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장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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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사랑은 누구나 그저 달콤하고 신비하며 그리고 하기쉬운일로 생각하기가 일쑤다. 그러나 실상은 사랑하는이의 입장에서 볼때 희생이라고 이름 붙이는게 오히려 좋은 일일게다. 돌아온 나쁜 자식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랑이 그렇고,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불평 분노하는 큰 아들을 이해하고 화내지 않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렇다.
만민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러했다.. 이 말씀을 해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를 얼마나 원하고 계시며 그리고 얼마나 신속히 사하시는지를 육신의 훌륭한 아버지로 비유하셨다. 그런데 다른것은 육신의 아버지는 회개의 마음을 주지는 않는다. 땅의 아버지는 하나님처럼 돌같은 마음을 새롭게, 아들의 패역한 마음을 성령의 신비한 역사로 새롭게 할 수가 없다.
큰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비방하는 자들이 어떻게 심술궂고 비뚤어지게 행동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아들의 행위는 배은이 섞여있으며 부양의 의무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재산을 분산시키고 축내고 있다. 방종과 난봉으로 재산을 낭비했다. 이는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이 자유이고 참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교훈하고 있는 현실얘기이다. 신중성이 결핍되고 전혀 절제를 못하고 있다. 그가 실패한것은 교만에 대한 공평한 심판이다. 배를 채우고자 하나 아무도 동정을 하지 않았다. 배고픔이 최상의 스승이 될수있다. 어떤 불행으로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회개하게만 된다면 이 고통은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아무도 알아주지않고 누추한 거지가된 자녀를 말도 꺼내기 전에 그를 껴안아 주신다.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자 출발하는 순간에 그를 기꺼이 만나주신다. 세상의 아버지가 할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하신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과 같은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시면서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를 사랑합니다 하는 말은 자기는 그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것이어야 하는 것으로 그런 결의와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사랑이랄 수 없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사랑과 용서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며 율법과 선지자의 대지며 그리스도의 심장이다. 신자에게서 사랑이 식어지면 심장의 고동이 멈춤과 같다. 참 사랑은 그 대상을 꽉 주먹 속에 움켜 쥔 소유물로 생각하여 자유를 뺏는 따위의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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