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기목사-구약의 예수그리스도

에스라서에 숨어있는 그리스도

천국생활 2010. 2. 17. 15:20

1. 인도자 스룹바벨과 에스라
스룹바벨과 에스라같은 이러한 인도자들은 70년 동안이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원전 5세기와 6세기에 세번에 걸쳐서 돌아왔는데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인도하여 주셨기 때문에 아무 사고없이 평안하게 예루살렘까지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바벨론은 저 동쪽 유브라데 강 연안에 있는 도시인데 그곳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많은 사람이 군단을 이루어 돌아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막길인데다 노정은 멀고 연변에 있는 부족이나 국가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먼 여정을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에 평안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스룹바벨과 에스라가 바벨론 포로들을 인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의 종 마귀의 포로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것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많이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귀신에게서 구원하여 주셨고(막 16:9), 거라사 지방에서 쇠고랑을 차고 무덤 사이에 살면서 지나가던 사람을 괴롭히던 사람에게 들렸던 군대귀신을 쫓아내셨고(막 5:1-15),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귀신들렸던 아이를 고쳐 주시는(마 17:18)등 많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죄중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을 많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 탕자와 같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중에서 방황하였으나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습니까?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 있습니까?
우리가 한때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거절하여 죄 가운데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품안에서 아주 평안하고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내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원래 종교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돌아왔습니까? 우리는 그 돌아온 경로를 알아야 합니다. 그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길되시는 주님께서는 십자가 길을 만드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길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또 진리되시는 주님께서 진리대로, 원리대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진리가 없으면 결단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생명있게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사망인데 우리가 죽은 몸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되시고 진리되시고 생명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경유하여, 주님에 의하여,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기 주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라고 하신 말씀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중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2. 성전 건축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제일 먼저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건설한 것과 예수님과는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2장 19절과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육체를 가리키신 것이라고 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성전은 교회의 중심이고 부활은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다 있어도 부활이 없으면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은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로 만드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룻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시기 때문에 기독교를 죽어도 살고, 또 영원히 사는 생명의 종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기독교를 소망의 종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소망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고 하면 우리의 모든 신앙과 봉사는 다 헛된 것이 되고 말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고 하면 우리의 전도하는 것도 헛되고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고 우리의 소망도 헛되고 우리가 모든 사람들 중에서 더욱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고 하면 우리도 부활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부활하지 못한다고 하면 모든 것이 헛것이요. 모든 것이 절망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언제든지 소망으로, 모든것을 소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세상에 괴로움과 아픈 일이 많아도 얼마 동안만 참으십시다. 하늘나라의 영광과 부활의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 율법 해석
7장 10절과 11절에 보면 에스라는 율법의 학사겸 제사장으로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기를 결심하고 힘썼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려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마 5:17, 18)
에스라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친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가르치시고 완성하신 것과 잘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해석하지 하니하시고 율법의 참뜻을 바로 가르쳐 주시고 또 바로 성취하셨습니다. 안식일 문제, 천국 문제, 금식 문제, 구원 문제 등 모든 문제들을 다 유대인의 전통이나 문자에 메이지 아니하시고 그 본뜻, 근본 정신을 분명히 가르치시고 또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소중히 여기셔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시면서도 율법에 사로 잡히는 율법주의자가 되지 아니하시고 율법의 참뜻을 성취하시는 율법의 완성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율법의 참뜻인 복음의 원리를 잘 깨달아서 율법을 성취하고 복음을 완성하여서 기독교의 완성을 도모해야 하겠습니다. 율법을 성취하고 복음을 완성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에스라서에 깊이 숨어 있는 그리스도를 찾아보았습니다.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주님, 부활하시는 주님, 율법을 완성하시고 복음을 성취하시는 주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복음을 성취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께 감사드리고 봉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