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기목사-개혁주의

개혁주의 강론관

천국생활 2010. 3. 18. 11:31

성경본문 : 신명기 6:4~9, 사도행전 20:7~12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7).

 

 

예배순서 가운데는 ‘강론’ 혹은 ‘강도’, ‘설교’라고 하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1. 강론의 정의

 

한국 교회가 일본 교회의 영향을 받아서 한때는 설교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 설교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라는 말은 불교적인 영향을 받아서 생긴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 설법한다고 하니 기독교에서는 설교한다고 말한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또 대한 예수교장로회 헌법에는 강도라는 말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전국에 우리 한국 교회에서    oros라는 말을 ‘도’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에 ‘도를 강한다’고 해서 강도란 말이 생겨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헌법에서는 ‘강도한다’고 하고 또 강도하는 사람을 ‘강도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한다는 말은 발음이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인지 요사이는 강도한다는 말을 별로 잘 쓰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성경에는 강론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어 있습니다(신 6:7, 행 17;2, 18:4, 19:9, 20:7, 9, 24:25, 28:23 등).
이와 같이 설교는 한때 사용하였던 일본식 용어였고, 강도는 헌법적 용어이나 강론은 성경 용어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강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또 이 용어는 차츰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2. 강론의 목적

 

강론은 강론자가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대언하여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은혜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1) 말씀대언
강론은 하나님의 말씀(성경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고, 따라서 강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강론자는 선지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 아니하고 철학이나 과학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철학강연·과학강연이지 교회의 강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그 말하는 것이 신앙원리와 기독교 사상에 일치한다고 해도 성경을 해석하거나 성경을 인용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 아니하면 그것도 종교강연·신앙강연은 될지언정 기독교의 강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강론은 오직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2에서 바울 사도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강론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라”고 말합니다.


(2) 말씀을 깨닫도록
강론은 청중들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해야 합니다.  강의나 강연에서는 철학적 진리, 과학적 진리, 윤리적 진리 등을 설명할 수 있지만 강론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하늘나라의 진리를 말하여서 이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성경을 강론하여서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는 곧 진리자체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5:39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고 말씀하셨고, 또 요한복음 14:6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대언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곧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많은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께서 무죄하신 몸으로 나시기 위하여서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우리의 첫열매로 부활하셨다” “그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나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다.” 기타 하나님의 예정·구원·천국·영생 등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를 강론에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3) 은혜를 받도록
청중들로 하여금 은혜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도록 한다는 말은 감동을 받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이 감동을 받는다고 하는 요소 가운데에 신앙과 생활의 많은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도 예수 믿는 것도 감동하는 결과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감사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것도 다 감동하는 결과입니다.  또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변함없이 신앙과 봉사를 하게 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이와같이 강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서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도록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는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감사하면서 주 앞에 충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유능한 강론자는 “나에게 30분의 시간을 주면 내가 지옥의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놓겠다.”고 하였습니다.
강론은 이렇게 신령한 목적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한국에서 일부의 강론자들은 교회의 강단에서 정치강연을 하고 사회이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일부의 사람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흥분시키기 위하여서 사람의 체험을 중요시하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를 연발하여서 청중들로 하여금 할렐루야·아멘으로 호응하며 열광하게 하는 것은 강론의 본 뜻을 이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단 총회에서는 목사들이 강론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결정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3. 강론의 방법

 

(1) 성경 연구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원문과 번역판들도 비교 연구하여서 그 본 뜻을 분명히 파악해야 하겠습니다.  잘못 이해하고 부정확하게 인용하여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대언할 수가 없습니다.


(2) 원리대로
강론의 원리대로 해야 하겠습니다.  강론은 그 준비와 조직과 실천에 있어서 원리대로 해야 합니다.  원리를 무시하는 강론은 진리의 일관성이 없고 따라서 그 사상을 정리할 수 없습니다.  원리대로 해야 그 강론은 권위가 있고 내용이 충실하여서 사람들에게 감격을 줄 수 있습니다.


(3)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강론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잘 해석하고 조직을 잘하고 내용이 충실하다고 하여도 성령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면 강론할 때에 사람이 은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강론은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감동을 줄 수 있고, 은혜를 전할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 하반절에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곽안련 박사는 진정한 강론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성령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박형룡 박사는 “강론은 사람의 동작만이 아니라 하나님 동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기독교에는 강론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겨야 구원을 받는 것이니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들려주는 것이 강론이고 말씀을 듣는 것이 강론입니다.  그러므로 강론은 성실하게 말씀을 준비하고 대언해야 하고, 강론을 듣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 은혜가 되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강론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강론으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강론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너희가 …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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