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 거하는 인생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거하려면 정직히 생각하고 어떤 결과를 당하더라도 옳다고 여기는 것을 즉시 행동에 옮겨라. 이렇게 하려면 십자가를 지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에 대해 죽어야 하며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 간사하지 않은 마음은 보물처럼 중요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영원한 것에 인생을 투자해야 한다. 천국이 땅보다 중요하고 영원이 시간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야 한다.
죄는 오늘만 보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내일까지 내다본다. 그러나 내년을 보지 못한다. 영원은 더욱 보지못한다.
악과 타협하는 짓을 중단해야한다. 윤리적 입장을 제대로 세우고 이 사회에 대하여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사람들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지적인 존재이지만 그것을 유지할 만큼 도덕적 지혜는 없다.
중요하게 여길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지혜로우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만 결국 남는 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는 실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생에 이르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는 죄는 하나님의 임재 밖으로 우리를 쫓아낸다.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긍휼히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수없다. 따라서
인간의 죄와 고통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전가시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참회에 해당하는 행동이라고 왜곡하게 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불화할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있다. 전도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이 현대기독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정반대가 진리이다. 언제나 사람편이냐 하나님 편에 서랴고 구별되이 행해야 한다. 행복보다 진리를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얼마든지 행복한 시간을 보낼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와 행복을 모두 갖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나는 진리를 택하겠다.
세상을 향해 당당히 NO라고 말해야할 문제가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 정죄되는 잘못된 가치관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 모세는 바로와 화목할수없는 것이다. 엘리야는 이세벨과 화목할수없는 것이다. 한번 태어난 자는 두번 태어난 자를 대적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임재에 거하려면 신앙의 권태에서 나와야 한다. 오늘날 타락한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막대사탕 작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이 잘못된 현상 때문에 피해를 보면서도 그것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교훈이 아니라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제는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경배하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성경적이지 않은 온갖방법을 시도하나 미성숙한 성도들에게 오락거리만
제공하고 하니님께 더욱 싫증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과 너무나 비슷하게 살게 만든다.
교회가 세상의 악세사리가 되도록 경박해졌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붙잡아야 한다. 믿음을 믿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영접할수있다고 믿는 새로운 그리스도인 세대가 탄생했다. 인간의 영적부패성을 충분히 지적하는 설교는 많지 않다. 참회개가 없는 이유는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죄의 심각성을 충분히 다루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상을 제거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우상에서 벗어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너무 적다. 자기기만과 기도가 도피처 처럼 되어있다.
반쯤 죽은 삶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참된 신앙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킬 것을 요구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처음 믿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교훈에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요청한다.
참신앙은 영적 도덕적 변화를 일으키며 정확한 내적증거를 갖게 한다. 신앙의 본질은 의지이며 의의 본질도 의지이다.
2.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안에 거하는 인생
아담의 타락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은밀한 방에서 떠나신 것이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은밀한 방으로 다시 들어오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중심에 오셔서 홀로 거하시며 거룩한 도덕성의 광채를 발하기를 원하신다.
이곳은 극도로 내밀하여 다른 어떤 피조물도 침입할수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곳으로 들어오실 자격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처소는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삶의 다양한 부문들 사이에 있는 높은 담을 허물고 그것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하나님께 봉헌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봉헌이었다.
참종교의 본질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만이 참그리스도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거룩한 것을 세속화함으로써 해악을 끼친다.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세상이 사고방식을 따르고 세상의 행동양식을 모방함으로써 영광의 빛을 어둡게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3가지의 상처를 구해야 한다.
회개의 상처, 긍휼의 상처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를 구하라
회개는 상처를 받는 것이다. 긍휼의 상처를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당한다.
상처받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거룩함과 유용성을 거부하고 단지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육신적인 사람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열매맺는 것은 체험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이 죄와 허물로 가득한 존재임을 깊이 깨달아 상처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세상과 슬픈 교회의 현실때문에 상처를 받고, 우리로 하여금 완전함을 향해 달음질하도록 채찍질하는 거룩한 갈망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있다.
그것이 충만한 임재체험이며 그것을 구하라. 행복보다 거룩함에 더 관심을 가지라.
그리고 우리의 몽당연필로 하나님의 청사진을 지워비리지 말라. 시내산에서 보여주신 성막에 대한 본을 바꿀 수 있는가 ? 결코 그럴수없다. 옛십자가를 전하자 그러면 옛날 2천년 전 주님의 능력이 지금 다시 나타날 것이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한다. 신앙과 윤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옛십자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수정하지 않으며 봐주지도 않는다.
새 십자가는 세상의 친한 친구가 되게한다. 자기를 기쁘게하는 삶을 살게한다.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품위있게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좋은 동기에서 했지만 그 순수한 동기의 결과는 안타깝게도 복음의 왜곡이다. 거짓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은 세상의 길과 나란히 갈수없다.
죄를 버리고 자기자신을 버리게 해야 한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생명과 능력의 진리를 전하고 주었다. 이런 능력의 유산인 진리를 가지고 장난칠수있는가?
깊은 고독속에서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소중한 분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며 그분이 우리 인생의 최고선이심을 배우게 된다. 위대함과 명성이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교회에서 이기기 때문에 교회는 가장 깨끗한 성도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순수한 공동체라면 교회에서 가장 순수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가장 인정받고 존경받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모두가 고독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에게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으셨다.
냉정히 말해서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없는 법이다.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이 세상에 매우 잘 적응하여 편히 산다는 것이다. 순례자적 특징을 잃어버렸다.
성도의 교통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실체없는 시적 은유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셨다.
계속 자유을 누리려면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된다. 힘들지만 옳은 방법을 버리고 편한 방법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유의 오용인 셈이다.
3.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안에 벌이는 영적 전투
모든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수있다. 따라서 그 원함이 매우 강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당신의 삶의 허술한 부분들을 바로잡아라. 십일조를 드리라 가정기도회를 시작하라. 빚진 것이 있다면 최대한 갚아라.
당장 갚을 수 없는 상황일 경우 채권자와 솔직히 터놓고 말한 다음 약속하라. 무엇이든지 잘못이 있다면 바로 잡아라.
교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통찰하고 교회를 의의 길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할때 애태우지 말라.
애태움은 초조와 짜증과 안달만 줄뿐이다.
짜증과 분노가 생기게 하는 다음으로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자기 자랑이다. 자기비하도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른 것들은 자아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도 겪어야 한다. 거부당하고 포기하고 격리되고 추방당해야 한다.
자아가 판단받지 않고도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는다면 승리는 불가능하다.
세상의 칭찬을 듣고도 신앙적으로 해를 입지 않을 만큼 성숙한 신앙인은 그리 많지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부르신다. 이도 저도 아닌 진공같은 상태는 존재할 수없다. 세상이 우리의 정체를 파악할수없는 에매한 회색지대는 없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그 무엇이든 높아지는 것이고 멀어지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족한 그리스도로 만드는 사람들은 멀어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도움을 바라지만 간섭은 원치 아니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도덕적 연약함의 원인중 하나는 불충분한 기독론이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데도 자만에 빠진다면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교회의 수치이다.
영적 성장을 위해
굳게 결심하고 의지적 결단을 하고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 답지 못한 모든 습관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셔야 한다. 마음을 열고 성령님 충만케 하시도록 초청해야 한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해야 한다.
믿음의 지식보다 더 순수한 지식이 있다. 바로 직접적 영적 체험을 통해 알수있는 것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직접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이것을 체험한 사람은 이 지식을 의심할수없다.
그렇지 아니하면 인간중심이 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세일즈맨과 같은 기술을 사용하는 분으로 여긴다.
종교적 낭만주의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결국에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만든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회개 겸손 믿음 그리고 순종이 있어야 한다.
구원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고 의지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며 자신의 임재를 끊임없이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영적체험중 어떤 교리나 종교적 현상이 나타날때 이것이 나에게 어떤결과를 가져왔는가를 묻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것이 위로부터 왔는지 아래에서 왔는지 건전성으로 확인할수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무엇이나 인간의 육신이나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 중 많은 것들은 그리스도없는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많다.
우리는 자기가 사도들보다 지혜롭고 초대교회의 순교자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성경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내게 더 많이 주고 있는가 진단을 해보라. 죄를 더욱 미워하고 거룩함을 더욱 사모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라.
4. 하나님의 복된 임재를 체험하는 자의 승리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의인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리시고 살아있는 성도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영화롭게 만드실 것이다. 그분은 이 구원받은 사람들을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데려가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기 위해 그분의 신부와 함께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얻을 수있는 보물은 없다. 하나님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해 드리면 하나님은 그 자리를 이용하여 그들을 돕고 사랑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주신다. 계명을 소홀히 한다면 응답받을수가 없다. 정원을 돌보지 않고 내 버려두면 잡초가 무성해지듯이 적극적으로 진리를 찾앙 받아들이고 오류를 찾아내어 제거하는 일을 게을리 한 사람의 마음은 금방 '신학적 광야'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협상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세상을 닮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주제로 이스라엘과 공개토론회를 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 신사적인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차이점을 없애려고 타협하지 않았다. 루터가 좀더 넓은 그리스도인의 교제란 명목으로 교황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진리와 의를 희생하면서까지 화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교리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않다. 건전치 못한 교리에서 건전한 인격이 나올수없다. 진리에서 벗어난 신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도들은 순수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싸웠다.
현대 목회자들은 성경 과학 인간의 정서를 혼합하여 우유처럼 뿌연 사상을 만들어냈다.
성경을 제대로 배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사랑만큼이나 거룩하며
하나님의 진노와 그분의 사랑이 서로 양립할수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의 성경해석을 무시하고 입맛대로 말씀을 고치는 해괴한 짓을 자행하고 있다.
멋대로 수정하고 삭제하고 편집하고 다른 것을 첨가하고 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닳고 닳아 소박한 맛이 없다.
주님의 다시오심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몇명이나 되는가?
어린애 같은 사람들, 순결한 사람들, 그리고 소박한 사람들만이 치유해주고 깨끗케하고 통합시켜주는 인내를 요구하는 종말론적 소망을 가질수있다.
기독교 신앙은 버튼만 누르면 재빨리 서비스가 제공되는 편리한 종교가 아니다.
세계적인 대재앙이 일어나 사람들의 거짓 신앙을 깨뜨리고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돌려 놓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영광스런 소망을 되살릴수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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