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하늘과 접촉할 때

천국생활 2012. 12. 3. 10:36

하늘과 접촉할 때
사64:1-9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 마치 불이 섶을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할 것입니다. 주님의 대적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님 앞에서 떨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우리들이 예측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셨을 때에,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었습니다. 이런 일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 말고 어느 신이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으며, 우리의 죄악 탓으로 우리를 소멸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 분열된 나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초 하나를 밝혀 놓고 우리는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입은 마음의 상처, 고통, 부끄러운 기억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짙은 그늘이 되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 그늘진 마음에 주님의 빛이 다가오시기를 빕니다. 혼돈과 흑암과 공허가 넘치던 세상을 향해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질서를 창조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사야 56장부터 66장까지를 제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이사야서에 대한 신학적, 문헌학적 분석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 부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주전587년 바벨론에 의해 남 왕국 유다가 멸망당한 후 그 땅의 유력자들은 대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살았습니다. 근 50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남의 땅 남의 나라에서 서러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포로민들의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감격적이었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고레스를 하나님의 종이라고도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폐허로 변해버린 예루살렘 성과 무너진 성전을 보며 그들은 낙심했습니다.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엄두조차 나질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것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은 그 땅에 남아 있던 이들을 좀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그 땅에 살던 이들이 귀환자들을 따뜻하게 대했을 리도 없지요. 또 그 땅에 이주하여 살고 있던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저마다 서있는 삶의 자리에 따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혔던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분열, 세력 다툼으로 사회는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유력자들은 그런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 성전을 재건했지만, 그들 사이의 앙금을 털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제3이사야가 등장한 것은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성전의 재건이 아니라 무너진 공의와 공평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번다한 종교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사람, 원통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일이 우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근본을 통찰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입니다. 제3이사야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개입 요구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선민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선민이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자의적 믿음일 뿐입니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아픔의 자리에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찾아가셨던 것은 그들에게 유난히 사랑받을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 받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직접 개입하여 역사의 변화를 이끌어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제국을 미워하십니다. 바로의 땅 애굽을 치셨고, 앗시리아를 치셨고, 바벨론을 치셨고, 페르시아를 치셨고, 그리스와 로마를 치셨습니다.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제국이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이 섶을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회복될 때 세상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둘째 전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을 전심으로 따르는 사람,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십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은 정의를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기본권을 누리며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불온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전심으로 따르지도 못합니다. 적당한 선까지는 따라가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곤 합니다. 우리 삶이 맥 빠진 까닭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까닭은 정의를 실천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3이사야는 자기 시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사람들은 서슴없이 죄를 짓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탓인지 주저함도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한통속이 되어 몸과 마음을 더럽혔습니다. 저마다 자기 의를 내세우지만 그것은 더러운 옷과 같아서 자기만 모를 뿐 모두가 그 악취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생기와 기쁨이 없기에 나뭇잎처럼 시들었고, 죄악의 바람이 부는 대로 자기 몸을 맡겼습니다. 자기의 비참함을 자각하면서 진심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남의 말 하듯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금만 정직하게 돌아보면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 다시 시작되는 희망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희망은 있습니다. 물론 그 희망의 뿌리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제3이사야는 '주님은 우리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낯을 돌리신 것 같은 현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영 버리지는 않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롭게 빚어주시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버지의 뜻 앞에 엎드리는 일입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물레에 올라가 새롭게 빚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평과 정의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우리 삶을 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정돈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 가슴에 켜켜이 쌓인 것은 무엇입니까? 좌절된 꿈, 성취하지 못한 목표, 식어버린 열망…이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실망합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우리의 이런 부실한 삶을 눈치 챌까봐 전전긍긍입니다. 다른 사람은 근사하게 사는 것 같은데, 혼자 뒤쳐진 것 같아 속상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삶을 경축하며 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기뻐하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외롭고, 무력합니다. 영적인 성장조차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곁에 오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영원의 세계와 접촉해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 삶을 조망해야 할 때입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만족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삶의 깊은 곳을 응시하십시오. 공감의 능력을 키우십시오. 정의를 추구할 용기를 내십시오. 오시는 주님과의 깊은 접촉이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어줄 겁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 시대는 제3이사야가 살던 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늘을 가르시고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아, 어둠을 빛으로, 탄식을 찬송으로, 미움을 긍휼로 바꾸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