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사60:1-4
(2012/12/25)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너에게로 오고 있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으로부터 오며, 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서 올 것이다.]
• 성탄절 풍경
아름다운 성탄절 아침,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금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껏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마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두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이 단어가 상기시키는 든든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는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들려온 천사들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눅2:10)
성탄의 기본적인 정조는 기쁨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요1:9).
어둠이 지극하던 시대가 아니라면 빛이라는 은유가 그렇게 가슴 떨리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터전이 흔들리는 것처럼 아뜩한 이 시대에도 주님은 '든든함'으로, '기쁨'으로, '빛'으로 오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 다른 이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홀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1)
이것은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 현실입니다.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 속에 있는 거친 것,
폭력적인 것은 스러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맘때면 꼭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1914년 12월 24일 저녁 플랑드르 전선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100미터 거리를 두고 영국군과 독일군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총격전으로 많은 동료들이 죽었고, 남은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 병사 하나가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노랫소리가 어둡고 긴 전선의 참호 위로 울려 퍼졌습니다.
노래가 몇 곡째 이어지자 말 없이 귀를 기울이던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노래는 곧 합창이 되었습니다. 이상한 감동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리둥절하던 영국군 진영에서 박수소리가 울려나왔습니다.
그러자 독일군 병사 하나가 몸을 드러낸 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Merry Christmas, Englishmen! We not shoot, you not shoot!" 우리도 총을 쏘지 않을 테니
너희도 총을 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병사가 참호 위에 쌓아올린 흉벽 위에 불을 밝힌 초를 올려놓자 잠시 후 곳곳에 초가 밝혀졌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양 진영의 병사들은 그때부터 총을 내려놓았습니다. 휴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이후에 서로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축구도 함께 했습니다.
병사들을 괴롭히는 이와 쥐를 퇴치하는 비법도 서로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전선 사이 무인지대(no man's land)에 널려있던 시신들을 함께 묻어주었습니다.
만나고 보니 그들은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자기들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도 자각했습니다.
서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성탄절이 만들어낸 기적이었습니다.
• 절망을 딛고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격려입니다.
벅찬 설렘을 안고 예루살렘에 귀환한 이들은 자기들 앞에 전개되는 현실의 어둠 앞에서 깊이 좌절했습니다.
폐허로 변한 도성을 보며 그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무너진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살림살이가 워낙 힘겹다 보니 인심은 흉흉해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가파롭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들려온 것이 이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사60:1)
낙심한 이들에게 들려온 이 두 마디는 강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비추어라.' 이 말은 잊고 있었던 소명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창12:3b)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소명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작은 시련 앞에서도 무너져 내립니다.
살다보면 낙심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호들갑스럽게 절망감을 토로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인생은 계속됩니다. 어둠과 절망과 슬픔조차도 믿음이라는 용광로에 넣어 빛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현실은 우리를 자주 넘어뜨립니다. 그래도 일어서야 합니다.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빛을 밝혀들어야 합니다.
사람다운 삶을 일깨워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구원의 빛이 비치고,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어둠을 깨치고 도래하는 빛을 남보다 앞서 보는 사람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비추어라.'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60:2)
애굽에 내린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볼 수도 없었고, 제자리를 뜰 수도 없었습니다.
흑암의 재앙은 태양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바로에 대한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놀라운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빛이 있었다.”(출11:23b)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제 아무리 어둡다 해도, 주님은 우리 위에 환한 빛을 비춰주십니다. 놀라운 사랑입니다.
• 천천히 나아가기
믿는다는 것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나 빛을 향해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에 걸린 사람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라"(막2:11)고 말씀하셨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라"(막3:5)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절망의 자리에 붙박인 채 탄식하며 지내지 마십시오.
며칠 전 도쿄대학교 교수인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었습니다.
그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극도의 신경증을 앓으며 생에 대해 번민하던 아들이
스스로 생을 거두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몇 달 후 일본 동북 지방을 덮친 대지진과 원전사고였습니다.
한 순간에 2만 명에 가까운 생명이 사라진 믿기 어려운 사태를 맞이한 후 그에게 떠오른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런 비참을 겪고도, 그래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진진하게 모색합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그는 독자들에게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을 성실히 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는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191쪽)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도 같은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실직 노동자들이 세상을 버리고, 빚에 몰린 이들이 벼랑 끝에 서고,
청년 세대들의 얼굴에 생기가 사라지는 시대이지만, 주님은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구유 속에 태어나신 분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분이 오히려 세상의 구원자가 되는 이 역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먼저 희망의 노래,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도 그 노래에 동참하게 마련입니다. 모든 여건이 좋기 때문에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말하기 힘들어도 기어코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이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인해 우리도 희망의 노래꾼이 되어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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