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성만찬

천국생활 2012. 10. 17. 07:56

눅22:14-20
시간이 되어서,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시니, 사도들도 그와 함께 앉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잔을 받아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이것을 받아서 함께 나누어 마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잔을 그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선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삶의 기운과 하늘의 위로가 오늘 이 예배에 나오신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 홍시와 예수

지난 화요일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길을 지나가는데 과일가게 선반에 놓인 빨간 연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3개에 2천원’ 그야말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생긴 홍시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예쁘게 생긴 홍시다, 하며 그냥 가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다시 과일가게로 가서 그 홍시를 샀습니다.

왜냐하면 홍시가 제게 말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는 한 여름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의 기운이 담겨 있어. 이 기운이 분명 너에게 힘을 줄꺼야.

나는 너에게 그 기운을 전하기 위해 여러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여기서 이렇게 너를 기다린거야.”

순간이었지만 선반 위에 홍시가 제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홍시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한여름 땡볕과 비바람 이겨내고 온전한 결실을 이룬 후 자신이 아닌 남의 유익을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말없이 생을 마감하는 홍시. 그 홍시는 저에게 문득 십자가의 예수님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이 홍시와 십자가의 예수는 무엇이 다를까?’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맛을 지닌 존재로 무르익었다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쪼개어 그 살과 피를 나누어주신 예수.

그 예수의 모습이 빨갛게 무르익어 과일가게 선반에 놓여 있던 홍시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아끼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주가 지났지만 오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성찬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 첫 번째 성찬식

첫 번째 성찬식의 모습이 성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 만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행해진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것은 유월절 명절 식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

 

유월절 식사. 그것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의 탈출을 기념하며 예루살렘에 모여 정해진 예법에 따라

의무적으로 하던 식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맛짜’라고 하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

포도주, 소금물에 찍어 먹는 야채, 쓴나물과 같이 단순하고 소박한 음식들을 다소 복잡한 절차에 따라 먹었습니다.

식사 중간 중간에 예식 집전자는 아이들에게 왜 이 예식을 행하는 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왜 이렇게 특별하게 먹고 마시는 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집전자가 되어 행해지던 유월절 식사는 그 빵과 포도주에 대한 설명이 여느 유월절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념하기 위함이라는 역사적인 설명을 빼시고 다소 엽기적이고 기괴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그리고 식후에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쉽게 말하면, 이는 내 살이요, 내 피다. 이를 먹고 마셔라, 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제자들은 살짝 의아해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기 전부터 연이어 세 번씩이나 ‘내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에게 잡혀 죽게 될 것이다’ 이야기 하시더니, 급기야 유월절 식사 예식까지 망쳐 놓으시는구나,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주시니까 받아먹기는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 후에 나오는 제자들의 자리다툼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 다음날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은 30냥에 팔리게 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 기억하라 해서 기억한다?

그런데 왜 그 이상했던 식사를 제자들은 잊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왜 교회는 2천년 동안 그 식사 자리를 재현하며 기념하는 것일까요?

단지, 예수님께서 “기억하라”, “기념하라” 명령하셨기 때문일까요?

기독교는 그 기괴한 식사를 거룩한 만찬이라 하여 성만찬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진정 그 식사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담겨 있으며,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직접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먹고 마신 것은 빵과 포도주였습니다.

나중에서야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들이 보아 온 예수님의 삶을 떠올리며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했던 사람들, 그들은 그 당시 세상 기준으로 보자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으며,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 어부였고 이스라엘의 세금을 모아다가 로마에 바치던 세리였고,

로마의 폭정과 썩어빠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지배 아래 신음하며 살던 민초들이었습니다.

비록 3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먼저 찾아가셨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셨으며, 당신의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귀한 존재임을,

 하나님의 자녀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꼭 필요한 빛과 소금과 같이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당신의 시간과 물질, 나아가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소위 고난주간이라고 알려진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그 후반부에 자리하고 있는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빵과 포도주를 주시며 뜬금없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는 내 살과 피니 이를 먹고 마셔라’는 말씀의 의미를 어느 순간 제자들은 확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어. 하나도 아끼지 않고 주셨어.

그래 그분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셨던 거야.’ 성만찬은 바로 이 고백 위에 존재합니다.

그 고백과 깨달음 때문에 그 유월절의 기괴했던 식사는 거룩한 식사가 되어 지난 2천년 동안 계속 된 것입니다.

엔도 슈샤쿠의 「사해 부근에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 속에 그려지는 예수의 모습은 복음서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의 모습과 좀 다릅니다.

아니 많이 다릅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은 거의 행하지 못합니다.

그저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밤새 기도할 뿐 그를 고치지 못하고 죽음을 막지도 못합니다.

무능력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향한 사랑은 무한하여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슬퍼합니다. 한 없이 사랑만 하며 살았던 예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를 받아 로마 총독 빌라도의 손에 넘겨집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법정에 끌려나온 예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대를 잊을 거네.” 예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은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한번 그 인생을 스쳐가면 그 사람은 나를 잊지 못하게 됩니다.”

빌라도는 묻습니다. “왜지?” 예수가 답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은 그것을 기억하라는 예수님의 명령 때문에 기억된 식사가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잊을 수 없어서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된 식사였습니다.


•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

몇 해 전 어느 식당에서 해물된장찌개를 먹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 배가 고팠던지 유난히 찌개가 맛있었습니다. 찌개 국물에 밥을 싹싹 비벼 먹었습니다.

국그릇에 작은 게 앞발이 하나 들어있었습니다. 젓가락을 이용해 살을 발라먹었습니다.

참 맛있었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다 속에는 게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데 그 게들이 이렇게 맛이 없다면,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미생물에게도 맛이 없다면, 그래서 아무도 그들을 먹지 않는다면 바다 속에는 게의 사체가 산처럼 쌓이겠구나.

모든 생명체마다 그렇게 된다면 바로 그날이 지구의 종말이겠구나.

정말이지 어떤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먹히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맛나게 먹혀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명을, 다른 이를 먹으려할 뿐 좀처럼 다른 이에게 먹히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라는 말은 저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구약 미가서에 나와 있습니다. 미가는 주전 8세기의 남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은 안팎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밖으로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유다마저 위협했고, 안에서는 정치ㆍ종교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극심해 민초들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었습니다. 미가서 3장 2절과 3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너희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주는 것이다, 했습니다. 유다는 부정의한 사회였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권력자들이 실제 민중들을 솥에 삶아 잡아먹지는 않았겠지요. 그 정도로 잔혹하게 수탈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산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내고, 가마솥에 삶듯이 일반 백성들의 땅과 집, 재산을 무자비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는 제아무리 하나님이 이끌어 오신 사회라해도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여 미가는 많은 위험과 위협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게 된 것이고 그의 예언대로 100여년 후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지위와 권력, 힘과 지식으로 다른 이들의 인간적 권리를 빼앗아 그들에게서 살아갈 맛을 앗아가는 것은 그를 잡아먹는 것과 크게 다른 일이 아님을 미가는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잔인한 행동이 쉽게 용인되는 사회는 결코 하나님께서 용인하지 않으심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생각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문정희 시인의 <우렁이 이야기>라는 시입니다.

새로 수염자리 돋아난 아들과 함께/ 오랜만에 TV을 끄고/ 마루에 누워서 별을 바라본다/
별보다는 아무래도 자동차의 불빛이/ 더 빛나 보이는 아들은 그만 지루해서
두 번이나 하품을 한다/ 나는 우렁이 얘기를 한다
"옛날에 옛날에 새끼 우렁이가/ 야곰야곰 어미 우렁이를 다 파먹어서
마침내 어미 우렁이는 껍데기만 남았더래. 그래서/
텅 빈 어미 우렁이가 냇물에 동동 떠내려가자
그것을 본 새끼 우렁이가/ '야, 우리 엄마 보트 놀이 한다'고 깔깔 웃더래."
아이는 재미나서 와락 달려들며/ "야, 어미 우렁이 파먹자"하고 간지럼을 먹이는데
문득 온몸을 비틀며/ 내가 파먹어 멀리 떠내려 가버린
내 어미 우렁이가 그리워/ 천 길 낭떠러지로 별이 떨어진다

콧날이 시큰해지고 맘이 울컥해지는 시입니다. 주름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이 슬프게 떠오릅니다. 내가 그 속을 파먹어 점점 껍데기만 남아가는 어머니의 얼굴. 내 지금의 삶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희생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는 시입니다.

사람은 먹혀야 사람입니다. 먹히지 않고 먹으려고만 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기꺼이 사랑으로 먹히려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가족애가 느껴지는 참으로 살만한 사회이지만, 서로 먹으려고만 들뿐 먹히려하지 않는 이가 많은 사회는 제아무리 성공과 번영을 부르짖는 사회라 해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회입니다.


• 먹으려고만 하지 말고 먹이라

이스라엘의 왕을 ‘멜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신들 중 인신제사를 받고 그 대가로 풍요를 약속해주던 신의 이름이 ‘몰렉’이었습니다. 곧 몰렉은 사람을 잡아먹는 신이었습니다. 멜렉과 몰렉 비슷하죠. 왕 멜렉은 언제든지 사람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괴물 몰렉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왕 멜렉의 자리는 욕심나는 자리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힘과 권력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자리, 한 인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선 왕 멜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본분을 망각할 때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신 몰렉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이들이 예수를 왕 멜렉의 자리에 세우려 했습니다. 유월절 만찬 자리를 마친 제자들 또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멜렉의 자리에 오를 것을 예상했고 그 멜렉 옆에 누가 설 것인가 하는 자리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힘과 권력, 사람들을 이용해 멜렉의 자리에 오르지 않으셨습니다. 멜렉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의 살과 피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너를 위해 기꺼이 나를 내어 줄 수 있는 그 마음이 참다운, 인간다운 마음임을,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모든 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음을, 그 길만이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식사는 사실 모든 것이 똑같다지요. 식탁, 음식, 숟가락까지. 그런데 그 숟가락이 사람의 팔 길이보다 길답니다.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그 긴 숟가락을 이용해 자기 혼자 어떻게든 먹어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도저히 먹을 수 없어 매일 파리해지고 신경질적이며 다투기 십상인데,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그 긴 숟가락을 이용해 자기 자신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건너편에 있는 다른 사람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어 서로 화기애애하고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산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찹니다. 가을의 찬바람을 맞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태일.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치며 노동자의 인권을 부르짖다 하나의 거룩한 불꽃으로 산화한 전태일.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다라고 불린 나이 어린 여공들이 밥도 먹지 못하고 야근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차비 30원으로 10원에 열 개하는 풀빵을 30개 사서 그 시다들에게 주고 자신은 동대문에서 쌍문동 집까지 자주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자신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두세 시간을 걸어가야 하면서도 어린 시다들이 풀빵을 먹으며 좋아하는 모습으로 행복했던 사람, 전태일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작년 늦은 가을 교회청년들과 전태일의 그 귀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그 길을 걸어보았습니다. 동대문 평화시장에서부터 쌍문동 전태일 집터까지, 약 12키로 3시간 거리를 10여명의 청년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전태일 풀빵길’로 부르기로 했고 올해 늦은 가을에 그 길을 다시 걷기로 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습니다. ‘전태일 사건이야말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예수적 사건이다.’

예수님을 닮은 홍시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잘 익었습니까? 누군가가 당신을 먹으려 할 때 기꺼이 그의 주린 배와 영혼을 위해 당신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내어놓고 있습니까? 홍시를 닮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먹으려고만 하지 말고 먹히며 살아라. 내가 너희를 먹여주었듯이, 너희도 그렇게 그렇게 먹히며, 다른 이를 먹이며 살아라. 그게 구원의 길이다.

추수감사절이 세 주 앞으로 성큼 다가왔습니다. 주님의 제단 앞에 홍시처럼 무르익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올려놓을 수 있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우리 삶의 열매를 기쁘고 기꺼운 마음으로 나누어 주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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