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안에 거하려면---토저

천국생활 2009. 9. 14. 13:44

2.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안에 거하려면?

 

 

아담의 타락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은밀한 방에서 떠나신 것이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은밀한 방으로 다시 들어오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중심에 오셔서 홀로 거하시며 거룩한 도덕성의 광채를 발하기를 원하신다.

이곳은 극도로 내밀하여 다른 어떤 피조물도 침입할수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곳으로 들어오실 자격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처소는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삶의 다양한 부문들 사이에 있는 높은 담을 허물고 그것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하나님께 봉헌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봉헌이다.

참종교의 본질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만이 참그리스도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거룩한 것을 세속화함으로써 해악을 끼친다.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세상이 사고방식을 따르고 세상의 행동양식을 모방함으로써

영광의 빛을 어둡게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3가지의 상처를 구해야 한다.

회개의 상처, 긍휼의 상처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를 구하라

회개는 상처를 받는 것이다. 긍휼의 상처를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당한다.

상처받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거룩함과 유용성을 거부하고 단지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육신적인 사람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열매맺는 것은 체험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이 죄와 허물로 가득한 존재임을 깊이 깨달아 상처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세상과 슬픈 교회의 현실때문에 상처를 받고, 우리로 하여금 완전함을 향해 달음질하도록 채찍질하는 거룩한 갈망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있다.

그것이 충만한 임재체험이며 그것을 구하라. 행복보다 거룩함에 더 관심을 가지라.

 

그리고 우리의 몽당연필로 하나님의 청사진을 지워비리지 말라.

시내산에서 보여주신 성막에 대한 본을 바꿀 수 있는가 ?

결코 그럴수없다.

옛십자가를 전하자

그러면 옛날 2천년 전 주님의 능력이 지금 다시 나타날 것이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한다. 신앙과 윤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옛십자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수정하지 않으며 봐주지도 않는다.

새 십자가는 세상의 친한 친구가 되게한다.

자기를 기쁘게하는 삶을 살게한다.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품위있게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좋은 동기에서 했지만 그 순수한 동기의 결과는 안타깝게도 복음의 왜곡이다.

거짓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은 세상의 길과 나란히 갈수없다.

죄를 버리고 자기자신을 버리게 해야 한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생명과 능력의 진리를 전하고 주었다.

 이런 능력의 유산인 진리를 가지고 장난칠수있는가?

 

깊은 고독속에서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소중한 분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며 그분이 우리 인생의 최고선이심을 배우게 된다.

오늘날 위대함과 명성이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교회에서 이기기 때문에 교회는 가장 깨끗한 성도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순수한 공동체라면 교회에서 가장 순수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가장 인정받고 존경받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모두가 고독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에게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으셨다.

냉정히 말해서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없는 법이다.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이 세상에 매우 잘 적응하여 편히 산다는 것이다.

순례자적 특징을 잃어버렸다.

 

성도의 교통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실체없는 시적 은유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셨다.

계속 자유을 누리려면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된다.

힘든다고 옳은 방법을 버리고 편한 방법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유의 오용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