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Q.T

성도여, 어려울때 십자가를 바라보라--죤 칼빈

천국생활 2010. 5. 14. 13:57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The Life of True Christian)

 


I.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아부인보다 더 어렵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더 높은 수준 즉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청하신

그 수준까지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의 택하심을 받고 성도의 회중 가운데 영접을 받은 모든 성도는 힘들고 어렵고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 찬 생활을 각오해야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연단하시는 것은 거룩한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는 먼저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시작하셨고, 모든 자녀들에게도 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항상 기뻐하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관대하고 부드럽게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는 지속적인 십자가였습니다.

사도는 예수님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말함으로써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고난을 피해야 합니까?


사실 주님의 복종은 우리에게 인내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겪으신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그를 닮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가야 할 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으로써 주님이 모든 악의 수렁을 피하여 하늘의 영광에

이르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같은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감당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게" 되면 "부활의 능력"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의 죽으심에 참예하는 것"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볍게 하는데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 말입니까!
우리가 역경으로 고난을 받을 수록,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더욱 확고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교제로 말미암아 역경 자체는 우리에게 복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크게 증진시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마16:24, 마3:17, 17:5, 히5:8, 롬8:29, 행14;22, 빌3:10)

 



II. 십자가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질 것을 강요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께 대한 복종을 증명하셔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려는 자연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과장된 생각을 가지며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우리는 당연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하게 만드는 온갖 어리석고 헛된 육적 확신에 빠져서

    마치 주님의 은혜가 없어도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와같은 허망함을 억제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극도로 연약함을 경험으로부터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모욕, 궁핍, 친척의 죽음, 질병, 또는 여러 가지

    참화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 밑에 파묻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된 우리들은 고난의 짐 아래서도 우리를 든든히 서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도움인

    주님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부르짖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2.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위대한 성도들조차,

    자신의 용맹과 담력에 대하여 과장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생의 환난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더 깊은 지식의 길로

    인도해 주셔야만 했습니다.
    이런 교만한 생각은 다윗의 말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번영이란 너무나 생각을 어리석게 만들고 감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그가 의존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는 결코 넘어질 수 없다는 망상 속에서

자신을 신뢰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다윗같이 위대한 선지자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두려워하며

   조심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번영 중에 있을 때에는 잘 견디고 인내하지만, 역경이 그들의 인내를 부수어 뜨리면,

   그들은 스스로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와같은 영적 질병의 증거들에 의해서 경고를 받은 경고 받은 신자들은

   생의 참담함 속에서 유익을 얻습니다.
   그들은 육체에 대한 어리석은 확신을 박탈당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도피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견고한 요새이신 하나님의 보호가 가까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111. 십자가는 복종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또다른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내를 훈련하시고 복종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주님이 주신 복종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감취어지고 쓸모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은혜를 이런 방법으로서 나타내시고 시험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 속에서 강직하고 견고한 은사를 밝히 나타낼 때, 하나님은 그들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사"라는 표현은 그의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거절하지

않는 사실로부터 그의 헌신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금이 용광로의 불로 연단을 받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환난으로 연단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따르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만일 모든 일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네카는 "하나님을 따르라"는 격언으로서 인내로 역경을 이겨나가도록 사람을 권하는 것이

고대의 관습이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런 말로 고대인들인이 암시한 것은 사람이 어린아이같은 겸손으로 징계를 받아드릴 때만이

하나님이 지워주는 멍에에 참으로 순복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만일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께 대한 복종을 보여주는 것이 합당하다면,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순종에 길들이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창22:1,2, 벧전1:7)



 IV. 십자가는 회개를 가져옵니다.

자비로우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미래의 약점을 예방하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허물을

고쳐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즉시 과거의 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그와같은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인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훨씬 더 좋은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그러므로 혹독한 고통 속에서라도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유익을 증진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파멸로 떨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세상의 정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생각은 우리를 또 다른 성경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히12:5,6)
우리가 아버지의 채찍임을 인정한다면 악행으로 강퍅케 된 절망적인 사람들을 반역적으로 닮기보다는

유순한 자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실패할 때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돌이키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파멸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12:8)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사랑을 보여주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큰 관심을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인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지극히 사악한 자들입니다.
성경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지적해 줍니다.
불신자는 불치의 사악함으로 오래 전부터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징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고귀하게 출생한 자녀와 같이 회개와 교정으로 유익을 얻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잠 3: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V.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철학자의 인내와 크리스천의 인내의 차이점을 간단히 증거하겠습니다.
극소수의 철학자들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높은 경지의 이해에 도달하였습니다.
심지어 그와같이 이해하는 사람들도 포기가 필요악이라는 것이라는 이유 외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소용이 없으니 순종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만일 우리가 필요성에 의해서만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그로부터 도피하자마자 복종을 중단할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빛, 즉

첫째 공의와 공평성이라는 관점에서,

둘째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인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권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이나 추방이나 투옥이나 책망이나 질병이나 가족의 죽음이나 그외에도 여러가지 참화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없이는 발생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언제나 공평하게 일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짓는 무수히 많은 죄는 지금까지 긍휼로 내리신 징계보다 훨씬 더 많은 징벌을 받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적 충동이 우리에게서 최선의 것들을 빼앗아가고 우리를 방탕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육체가 굴복되고 우리는 멍에에 길들여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불평이나 반역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필요성에 복종해야 한다는 철학자들의 냉혹한 말장난에 더 이상 귀를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불순종하는 것이 그릇되기 때문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생동감 있고

효력있는 호소를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인내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내로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유익하고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우시는 바로 그 행동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을 증진시키신다고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만일 역경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우리는 감사한 마음과 평화로운 마음으로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역경을 인내로 잘 감당하면 우리는 필요성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에 복종하는 셈이 됩니다.
이와같은 논의의 결론은 우리가 십자가를 더 많이 질수록 영적 기쁨이 더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에는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이 뒤따릅니다.
주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는 오직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한 마음에서만 솟아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안에 있는 이 마음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은 분명히 영적인 기쁨으로 조절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