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 교리와 분리되고 연합이 진리를 거부한다면
- John C. Whitcomb Jr. -
신복음주의자(neo-evangelical) 지도자들은 "우리들의 주요 목표는 '교리적 차이를 제거하고, 믿는이 임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연합(unity)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늘날의 에큐메니칼 복음주의 철학의 기본 개념 중에 하나는 사랑이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사랑은 하나를 만드는 반면에 교리는 나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신약성경에서 사랑이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사실인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 장(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지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이 남아 있으되, 이 중에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어떤 이는 "이 구절이 문제를 해결한다. 사랑은 최고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章)을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진리(truth)도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6절에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진리를 기뻐하며"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 소망, 사랑은 미덕(virtues)이지만, 진리는 전혀 다른 위치를 갖는 것이다. 진리는 기준 틀(frame of reference)이며, 기초(foundation)이다. 진리가 없이는 사랑과 같은 미덕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공기와 같다.
사랑은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 왜 그런가? 이는 진리없이 사랑을 정의하고, 사랑을 해석하고, 사랑을 보호하고, 사랑을 인도하고, 사랑을 흘려 보낼 때,--- 사랑은 파국적인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를 미덕과 같은 수준에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미덕은, 그것이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닐 경우, 시들어 죽게 될 것이다.
이 행성 위에서 물이 없는 생명은 상상할 수 없다. 적절한 수로(channel)와 수관(canal)과 수도관 안에 있는 한, 물은 생명체에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물을 제어할 수 없게 될 때, 물은 이 행성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 다음으로 큰 대참사를 유발시킨다. 한편으로 물은 절대적인 축복(blessing)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파국적인 재앙이 될 수 있다. 사랑도 그와 같은 것이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Definition)
신성한 제한(Divine Definition)(곧, 그 안에서만 물이 흐르도록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수로)이 없는 사랑은 이 땅에서 가장 끔직한 것이 된다. 그것은 수백만의 인간을 파괴할 수 있고 사탄적인 감상주의로 떨어뜨릴 수 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바에 의하면, 어떠한 희생이 따를지라도, 영원의 빛 안에서 어떤 사람을 위하여 최고의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사랑이다. 아무튼 사랑이 세계 복음주의에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잊어버리고 감상주의에 빠졌다. 사랑과 진리 사이의 차이를 조명하는 몇 가지 핵심적인 성경기록을 생각해 보자.
(역자 주(註) : "definition(정의)"에는 '한정(限定)'의 뜻도 있습니다. 곧 참과 거짓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섞여있는 세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된 것을 구별함으로써 진리와 순결을 지킬 수 있으며, 이것이 영적 순결을 지켜야 할 우리의 태도입니다.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키는 정관사(the)를 영어로 definite article 이라고 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구별된 하나님께 속한 것은 특정한 것입니다. 성경이 "The Book"으로 시작하는 것은 세상의 허다한 책 중에서 성경만이 유일한 그 책(the Book)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은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들이니, 너희가 진리를 알 것이요,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궁극적인 자유는 오직 전적인 복종 - 진리에 대한 무조건 항복 - 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진리를 복종한다(Love obeys the truth)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열렬하게 말한다. 요한복음 14:15, 21, 23, 24 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에 대한 복종이 사랑의 최고 형태임을 강조하신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명령들을 지키라. / 21 나의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2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그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느냐? - 이것이 소위 사랑에 관한 산성 시험(acid test)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사랑에 관해 아무리 많이 이야기할지라도 효과가 없다. 계수(計數)되는 것은 복종이지, 말이 아니다. 사랑 없는 복종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복종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복종 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비되는 사탄적인 대용품이다.
사랑은 진리를 가르친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많이 말했던 사람의 예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복종해야 할 때에 이르자, 그는 복종하지 않았다. 곤란이 닥치자, 그의 결의는 무너졌고, 주님을 부인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우리 주님께서는 다정스럽게, 그러나 진리 안에서 베드로와 대면하셨다.
15 그들이 식사를 한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요나스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되, 예,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6 다시 두 번째 말씀하시되, 요나스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되, 예,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어떻게 이 만남에서 주신 가르침을 따라 주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할 것인가? 그분의 양을 먹임으로, 또한 위대한 사명을 명령하셨던 바와 같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은 무엇이든 다 가르쳐 준수하게 하라 "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 안에서 그분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훈련시킴으로 나타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20 장에서 위대한 사명에 복종했던 사람에 관한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그는 에베소인들에게 사랑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제자가 나타내어야 할 최고의 사랑을 에베소인들에게 나타내었다. 그가 어떻게 했는가?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말했는가? 사도행전 20:26-27이 그 답을 준다.
그러므로 내가 이날 너희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로부터 내가 깨끗하니라. 이는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너희에게 회피함이 없이 밝히 말하였음이라.
사랑은 아무 것도 버려 두지 않는다
그 결과는 아시아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 곧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가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바울은 그의 복음주의를 건전한 교리적 가르침에 기초를 두었다. 이것이 세계 복음주의를 위한 하나님의 열쇠이다. 갈라디아서 1:6의 바울의 증거는, 갈라디아서 4 장에서와 같이,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무뚝뚝하지만, 없어서는 안될 필연의 것이었다.
에베소서 4 장은 우리에게 어떻게 완전한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를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섬김과 사역을 위하여 참된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에게 주셨던 은사들을 주목하라
"그분께서 얼마는 사도로, 얼마는 대언자로, 얼마는 복음 전도자로, 얼마는 목양자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인격의 형체 안에 있는 이들 은사들의 각각은 교리적 인격(doctrinal person)이다. 그들 모두는 전적으로 진리 안에 포함된다. 이들 은사는 전적으로 계시된 진리의 빛 안에서 선포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훈련하는 것을 포함한다. 신약성경 안에는 사랑이 교리나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어떠한 가르침도 없다. 사랑은 갈라디아서 4:15 에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라고 언급되어 있다. 사랑은 진리를 말하는 태도와 방법이다. 사랑은 진리의 종이다. 사랑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소화하기 쉽게 한다. 그러나 결코 사랑이 진리를 가리거나 무시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결코 바뀔 수 없으나, 인간 전달자의 수중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는 매우 연약하며 깨지기 쉬운 것이다.
사랑은 독(毒)을 물리친다
과학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살아있는 조직 중에서 독(毒)으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하는 복잡하고 정교한 조직을 계속하여 사용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조직은 없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독한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하는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떠한 조직도 생존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고도로 오염된 환경 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탄의 세계에 빠뜨려져 있다. 사탄은 그의 타락한 본성을 통하여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접근한다. 어떻게 오류가 없고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한 채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상대적 성공을 평가할 수 있는가? 성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누가 결정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양떼를 보호한다.
주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다른 종교지도자들의 소리를 공감하여 들으라고 그분의 제자들을 격려하셨던가? 그분의 대답이 마태복음 7:15에 주어졌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먹이를 찾는 이리들이라." 오늘날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 대학교 또는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열(division)보다 나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타협에 의한 평화이다. 진리는 세상의 거짓 연합(unity)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랑은 오류를 교정한다
어째서 그런가? 진리를 위해서라면 가족들조차도 적대심을 가지고 나뉘어질 것이고, 그 결과 적어도 그 중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영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6:17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며 실족케 하는 자들을 지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만약 우리가 주 예수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면, 그분의 진리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자들을 피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서 배운 교리에 반대되는 것들을 구분하고 분별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피했다. 그들은 로마캐톨릭 종교 전체를 추방하였다. 선한 생명의 길이나 선한 교리는 항상 나쁜 환경이나 나쁜 교제에 의해 오염된다. 선한 자가 단순히 악한 자와 교제하는 것으로는 결코 나쁜 것을 더 좋게 만들지 못한다. 좋은 것은 나빠지지만 나쁜 것은 개선되지 않는다. 통에 있는 썩은 사과가 이와 같은 예이다. 나쁜 것은 결코 좋아지지 않으나 좋은 것은 점점 썩어 간다(고전 15:33). 세속적인 교회 연합을 위하여 교리적 순결을 물속에 잠그는 것이 옳은 일인가? 확실히 이는 성경기록을 통한 성령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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