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식탁
눅5:27-32
[그 뒤에 예수께서 나가셔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많은 세리와 그 밖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그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먹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 그 운명의 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가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추석이 되어 고향을 찾아간 이들, 그리고 이맘때면
더욱 외로워지는 이들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연이어 들이닥친 태풍으로 인해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갔던
농부들의 가슴에도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데 모여 조상들을 기억하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고,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참 흐뭇합니다.
추석의 흥겨움을 생각하다가 문득 예수님의 식탁 교제에 참여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리였던 레위의 집에서 벌어진 잔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맥락부터 살펴야 합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 직전에 두 건의 치유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나병환자를 치유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지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그는 예수께 나아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눅5:12). 예수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게 하는 행위였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돌아가신 채희동 목사님은 예수를 '걸레'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더러움을 당신의 몸으로 씻어내셨다는 뜻에서 말입니다.
나병환자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예수의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떠메고 온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설교를 통해 해석한 적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사건의 놀라움은 당사자가 회개하거나 죄 사함을 간청하기도 전에
예수께서 용서를 선포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종교적 통념을 깨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행태는 유대 사회를 동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병자의 치유라는 가시적인 사건이었기에 사람들은 예수에게 매혹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상당한 혼란에 빠뜨린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서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 주인공은 마태라고도 알려진 레위입니다. 그는 갈릴리 호숫가 마을인 가버나움의 큰 길 가에 있던 세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헤롯 안티파스의 영내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물건들에 대해 세금을 받던 사람입니다. 일종의 관세입니다.
상인들은 갈릴리의 농부 혹은 어부들로부터 말린 생선이나 잉여 농산물을 사서 그것을 외부에 내다 팔고
갈릴리에 필요한 것들을 들여오는 일을 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세리는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바리새파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 의를 과시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비교의 대상으로 그가 언급하는 사람은 강도, 불의한 자, 간음하는 자인데,
세리는 그들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아주 나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낮에, 많은 이들이 보는 가운데, 아주 공공연하게 그를 '하나님 나라 운동'에 초대하셨습니다.
그 날은 레위에게 운명의 날이었습니다. 삶의 변곡점이라고 할까요?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고 말합니다만, 그런 단호한 선택의 이면에서 이루어진 내적 갈등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레위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 잊을 수 없는 잔치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는 레위를 지금까지 누리던 부유한 삶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가난한 삶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그는 안락한 삶을 버려야 합니다. 세관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동안 미뤄뒀던 세금 입찰액을
다 납부해야 합니다. 사회적 따돌림을 당하면서까지 꼭 붙들려고 했던 돈과 작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상황이 달라진다 해도 다시는 그 자리에 복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자기가 건너온 다리를 불태우는 것 같은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그 모든 것보다 자기를 한 인간으로 대하고, 그를 거룩한 삶의 길로 초대해 준
예수의 그 마음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질 때의 느낌을 알 수 없을 겁니다. 어느 신학자는 구원이란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레위가 예수를 따랐다고 할 때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미완료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그의 따름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실존의 겨울이 물러가고 새 봄이 왔습니다.
이제 그는 전혀 새로운 삶의 문지방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옛 삶과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일종의 의례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초대하는 조촐한 잔치가 아니라, 알 만한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는 큰 잔치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길을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공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면면이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그들을 세리와 그 밖의 사람들이라고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위가 세리였으니 세리 친구들을 초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 역시 유대 사회에서 그리 환영받거나 존경받지 못하는 인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직업상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었거나, 세속화되어서
그것을 지킬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을 수 있겠습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금업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같으면 그 자리가 편했을까요?
가시방석이 아니었을까요? 그 좁은 동네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사람들의 기피의 대상이 된 사람의 집에서
역시 기피의 대상인 사람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금세 퍼지지 않겠습니까?
저라면 그 자리가 불편해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표정도 어색하고, 위는 굳어지고, 언제 그 자리를 표 나지 않게 떠날까
생각하느라고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본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틀림없이 그들과 즐겁게 담소도 하고, 껄껄거리며 웃기도 하고,
음식과 포도주 맛에 감탄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주뼛거리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들의 어깨를 감싸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잔치 자리에서 사람들은 가식과 마음의 빗장을 풀고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잔치를 생각할 때마다 정일근의 시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떠오르곤 합니다.
시는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두레밥상이란 여럿이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눠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모난 밥상'은 사각형으로 된 밥상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는 현실의 은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남들과 경쟁하며 삽니다.
사다리의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우리는 일쑤 이웃들을 밟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한 마리 짐승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우리 마음도 날카로워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날마다 모난 밥상을 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두레밥상 앞에 둘러앉아, 어머니가 얹어주시는 음식을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이야말로 두레밥상이었습니다.
● 참 불쌍한 사람들
그 두레밥상에 모두가 기쁨으로 동참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제자들에게 따지듯 물었다고 전합니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물론 그들은 레위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에게 세리의 집은 거의 금기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제의적 정결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고 배제함으로써 자기의 도덕적,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실을 자각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의인과 죄인, 거룩함과 속됨을 가르는 일에 골몰하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문자에 집착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깊은 속뜻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온전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전문가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사실은 안다는 자부심 때문에
하나님의 현실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봄이 되어 꽃이 만발했는데도 그 황홀한 신비 앞에 서기보다는
식물도감을 들여다보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죄 지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보다는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내적인 힘을 부여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죄까지도 스스로 짊어지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의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한 사회에서 기피의 대상이 된 사람들까지도 그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바다라지요? 예수님도 그런 의미에서 바다가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도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시비를 알아차리셨습니다.
저 같으면 응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이 없음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듣건 말건 말씀을 건네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런 말을 한다고 그들이 '아이구, 그러십니까?' 수긍할까요? 하지만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들조차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들에게 깨우침의 기회를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받아들이거나 안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몫입니다.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다 하여 배제하는 것은 편협함입니다.
● 의사이신 주님과 만나라
세상이 온통 앓고 있습니다. 몸은 건강해도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이 폭력적일 때가 많습니다. 옳음이 겸손과 함께 가지 않으면 그 옳음은 자기와 남을 해치는
무기로 변합니다. 옳음이 따뜻함과 함께 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옳은 사람들이지만 무능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족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참 딱한 사람은 자기의 허물과 잘못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건강하다고 의롭다고 자부하면서도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일에는 무능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품은 언제나 크고, 또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닮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악한 사람에게나 햇빛과 비를 골고루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산을 넘고, 강을 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배신한 제자들을 용납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낙심한 제자들을 찾아가 디베랴 바닷가에
식탁을 차려놓고는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초대하셨습니다. 간청하지 않아도 고통 받는 사람을 덥석 부둥켜안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의사이신 주님 앞에 우리 마음을 내놓았습니까?
모난 밥상을 대하면서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마음을 그분 앞에 보여드렸습니까?
세상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진 우리 영혼을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까?
교회는 주님이 차려놓으신 두레밥상 앞에 함께 둘러앉을 때 형성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을 착하게 받아먹고, 우리 또한 세상에서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릴 때 우리는 생명의 세계와 접속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김준태 시인은 고향에서는 자빠져도 흙과 풀이 받아준다고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십니다.
그 품에 안기면 날카롭던 서슬이 부드러워지고, 남을 해치지 않고 품어 안을 수 있는 품이 됩니다.
그제야 우리는 누군가의 고향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적 과제입니다.
오늘 외로운 사람, 울고 있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은 고향이 되어줄 이들을 기다립니다.
두루 원만한 저 보름달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소망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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