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쁨이 큽니다
삼상2:1-10
[한나가 기도로 아뢰었다.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 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시고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 놓으셨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주님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님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기다림의 아픔과 신명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가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대림절 셋째 주입니다.
대설에서 동지를 향해 가고 있는 이즈음 밤이 참 깁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사람마다 절실하게 기다리는 것이 다릅니다. 설렘과 기대로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지만,
질식할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는 이도 있습니다.
서가에 꽂힌 책을 일람하다가 문득 서준식의 <옥중서간집>을 꺼내 읽었습니다.
그는 1971년에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여동생인 영실씨에게 보낸 편지는 대림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마침 그 편지가 1983년 12월 26일 자로 되어 있어 더 그러합니다.
"‘기다림’이란 무엇인가 고대하는 것의 부재이면서도 고대하는 그것이 반드시 오리라는 예감이요 기대이다.
그래서 ‘기다림’은 아픔과 슬픔의 한가운데서 꿈꾸는 아름다운 희망이다.
아픔과 슬픔을 대가로 치르기에 인색해서 아름다운 희망까지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의 인생이란 비참한 인생이 아닐까?
‘기다림’의 아픔이 없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자.
나는 그 ‘기다림’의 아픔 속에서 이만큼이나마 성장해온 것이 아닌가.........?"
(서준식, 옥중서간집2,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않고>, 형성사, 1989, p.220)
그가 기다린 것은 출소 날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땅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평화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다림이 야기한 아픔조차 기꺼워하는 것입니다.
그가 기다린 것이 자신만의 행복이었다면 기다림은 그저 고통이었을 테지만, 그렇지 않기에
기다림의 아픔은 오히려 성장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기다림도 그렇게 성숙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꿈꾸고 지향해야 할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생의 곤고함
좋은 가문 출신의 엘가나와 결혼할 때 한나의 마음은 행복한 상상으로 한껏 부풀었을 것입니다.
귀여운 아기들을 낳아 기르면서 누리게 될 행복을 상상하며 볼을 붉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나의 행복과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애써 봐도 태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속자를 얻기 위해 엘가나는 브닌나라는 여인을 들였고, 브닌나는 보란 듯이 아기들을 낳았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에는 여전히 사랑이 담겨 있었지만, 그럴수록 한나의 가슴에는 스산한 바람만 부는 듯했습니다.
자격지심 때문이었겠지요. 어느 때부터인가 한나를 바라보는 브닌나의 눈빛에는 경멸이 담기기 시작했고,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를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위로조차 받지 못하는 신세였습니다. 한숨만 나오고 식욕조차 잃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엘가나의 온 가족이 실로의 성소에 올라갔을 때 한나는 홀로 성소에 엎드려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있던 한과 아픔을 마치 토해내듯 주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차마 누가 들을세라 소리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거리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눈이 어두웠던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 알고 그를 불러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한나는 제사장에게 자기 심정을 토설합니다.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았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는 여인의 표정에 담긴 절박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한나를 축복했습니다.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오.”(삼상1:17)
엘리의 이 축복은 참 감동적입니다.
그는 자식 교육을 잘 시키지 못한 탓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고 말지만,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겪어온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마음을 다해 축복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한나도 참 놀라운 여인입니다. 엘리의 축복을 듣고는 상실감을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음식을 먹었고, 얼굴에 더 이상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습니다. 절대적 신뢰입니다.
믿음이란 내맡김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미루라는 말이 아니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즉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의 축복, 그리고 상심을 떨쳐버린 한나의 시크한 모습 속에서 저는 아름다운 신앙을 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한나의 태를 여셨고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성서가 보여주는 하나님은 언제나 땅의 소리, 특별히 고통 받는 이들의 신음 소리와 탄식 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사무엘이 젖을 떼자 한나는 아이를 데리고 실로의 성소로 나아갑니다.
수소를 잡아 바친 후 한나는 서원했던 대로 아이의 일평생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는 기쁨에 가득 찬 기도를 올립니다.
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찬양이라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한나의 기쁨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2:1)
“나, 하나님 소식에 가슴이 터질 듯합니다! 하늘을 나는 듯합니다.
나의 원수들, 이제 내게 웃음거리일 뿐. 나는 나의 구원을 노래하며 춤추렵니다.”(유진 피터슨, <메시지>)
한나는 하나님 소식에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노래합니다. 하늘을 나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감격, 이런 순수한 기쁨을 누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에게 그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땔감으로도 보잘 것 없고 더더군다나 재목으로는 쓸 수 없는 떨기나무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지만, 세상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이들 속에 현현하셔서
그들을 빛나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야웨’라는 단어를 연구해온 학자들은 그 이름에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있게 하시는 분, 즉 창조자(Creator)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숨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태양을 형님이라 불렀고 달을 누님이라 불렀습니다.
그에게는 바람도 불꽃도 죽음도 가난도 다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정신 나간 사람 같지만 그는 눈을 뜬 사람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붙드시는 분(Sustainer)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나 자연을 통해서 우리를 돌보시고 붙들어주십니다.
우리를 돌보기 위해 온 우주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신비가들은 이 사실을 마음이나 관념이 아닌 몸으로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속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누구라도 한나처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보내주신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땅의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
사실 한나의 노래는 오랫동안 이스라엘 민중들이 불러왔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노래를 통해 자기들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전승하곤 했습니다.
대림절마다 우리가 한번쯤 낭독하게 되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도 같은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와 마리아의 노래가 매우 유사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한나의 노래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저울은 대상에 따라 흔들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저울은 공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가는 세상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용사들의 활은 꺾으시고, 약한 사람은 강하게 하십니다.
넉넉하게 살던 이들은 가난하게 만들고, 굶주리는 이들은 다시는 굶주리지 않게 만드십니다.
자식이 많다고 자랑하던 여인들은 홀로 남게 되고, 자식을 낳지 못하던 여인은 많은 자식을 낳게 됩니다.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십니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현상 질서status quo’에 연연하시는 분이 아니라, 현실을 변혁시키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의 서기였던 바룩을 통해 하신 말씀은 참으로 통렬합니다.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한다"(렘45:4).
이 두려운 사실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져야 합니다.
한나는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이 한 마디는 짧지만 강력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사람인 듯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역사를 이끌어갑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지식은 깊고도 심오하지만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던 아이작 뉴턴은 "나는 해변에서 노는 한갓 어린 아이일 뿐이다.
내 앞에는 발견되지 않은 진리의 대양이 가로놓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는 듯 권세를 부리는 사람들,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호흡을 고를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의 어머니이고, 사무엘을 거쳐 이스라엘의 왕정체제가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하서는 사울과 다윗 가문의 이야기입니다. 눈치채셨습니까?
사무엘기의 첫 머리에 등장하고 있는 한나의 노래는 왕들의 통치가 어떠해야 함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들은 하나님이 그러하시듯이 비통한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어둠 속에서 멸망할 것이고, 제 아무리 왕들이라 해도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는 산산이 깨뜨려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새롭게 하십니다.
대통령 선거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누가 되었던 한나의 노래와 마리아의 노래를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아픔과 슬픔의 세월을 보냈기에 한나는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쓰라린 그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공동체의 영적 자산으로 바꾸어냈습니다.
고통을 겪었기에 한나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여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고 싶어 하십니다.
2000년 전 만삭의 산모에게 방을 내주지 않았던 베들레헴 사람들의 무정함만 탓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지금 외로우십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주님이 태어나실 분만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 오시는 주님으로 인해 기쁨과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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