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훈도와 편달

천국생활 2012. 10. 22. 11:14

훈도와 편달
디도1:10-16

[복종하지 아니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특히 할례를 받은 사람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고,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을 가르치면서, 가정들을 온통 뒤엎습니다. 크레타 사람 가운데서 예언자라 하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먹는 것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다” 하였습니다.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중히 책망하여, 그들의 믿음을 건전하게 하고, 유대 사람의 허망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더러운 사람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생각과 양심도 더러워졌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증하고 완고한 자들이어서, 전혀 선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편견에 도전하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의 본문은 디도가 수신자로 되어 있는 목회서신의 일부입니다.

그는 아주 중요한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3절에 보면 디도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고, 바울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간 적이 있습니다. 디도는 또한 고린도 교회와 바울 사이의 중재자로 활동했습니다. 오늘 서신에 의하면 디도는 지금 크레타에 머물고 있습니다. 크레타는 제게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더불어 떠오르는 그리스의 섬입니다. 바울이 그를 그곳에 머물도록 한 것은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딛1:5). 디모데전후서나 디도서는 감독이나 장로의 자격을 상당히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아야 하고, 쉽게 성을 내지 말아야 하고, 술이나 폭력 혹은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손님 대접도 잘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제력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영적인 리더십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디도서를 읽어나가다가 우리는 다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크레타 사람의 말이라면서 저자가 인용하는 말 때문입니다.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먹는 것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다”. 이것은 주전 6세기의 크레타 시인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살아가는 자기 동족들이 영 못마땅했나 봅니다. 그의 시 덕분에 크레타 사람들은 도매금에 거짓말쟁이가 되었습니다. 논리학에는 ‘Cretan paradox’ 즉 크레타인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에피메니데스의 말이 참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하지만 그도 크레타인이니 그의 말은 거짓입니다. 따라서 모든 크레타인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어느 게 맞는 것입니까? 돌고 도는 순환논법에 빠지는 것이지요.

디도서의 저자는 그의 말을 인용한 후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어쩌자고 성서 기자는 이런 인종차별적이고 지역 차별적인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냥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유럽인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금기시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에 대한 언급과, 동성애에 대한 언급, 그리고 종교에 대한 언급입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크레타인을 비하하는 말 자체가 폭력입니다.

하지만 디도서의 저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그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가슴에 수술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크레타인들의 삶은 참된 경건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크레타인 일반이 아니라 신앙의 길에 접어들었으나 어긋난 길로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인격의 변화, 지향의 변화, 삶의 변화가 없는 신앙은 일쑤 어긋난 길로 나가게 마련입니다.

 

 


가련한 사람들
디도서 기자는 그런 이들의 삶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그들은 복종하지 않으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사람들입니다. 복종하지 않는다는 말은 성도답게 훈련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훈련을 받지 못하면 제멋대로 살게 됩니다. 저는 복종보다는 순명이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순명’이라 할 때의 順은 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따른다는 뜻으로 새겨야 합니다. 명을 따르는 게 순명입니다. 그런데 순은 내 천川 자에 머리 혈頁 자가 결합된 말입니다. 머리를 자연스러운 흐름을 향하는 것이 순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머리를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머리를 어디에 두고 삽니까? 어떤 뜻을 좇으며 살고 있습니까? 순명하는 사람은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입니다. 순명의 사람이 말이 많지 않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순명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말이 많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선을 행하기 어렵습니다. 부질없는 말로 분란을 일으키기 일쑤입니다. 수군거리고 비방하고 불평하면서 공동체를 내적으로 붕괴시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근사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기의 평화운동을 ‘사티아그라하 satyāgraha’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사티아 satya란 ‘본질 혹은 진실’을 뜻하고 ‘그라하’는 ‘붙잡는 것’이라는 뜻입니다(마하트마 간디, <<힌두 스와라지>>, 강, 124쪽 참고). 본질 혹은 진실을 꼭 붙들면 거기서 힘이 나옵니다.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사티아그라하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리를 꼭 붙잡지 못한 사람일수록 헛된 말과 외적 행위에 집착합니다. 할례를 강조하고, 율법이나 허탄한 신화에 집착하고, 금욕주의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경건해 보입니다. 남과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 남에 대해 비평적 언어를 늘어놓고, 대놓고 사람들을 가르치려 합니다. 하지만 디도서의 저자는 그런 이들의 이면에 있는 동기가 부정한 이득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 평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경건을 사적인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문제는 자기 스스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그것처럼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중요한 사람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영혼에 독이 되기 일쑤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복어 먹는 사람을 그대 보았나(君看食魚者)
맛과 독을 통째로 배 속에 넣네(味毒俱人腹)
그 맛 아예 즐기지 않았더라면(旣不享其味)
그 독을 토해냄도 없었을 텐데(亦不吐其毒)”

생선 중에 복어처럼 맛있는 게 없다지요? 이 시에서 다산은 맛과 독을 붙여서 쓰고 있습니다(味毒). 내게 달콤함을 안겨주는 것이 때로는 독이 되는 법입니다. 사람들에게 근사하게 보이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 우리를 진실과 멀어지게 할 때가 많습니다. 성서는 바로 그 지점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엄중한 책망
바울은 디도에게 그런 이들을 엄중하게 책망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를 책망하는 일을 꺼릴 때가 많습니다. 물론 사사건건 화를 내고, 누군가의 행동에 간섭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사랑은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그런 신뢰와 사랑을 통해 성장합니다. 하지만 그가 아주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든지, 다른 이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끼친다면 공동체의 리더는 그를 준엄하게 꾸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교육은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시키는 훈도薰陶도 필요하지만 가끔 채찍으로 때리는 편달鞭撻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부둥켜안으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들의 허물과 연약함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셨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휘몰아가는 바람과 풍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남보다 자기를 조금이라도 돋보이게 하고 싶어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존 웨슬리는 신도들 가운데 신앙의 길로부터 멀어져 고의로 죄를 짓거나, 자기도 모르게 경박해지고 나태해진 사람들을 참회자반(penitents)으로 보내곤 했습니다. 목사건 장로건 집사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신앙의 本이 무엇이고 末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어느 순간 자기 폼을 잃어버리면 가장 기초적인 훈련을 반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슬럼프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꾸짖음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는 많지만 불신앙적인 삶을 준엄하게 꾸짖는 메시지는 듣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오면 위로의 말을 듣기 원합니다. 이해는 합니다. 현대인들은 아득바득 용을 쓰지 않으면 남에게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는 좀 편한 말을 듣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요즘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대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통 웰빙 타령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저마다 힐링을 말합니다. 달달한 말을 하고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들이 스타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 힐링이라는 말은 성경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고쳐주셨고 그들을 일상적인 관계 속으로 복귀시키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힐링이고 구원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유행 담론이 된 힐링이라는 말에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힐링이라는 말이 발설되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다 상처 입은 사람이 됩니다. 이전에는 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일도 상처로 적바림 하는 순간 갑자기 삶이 무겁고 힘겨워집니다. 인생이란 본래 힘들고 고단한 겁니다. 기가 막힌 일도 겪고, 모욕을 당할 때도 있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그걸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자기에게 품부된 일을 해내는 것이 용기이고 믿음입니다.

실상사에 계신 도법 스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더군요. 스님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자모慈母’가 아니라 ‘엄부嚴父’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엄마들은 자식 사랑이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자식이 겪어내야 할 일들을 다 대신 해결해 줍니다. 아이들의 숙제를 대신 해주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대학생의 학부모 가운데는 수강신청을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교수에게 성적 이의신청까지 하는 이들이 있다 합니다. 그게 정말 자식 사랑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실수도 하고, 실패도 경험해 가면서 성장합니다. 그 과정을 생략하고 나면 죽을 때까지 미성숙한 삶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한없는 따뜻함으로 안아주는 품도 필요하지만, 정신이 번쩍 나도록 꾸짖는 음성도 필요합니다.

매를 잘 맞을 줄 알아야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부당한 꾸지람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꾸짖음이 없는 사랑은 독이 될 때가 많습니다. 잘못된 길로 접어든 이들을 준엄하게 책망하는 것은 그를 건전한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믿는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값싼 위로나 은총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대가를 지불하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불이익을 감수해 보십시오. 그래야 비로소 내적인 힘이 생기고, 영적인 자유가 부여됩니다.


삶으로 말하는 사람들
진리의 길에서 멀어진 사람일수록 남의 허물을 잘 들추어냅니다.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더러운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더러운 법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이들은 모든 사람을 다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점점 무분별하게 되고, 헛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불의한 행실로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그들은 가증하고 완고하고 선에 무능력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정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가면을 쓰고 세상과 마주합니다. 자기에게 부여된 ‘노릇’을 하며 사는 겁니다. 하지만 그 가면을 벗으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좋은 신자인데 직장에서는 폭군인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경건한 데 바깥에서는 자기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더 많은 예를 들지는 않겠습니다. 말이 제 값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말하는 이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삶의 정도正道를 찾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오랜 방황의 세월을 보낸 끝에 그는 마침내 고명한 스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승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선생님, 부디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스승은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는 늘 스승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자기를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적절한 충고를 해주면서도 정작 제자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자 젊은이는 크게 실망하여 스승에게 항의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왜 제게는 가르침을 주지 않으십니까?” 스승은 측은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매 순간 내가 너를 가르쳐왔음을 모른단 말이냐? 네가 차 한 잔을 내오면 내가 마시지 않더냐? 네가 나에게 절하면 나도 너에게 절하지 않더냐? 네가 내 책상을 치우면 내가 아주 고맙다고 말하지 않더냐?”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에게 스승은 목청을 높여서 말했다. “보려면 똑바로 보거라.”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말로도 그를 깨우칠 수 없습니다
. 기독교인들에 대한 조롱이 넘치는 시대입니다. 어떤 말로도 우리가 진리임을 변증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제는 말을 줄이고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임을 삶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신발도 가지런히 벗어놔야 합니다. 음식도 깨끗이 먹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정성스럽게 대해야 합니다. 필요한 이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꾸짖을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삶이 먼저 가지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앉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깊어가는 이 가을에 우리 마음에 하늘의 고요가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진리를 증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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