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장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최홍준 목사

천국생활 2009. 12. 18. 14:56

최목사는 장로 사역의 해답으로 목양장로 사역을 제안하고 있다.

제자훈련으로 성장한 교회의 리더인 장로를 동력화시키는 최고의 사역은

바로 목양장로 사역이라고 단언하고있다.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성교회의 체질을 바꾸고 그렇게 바뀌고 부흥한 토양위에서 목양장로 사역으로 장로를 동력화시켜 또 한 번의 성장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현장인 호산나 교회를 소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목양장로 사역의 전제조건은 철저한 제자훈련이라는 것이다.

제자훈련이 없는 상태에서 실시하는 목양장로 사역은 기본이 없는 것이고 기초 없는 건물처럼 위험하다고 한다. 장로의 본질이 회복되어 성도가 행복하고 목사와 장로가 행복하고 나아가 교회가 행복한 모델을 목양장로제도의 성공에서 찾았다고 한다.

 

"나는 목양장로 사역을 통해 교회의 미래를 보았다. 성도를 돌보고 섬기는 것이 장로의 참된 본직임을 깨달은 장로들로 인해 교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똑똑히 목도하였다".----p145

 

교회는 목회자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고 쓰러지는 곳이 아니다. 목호자와 같은 심정으로 성도를 목양하고 교회를 섬기는 많은 목양장로들이 있는 교회이기에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곳으로 건강하게 세워질 것이다라고 미래의 호산나 교회까지 예측하고 있다.

 

 

장로의 본질은 목양이다.


오늘날 장로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장로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기보다 오히려 성경적인 장로상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한 목사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한다.

성경은 장로에 대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지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구약

구약에서 장로는 출애굽기 3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출애굽시대의 장로들은 모세의 협력자로서 재판과 예배에 관련해 협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사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신앙적으로 이끌고, 지도력을 가지고 지방을 통솔하는 방백과 협력했으며 백성을 대표했습니다. 또한 왕들에 의해 통치되던 시대에는 장로들이 예배와 신앙,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왕의 자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기 전 시대의 장로는 제사장들과 함께 백성들의 신앙을 위해 애썼으며, 포로가 되었을 때에는 선지자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어 회당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민수기 11장 16-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로들을 세워 백성의 짐을 담당하게 하라’고 명하시면서 지도자의 자질이 될 만한 자 70명을 선발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을 장로들에게도 똑같이 임하게 하여 백성들의 짐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짐을 담당하는 것, 곧 백성을 돌보는 일이 바로 목양입니다. 이것이 장로의 직무요 본질이라고 구약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세에게 임한 영을 장로들에게도 똑같이 주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 목양을 감당케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로들을 모세의 목양 동역자로 세우신 것을 뜻합니다.

 

 

신약

신약에서의 장로는 일반적으로 유대적 개념의 장로와 비슷했습니다. 비교적 많은 경험과 학식을 지니고 있으며 신앙심이 깊어 인격적으로도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고, 백성들을 지도하고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장로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 보면, 장로는 교회의 대표자로 하나님 앞에서 교인의 고통을 짊어지는 거룩한 직무를 감당하며 병 치료와 위로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장로는 이와 같이 성도의 고통에 깊이 관여하여 그들의 시름을 덜어 주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목회의 일을 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는 장로, 감독, 목사가 동일한 직분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30절 말씀도 장로의 사명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으로 내가 떠난 후에 교회의 재정 관리를 잘해서 교회 행정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거나, “장로로서의 리더십과 권위를 위해 여러 장치를 교회에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교회의 온 양떼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그들의 막중한 사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곧 목양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바울은 목양을 위해서는 장로들이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양들에게는 이리가 제일 문제입니다. 아무리 목양을 잘하여 살진 양들을 우리에 가득 채워 놓아도 이리의 노략질을 막아내지 못하면 목양은 헛일이 됩니다. 이리의 노략질은 바로 성도를 농락하는 사탄의 공격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나운 이리가 교회 내부에서도 일어나 교회의 양떼들을 속이고 당을 만들어 결국 분열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교회 내부의 이리에 대해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장로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삼가지 않는 장로들이 교회 안에서 이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한 것입니다.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지체가 평등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교회는 교회안에서 계급의식을 가져왔다. 목사와 장로의 권위주의 속에서 그 계급의식은 정당화되어

왔다. 성경 어디에도 교회내에 계급 혹은 서열이 있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칼빈의 견해

 

장로는 신자들로부터 선출된 자로서 장로의 임무는 성도를 다스리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맡은 일을 치리하고  목사와 더불어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고 치리하는 것이다.

 

 

호산나 교회의 정관은 시무장로의 임기는 7년이다.

7년 임기가 끝나면 사역장로라는 칭호가 붙으며 65세까지 목양만 전념하게 된다.

65세가 넘으면 은퇴장로로 물러나게 된다. 장로는 시무행정장로와 시무목양장로로 구분한다

시무행정 장로는 20명으로 제한하며 행정과 목양을 하며 시무목양장로는 목양에 전념한다.

 

 

 

서평

 

본인은 장로 시무하다가 은퇴한 장로로서 흐뭇함을 느낀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장로들의 인식과 목사들의 평신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왔는지를 확실하게 알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를 선배장로들에게서 보아왔고 구역질이 난 것이 사실이다.

마치 회사의 임원회의에 참석한 착각을 가지기도 했다.

특송을 부르기 위하여 앞에서 도열할때도 서열대로 선다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왔다 갔다하는 것을 보아왔고 은퇴하기전에는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아도 아직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목사의 인식도 장로 권사 등을 대단한 축복으로 가문의 영광으로 말하여 왔으므로

모두가 장로 권사가 못되어 안달이고 선거 운동까지 한다.

장로 권사가 되지 못한 사람은 교회를 옮기기도 하고 지독한 시험에 들기도 한다.

극 소수 인원이 장기간 특권을 누리므로 더욱 그러하였던 것같다.

특권의식이 노골적으로 대화속에 나타나며 장로들에게 잘못보이면

아무런 일도 주지 않는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해도 2년 신학한 사람보다

무시당하기도 한다. 장로가 신학을 졸업해도 목양하는 일을 주지 않고 행정만 하게하여

최목사의 글과 같이 교회내의 고학력 실업자로 만들어 버린다.

고령화된 오랜 교회는 활기를 잃어버리고 변화를 시도해도 좀처럼 먹히지 않는다.

목사들도 평신도라고 하여 낮추어 보고 신학강단등에서 무식한 장로들만 예를 들어

가르치는 것도 문제가 있고 동역자로 인식하지 아니하는 것도 고쳐져야 한다.

 

호산나 교회의 행정장로  목양장로 시스템은 정말 모범적이다.

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을 충성스럽게 섬기게 하고 그 사람들이

장로직분을 가지고 7년동안 더 열심히 선한 일을 하다가 65세까지 목양장로로서

일하게한 제도는 현대 감각에 맞고 성도들을 깨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교회가 활기찰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교회가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가 된다는 것에 만족할수 있겠다.

사랑의 공동체가 될수있겠다.  계급의식을 가지고 불평등한 교우관계라면 사랑이

생길수가 없다. 권위로 솥뚜껑으로 자라잡듯이 하는 장로들이 있는한

교회에 사랑이 자랄수없고 부흥할수도 없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자하지만

목양 장로 목양제도가 자리잡히고 많은 헌신된 목양장로들이

세워지지 않고는 어머니 같은 교회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의 견해와 다른 먼곳에 와있는

장로교회의 장로들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