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아가페

천국생활 2012. 10. 11. 10:24

아가페
고전11:17-22

[다음에 지시하려는 일에 대해서는 나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유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여러분이 교회에 모일 때에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 데,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때,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저녁을 먼저 먹음으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 한 식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계성찬주일인 오늘, 우리는 성찬상을 차려놓고 함께 모였습니다.

주님의 식탁에 참여한다는 것, 그것은 온 세계가 한 호흡과 한 모태에서 나온 동포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속에 숨을 불어넣어주심으로 우리를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모든 순간은 새로운 창조의 시간입니다. 삶이 은총이고 고마움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은 날카로워졌습니다.

 깨진 사기그릇과 같아서 자칫하면 상처를 입거나 입히기 일쑤입니다.

갈등과 폭력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북한의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경북 구미시 주민들은 불산 가스 누출로 인해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합니다.

세상의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습니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사고가 지배합니다.

그러다보니 인간관계는 점점 파편화되고, 마음 둘 곳이 없는 사람들이 거리를 떠돌고 있습니다.

외로움이 기본적인 삶의 정조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와 직접 만나 사귐을 유지할 자신이 없습니다.

상처만 주고받았던 기억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직접적인 대면이 일으키는 불쾌함을 피하기 위해

기계를 매개로 한 간접적인 만남에 집착합니다. 얼마 전부터 사람들은 ‘애니팡’이라는 게임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기계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지인들에게 ‘하트’를 보내 우정을 다지기도 합니다.

애니팡은 빠른 교세 확장을 통해 신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왠지 쓸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한 친교의 식탁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미움과 갈등으로 인해 관계가 버름해진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에베소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미움과 증오를 십자가로 소멸시키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까지도 덥석 부둥켜안으심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선의 가능성을 불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사람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한 집안 식구가 되는 세상입니다.

저는 가족이라는 단어보다는 식구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편입니다.

가족이라는 의례적인 단어는 혈연을 강조하기에 배타적인 느낌이 들지만,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식구라는 단어에는 묘한 정서적 울림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늘 넉넉한 이들은 이 단어가 주는 울림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굶주림을 경험한 이들은 밥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를 압니다.

시인 김지하는 하늘을 홀로 독점할 수 없는 것처럼 밥도 혼자 먹을 수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우리 문단에서 소설가 공선옥처럼 먹고 사는 문제를 처절하게 그려낸 작가도 드물겁니다.

그의 초기 글을 읽다보면 세상에 ‘밥’의 문제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이라는 책에 실은 글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들려줍니다.

열 살 때 선생님이 일기 검사를 하다가 그를 불렀답니다. “야, 공선옥 너는 어떻게 된 게 맨날 먹는 얘기뿐이냐, 인마.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라면 내가 이해를 한다. 저 하늘에 날아가는 새가 통통허니,

허벌나게 맛이 있겄구나, 저 새를 잡아다가 털을 뽑아서 꾸워 먹으면 얼마나 꼬수까.”

아이들은 웃었겠지만 참 처절한 현실입니다.



• 아가페와 에로스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한 초대 교회가 한 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사람들 사이에 드리워있던 장벽들을 철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한 식구로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함께 나누는 모임을 애찬 곧 ‘아가페'라 불렀습니다.

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어로 사랑을 뜻하는 단어는 에로스(eros)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는 연애의 신입니다. 그래서 에로스 하면 성애性愛를 먼저 상상하게 됩니다.

에로물이니 에로배우니 하는 말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에로스는 누구보다도 결핍감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항상 누군가를 갈망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자기 속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타자를 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랑이 늘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반해 아가페(agape)는 충만하게 흘러넘쳐 주변을 풍요롭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타자 중심적입니다. 인간적 사랑은 본질상 아가페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덕스러울 뿐만 아니라, 늘 결핍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만이 자신을 아낌없이 줄 수 있습니다.

또 아무리 내줘도 고갈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만든 폭력의 도구이지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식탁을 아가페라 함으로써

자기들의 나눔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기 원했던 것입니다.

충만하게 흘러 넘쳐 사람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자는 결의 그것이 바로 아가페였습니다.

아가페야말로 성찬의 원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행위이어야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아가페의 식탁에 동참하고 또 그 식탁을 차리겠다고 다짐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 분열, 주님의 만찬을 무효로 만듦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아름답던 아가페의 식탁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주님 안에서 한 식구임을 재확인하기 위해 음식을 나눴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공동 식사를 위해서는 형편이 좀 나은 이들의 헌신이 필요했습니다.

부자 교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해놓고 가난한 교인들이 올 때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제 때에 참석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시장기를 느낄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한 교인들과 함께 나누는 그 식탁의 기쁨을 기대하며 먼저 먹고 싶다는 욕구를 억눌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들의 인내심이 바닥났습니다.

어느 순간 한 사람이 말했겠지요. ‘먼저 먹지요. 나중에 오는 이들 몫을 남겨두면 되잖아요.’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꼭 나쁜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슬그머니 그 욕구에 굴복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가페를 훼손하는 행위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자각한 것은 그 식탁에 기여한 바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굴욕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친교의 식탁은 서로의 처지를 재확인하도록 만드는 차별의 식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가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은 이미 아가페가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20)

제 아무리 장엄한 음악과 의례로 치장한다 해도,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신다 해도,

서로에 대한 마음의 담을 허물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의 만찬과 무관한 것이 됩니다.

이웃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사라질 때 공동체의 결속이 느슨해집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해도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를 위해 구원의 상을 차려 놓으신 주님의 식탁에 초대받았습니다.

광야까지 따라온 이들을 기어코 먹여서 돌려보내고 싶어 하시던 예수님은

지금 먹을 것은 풍부하지만 나눠 먹는 일에는 미숙한 우리를 당신의 식탁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인해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증오가 녹아내리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외로운 사람, 고통 받는 사람, 희망을 잃은 이들을 위해 상을 차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평화로운 세상은 아가페가 회복될 때 비로소 다가올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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