많이 만났을 것이고, 또 만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걸 아시기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낙담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가끔 주후 360년 경 로마의 스키타이(Scythia)에서 태어난 존 카시안(John Cassian)의 <여덟 가지 악에 관하여>라는 글을 읽습니다. 여덟 가지 악덕은 탐식, 부정, 탐욕, 분, 낙심, 태만, 자만심, 교만입니다. 그는 낙담에 맞서야 할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낙담의 마귀는 영혼의 영적 관상 능력을 흐리게 하고,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완전히 어둡게 만들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꾸준히 성경을 읽어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고, 형제들을 온유하고 긍휼하게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일에 대한 미움, 심지어 수도 서원 자체에 대한 미움을 주입합니다. 그는 영혼의 유익한 결단을 손상시키고 인내와 끈기를 약하게 만들며, 영혼을 무감각하고 마비되게 하고, 낙심되는 생각들의 속박을 받게 만듭니다.”(<필로칼리아․1>, 엄성옥 옮김, 은성, 112쪽)
낙담은 영혼을 갉아 먹어서, 유익한 만남을 피하게 하고, 벗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합니다. 우리 마음에 앙심과 태만함을 가득 채웁니다. 낙담을 이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기, 성경 묵상,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 등입니다(114쪽).
낙담의 마귀가 횡행할 때일수록 함께 기운을 북돋워주는 이들이 필요합니다(con-viviality/이반 일리치가 만든 용어). 오늘 우리는 지치고 낙심한 이들 곁에 다가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그들을 북돋고 일으켜 세우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 공동체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서로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낙심할 수 없는 것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9)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우리는 기어코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옛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불화의 갈등의 세계를 건너 화해와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우리 가슴에 깃든 별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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