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서리 내린 후
살후1:3-5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여러분 모두가 각자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간직한 그 인내와 믿음을 두고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이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 꽃을 사칭하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계절입니다. 저는 한 10여 년 전부터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녘의 풍경에 넋을 잃곤 했습니다. 두루 평등한 그 벼들의 머리를 슬며시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바람조차 부러워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쓸쓸해 보이지만 그 또한 좋아 보입니다. 그 들판을 보노라면 시어머니를 위해 이삭을 줍던 룻의 모습이 떠오르고, 교회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들판에서 두 손을 모으는 부부의 모습이 담긴 밀레의 그림 <만종>이 떠오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느작거리는 코스모스와 만나 산뜻해집니다. 그리고 잎을 다 떨군 채 붉은 색 열매만 남긴 감나무도 잊을 수 없는 한국의 가을 풍경입니다.
가을은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절기입니다. 낙엽 지는 가을은 우리 삶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허장성세를 거두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손짓합니다. 삶의 나날이 늘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참 컸습니다. 과분한 은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시8:4). 시인의 이런 고백이 날로 절실해집니다. 눈물겨운 순간도 있었지만 그만큼 위로도 컸습니다. 마음이 무거운 순간도 있었지만 그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마치 세상천지에 혼자인 것 같이 쓸쓸한 순간도 있었지만 말없이 다가와 품이 되어준 이들 또한 있었습니다. 건강이 여의치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 때문에 더욱 생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시편의 구절은 생각할수록 감동입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시139:14)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개 건강, 학업, 진학, 취업, 승진, 결혼, 자녀 탄생, 주택 구입, 뜻밖의 도움 받음, 행운 등 우리가 바라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성도인 우리가 진정으로 드려야 할 감사는 그 이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품부하신 생을 경축하며 살 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기도입니다. 김왕노 시인의 <사칭>이라는 시를 읽다가 빙긋이 웃었습니다.
“나는 사람과 어울리려 사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꽃과 어울리려 꽃을 사칭하였고
나는 바람처럼 살려고 바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늘 사철나무 같은 청춘이라며 사철나무를 사칭하였고”
(<사칭> 부분)
꽃과 어울리려 ‘꽃을 사칭한 죄’는 얼마나 귀여운 죄입니까? 바람처럼 살려고 ‘바람을 사칭하는 죄’는 사실 권장해야 할 죄가 아닌가요? 우리는 대체 무엇에 쫓겨 이렇게도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자기 눈앞에 매달린 고기를 삼키려고 경기장을 질주하는 개들처럼, 욕망의 경기장에서 질주하느라 우리는 숨이 가쁩니다. 마음의 여백은 점점 줄어들고, 이웃과 살뜰한 관계를 맺는 능력은 퇴보했고, 생에 대한 감사의 마음조차 잃어버리고 삽니다.
• 왜 감사하지 못하나?
이현주 목사님의 <밥을 먹는 자식에게>라는 노래 시를 기억하십니까? “천천히 씹어서/공손히 삼켜라/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그 여러 날들을/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사람이 고마운 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마지막 구절이 특히 가슴을 툭 칩니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하지만 어떤 핵심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무겁다고 느끼고, 감사를 잊고 사는 것은 삶의 힘겨운 까닭도 있지만, 몇 가지 그릇된 마음의 습관 때문이 아닐까요?
첫째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익숙한 사람 혹은 물건들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잠을 청하는 밤까지, 아니 잠이 든 후에도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살아갑니다. 일일이 거명하지 않더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평상시에는 잘 모르지만 비상시에는 그들의 존재가 크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직종의 사람들이 파업이라도 하면 당장 어쩔 줄 몰라 허둥댑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간관계를 삭막하게 만듭니다.
둘째는 계산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늘 채권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가 있고, 채무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나친 채무자 의식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입은 자들의 채무 의식은 아름답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은혜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리 갚아도 갚을 길 없지만 그래도 빚을 갚으려는 마음으로 사는 것 자체가 천국의 삶입니다. 사도는 그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롬13:8)라고 권고합니다. 살아가면서 대하기 피곤한 사람들은 계산에 재빠른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뭔가를 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자기를 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사람들의 호의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잇속을 차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수룩했다간 이용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계산적이 되지 않을 수 없지만, 삶의 모든 순간에 자기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들은 불행한 이들입니다.
셋째는 망각입니다. 살다보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는 일이 다반사인 것이 인생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운 오른 팔로 우리를 건지십니다. 때로는 누군가를 보내셔서 우리를 끌어내 반석 위에 세워주십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지만 그 고마움과 감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색되곤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려 우리 삶이 무겁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 때 감사의 찬송과 기도를 인도하는 이(느11:17)를 두었습니다. 아삽의 증손자인 맛다니야(Mattaniah)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일상의 번잡함 속에서 잊고 살았던 하나님의 은총을 상기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 그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 지당한 감사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자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히6:1)라고 권합니다. 목회자들의 가장 큰 행복은 성도들의 신앙의 성장일 것입니다. 가끔은 자라지 않는 아이를 둔 부모의 심정이 되어 마음이 아뜩할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초보적 교리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만 맴도는 성도들을 볼 때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믿음이 깊어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잘 믿는 사람도 사랑하시지만 당신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이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아름답게 살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남영동 1985>를 만든 정지영 감독은 벌써 삼십 년 가까이 된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만드는 까닭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습니다. “아파하라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굳어져서 아파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아픔에 대해서는 예민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겪는 아픔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면역이 되어서 좀처럼 아파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도 외면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크게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는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인색한 마음은 신앙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입니다. 예수와의 깊은 일치를 경험할수록 품이 넓어집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따돌리지 않습니다. 상대의 연약함까지도 품어 안게 됩니다. 언젠가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교황 요한 23세의 편지 가운데서 만난 한 대목을 참 좋아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생애를 만족하게 이끌어주셨다. 그것은 내가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요모조모 따지거나 과거를 들추어내지 않기로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다. 나 또한 결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침묵을 지키고 즉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를 베푼다. 누군가 나를 나쁘게 대하더라도 나는 선으로 대하였다.”(피에르파올라 타칼리티 엮음, <말씀이 나의 두 손에>, 92쪽)
만족한 삶의 비결은 이렇게도 단순하건만 우리는 이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 삶을 하나님의 마음에 비끌어 매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상한 감사
바울 사도가 참 부럽습니다. 교인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있고, 그 결과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을 확인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은 평안함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있었고, 자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질시에서 비롯된 박해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질서를 부정한다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꿈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의 우애를 나누는 세상의 꿈은 기득권자들에게는 대단한 위협이었습니다. 밑바닥 사람들이 짓눌리고 사는 것을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지배자는 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세상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었던 것입니다.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가슴에 심어주신 꿈은 박해와 환난의 광풍조차 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인내와 믿음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박해와 환난이 있었기에 그들의 믿음은 더욱 순수해지고 깊어질 수 있었을 겁니다. 비 온 후 굳어지는 땅처럼 그들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어려움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세상에서 신앙에 가장 큰 위협은 안일한 생활입니다. 적당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없다면 사람은 권태 속에서 시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서리 내리기 전까지는 탱자에 향기가 깃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 향기를 머금을 수 있는 법입니다. 된서리가 내린 후에야 파는 매운 기운을 품습니다.
허리케인 샌디가 미국의 동북부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미국의 심장부라는 뉴욕과 뉴저지가 특히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근황을 올렸습니다.
“허리케인 샌디가 가져다 준 것은 피해만이 아닙니다. 선물도 많아요. 소형자체발전기를 가진 이웃이 찾아와 충전하도록 도움을 주고, 서로 잘 모르고 지내던 이웃들과 안부를 묻고, 교우들은 불 들어오는 집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인근교회로 대피한 학생들에게 밥을 지어 나르는 교우 덕분에 감사하게 되고, 집에선 아이들과 함께 촛불과 모닥불을 피우고 밤엔 꼬옥 끌어안고 자고, 낮엔 할 일들이 없으니 다들 책을 펴게 되고, 밀린 잠도 실컷 자고, 셀폰과 인터넷 사용도 최소화 되고, 자연과 더 가까워지고, 아이들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 모두는 겸손해지고...”(세빛 교회, 손태환 목사의 글)
재난이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재난에 대처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섬김과 돌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재난이 일상 속에서 잊고 살았던 삶의 공동체성을 상기시켰고, 나눔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은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마치 섬광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쉽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그런 순간을 일상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유대인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초막절 축제를 벌였습니다. 광야에서 초막을 치고 살았던 신산스러웠던 조상들의 삶을 몸과 마음으로 재현해 보면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리는 추수감사절 예배는 이러저러한 일들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를 넘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라고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겨울이 서둘러 올 것입니다. 된서리를 맞고 녹아버린 잎들, 그리고 미처 여물지 못한 열매가 볼 때면 안쓰럽습니다. 우리 믿음이 그런 것이 아닌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된서리가 내린 후에 더욱 깊은 향기를 머금는 것입니다. 깊어가는 이 가을, 우리 삶에도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향기와 맛이 배어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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