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칼빈의 교회론

천국생활 2009. 9. 15. 15:04

칼빈의 교회론

 

 

칼빈이 장로교회의 창시자이다.  칼빈은 제네바시를 성시화하여 신정정치를 원했다. 하나님 말씀이 통치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교회가 교회답도록 하기위해 투쟁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오늘날 장로교는 분열에 분열을 더하여 형편없게 교회를 쪼게고도 회개하지 않고 있다.  칼빈 500주년을 맞이하여 칼빈의 교회론을 연구하면서 칼빈의 주요신앙사상을 담은 장로교회를 꿈꾸어 본다.

 

키프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등은 교회론에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이며,

그 중에서도 칼빈의 공헌은 지대하다.

칼빈은 교회에 관해 어머니와 몸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

또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였다. 이 이미지들은 칼빈의 교회론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칼빈은 우리가 무지하고 나태하기 때문에, 그 목표에까지 진전하기 위하여서는 외적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고려하여 그 도움들을 첨가하였다고 하였다.

물론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교회를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타락 때문에 창조 질서가 파괴되고 그래서 그 파괴된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교회를 세웠다.

 

칼빈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곧 교회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자들이 된 것이 틀림없다.  셋은 정직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셋의 후예들에게 계속되도록 세워졌다.

인간의 타락 이후 시작된 이 교회는 때로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듯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항상 지켜 보호해 주었다.  교회는 외적 현상이 계속 지속되는 것처럼 항상 보존되지는 않았지만 교회가 타락한 후 회개하면 다시 새롭게 창조되었고 회복되어 하나님을 기쁘게하며 복을 누리다가 다시 타락하면서 계속 반복되어왔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교회를 세웠다.

칼빈은 이 교회를 "어머니같은 교회"라고 부른다.

칼빈이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교회가 그 자체로 구원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말씀과 성례를 통해 구원하는데,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 것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 성경적인 표현은 칼빈의 교회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를 참된 그리스도의 몸인 불가시적 교회와 사악한 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가시적 교회로 구별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였고 분열을 정죄하고 있다.

 

 

 

교회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인한 분열은 정죄되어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구속활동을 하는 두 방편은 말씀과 성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면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러나 옛날의 카타리파나 노바티아누스파나 도나투스파 그리고 칼빈 당시의 재세례파는 교회의 일치를 방해했다.

마태복음 25:32의 말씀처럼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유한 사역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서 분리해 나가는 일은 그리스도를 찢는 일이어서 용납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양떼로부터 제외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한 머리 아래 한 몸으로 모으는 것을 제외하고는 희망할 안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로부터 찢어지지 않을 것이며 찢어질 수 없다.

노아로부터 계승된 교회는 불가분리의 매듭으로 결합되어 있다.

 

”칼빈은 삶의 순수성의 문제로 분리해 나가는 것도 잘못이지만 교리에 다소 불순성이 개입된다 하더라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더욱이 교리들에 있어서나 성례들의 집행에 있어서 어떤 잘못들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교회내의 교제로부터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참된 교리의 모든 조항들이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동질성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 있다는 것 등등은 같은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교리들 가운데 중심적인 것이 있고 주변적인 것이 있다. 그런 중심적인 것이 부정되면 참된 교회일 수가 없다. 그러나 “교회들 중에는 신앙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 논쟁이 되는 다른 것들이 있다.”

즉, 주변적인 것들이 있다.

칼빈은 빌립보서 3:15을 인용하고 나서 “이것은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불일치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의 자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지적해 주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환언하면 칼빈에게는 본질적인 교리들과 비본질적인 교리들에 대한 구별이 있다.

그리고 비본질적인 교리들이 다르다고 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면 칼빈이 교회가 분열하는 일이 있더라도 고수해야 할 본질적 교리라고 생각한 교리들은 어떤 것들인가? 칼빈은 고린도전서 3:11에 대한 강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반면에 전복되기를 금하는 근본적인 교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칼빈이 생각한 근본적인 교리는 기독론에 관계된 기본교리로 생각할 수 있다.

칼빈은 이런 근본적인 교리들 이외에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비본질적인 교리의 차이 문제보다는 교회의 일치 문제가 더 중요한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칼빈은 교직 제도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관대했다. 파니에(Jacques Pannier)가 지적한 것처럼 칼빈은 주교 뿐만 아니라 대주교도 인정하고 있으며, 칼빈이 비판한 것은 주교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직책을 오용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영국 교회의 대주교인 크랜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 교회의 일치를 논하는 자리라면 - “그것은 내게 대단히 중요하므로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가기를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칼빈이 생각한 교회 일치는 루터파, 츠빙글리파, 영국 국교회 등 기존한 교회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일종의 세계적 교회 연합체를 구성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재정은 안에서 녹일 것이 아니라 밖으로 사용해야한다.

 

 


칼빈은 교회 수입의 “적어도 절반”은 가난한 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칼빈이 “적어도”라는 표현을 쓴 것은 고대 교회에서는 재난 때문에 긴급한 구제가 필요한 때는 그 절반 이외에도 교회의 기물을 팔아서 구제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고대 교회의 아카키우스 감독은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성직자들을 모아 놓고 “우리 하나님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 때문에 잔이나 컵이 필요 없습니다” 하고 말하고 교회의 그릇들을 녹여 팔아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양식을 사 준 예를 들고 있으며, 또 암브로스가 교회의 거룩한 그릇들을 녹여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아리우스파에서 보고 비난했을 때 암브로스는 “교회가 금을 가진 것은 간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이어서 칼빈은 암브로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교회가 가진 것은 무엇이나 곤궁한 자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네바에서는 집사들이 구빈원 원장직을 맡았으며, 그들은 교회 헌금 외에도 사당국이 배정해 주는 예산, 벌금, 기부금, 자선을 위해 헌납된 물건을 판매한 대금 등의 수입원으로 구제 활동을 해 나갔다.

 

 

 

 

교회의 권위는 성경을 우선으로 할때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제도가 필요하며, 제도를 질서 있게 유지하기 위해 권위가 필요하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제4권, 제8장에서 제12장까지 교회의 권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권위는 독자적인 권위가 아니라 성경에 의존한 권위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며, 말하자면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성경말씀보다도 “교회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성경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개혁의 대상이다. 교회가 주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선포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칼빈은 말한다. 여기서 칼빈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권한은 건설하기 위한 것이지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교직자들에게 교회의 권한이 위임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역에 주어진 것이다.

환언하면 그들에게 맡겨진 말씀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교직자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라고 할 수 있다.

교회 회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회의는 독자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척도에 따라 검토해서

성경에 부합할 때만 권위를 인정받을수있는 것이다. 목소리 큰자가 권위를 행사한다고 따를수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판단의 중심에 두며 총회들과 교부들은 말씀의 규범에 일치할 때에 확실한 권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교회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쟁점이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위에 둠으로써 성경적 근거에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칼빈은 성경의 권위를 최 우위에 두었으며 감독이나 지방 교회 회의나 세계 교회 회의의 결정은 성경에 일치할 때만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인정했다.

 

 

칼빈은 교회론에 있어서 큰 공헌을 하였다.

루터가 거짓된 교회를 허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면 칼빈은 종교 개혁의 제2세대로서 참된 교회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의 교회론은 지금도 타당하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고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 칼빈의 가르침은 칼빈 당시보다 현재 더 타당성이 있다. 교회 일치는 세계 교회에도 필요하지만, 특히 분열이 많고 그로 인해 지탄받는 한국 교회, 그 중에서도 장로 교회는 칼빈의 장로교 창시목적과 그 가르침을 숙고해 보아야 할 때이다.

교회의 숫자를 늘려주셨지만 교회가 분열되고 불소통되고 사회에 어둠의 악영향을 주어 사회가 타락하고 분열되어 가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구제 활동을 강조한 가르침은 복지에 대한 수요가 어느 때보다 강한 오늘날에 꼭 필요한 가르침이 되었다. 교회를 대형화시켜주셨지만 돈은 교회안에서 다 녹아버리고 구제하며 베풀지 아니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교회의 권위는 이러한 일을 성경의 말씀에 지시한데로 행할때 주어지는 영적인 것이다.

인격도 없고 세상적이고 육적인 사람이 세상의 명예와 돈으로 장로가 되고, 목사는 자기를 높이기 위하여 모세라고 자칭하고 영적인 아버지라고 말한다고 해서 권위를 인정 받을수없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 처럼 되기를 가르치고 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확언하신 방법은 천국시민의 삶을 성경전체의 것을 요약한 것으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권위를 주님의 방법으로 세워야 하고 신앙과 도덕성을 높이기 위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로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때에 한국교회 총회이하 모든 교회는 금식하며 회개를 선포해야 하며, 칼빈 처럼 각 지역의 성시화를 위하여 교회가 일어나 문을 열고 열린마음으로 통합하고 교회의 부를 나누고 사랑을 전하고 빛을 발하여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