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 문제

주일 신학으로 주일예배 먼저 살려야

천국생활 2008. 3. 20. 11:31
주일신학으로 주일예배 먼저 살려야

은준관박사

 

한국교회가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칫 유럽교회처럼 추락할 수 있는 갈림길에 놓여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이 위기를 올바로 진단하고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지, 어떤 패러다임을 설계해야할 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도 희망을 갖는 것은 한국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고난을 거쳐서 형성되어 온 영성,

즉 고난의 영성이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고난의 영성

마저 놓친다면 10-20년 후, 한국교회도 건물만 남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는 비슷한 사이클을 갖는데, 미국의 경우 세 번의 변화가

있었다. 1940-1960년까지 인구대비 16%의 성장세를 보이며 20년 동안 삼천만

명이 늘었던 성장기, 1960-1970년의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한 침체기, 1970년대

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어 온 침체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교회도 지금 30년의 시차를 두고 미국교회와 똑같은 사이클로 흘러가고

있다. 1970-1990년까지 한국교회는 성장기, 축복의 기간이었다. 십자가만 달면

 사람들이 몰려들 때였다. 그러다가 소위 말하는 민중화가 일어나면서

1990-2000년까지 10년 동안 침체기에 들어가 매년 1% 씩 줄었다고 한다.

몇 일전 도날드 밀러 교수의 ‘Reinventing American Protestantism'

(미국 개신교회를 다시 재구성한다는 뜻)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개신교가 다 줄고 있는 판국에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미국의 세 교회

(갈보리채플, 빈야드교회, 호프교회)를 수년간 연구하여 낸 저서다.

윌로우크릭교회는 한국의 온누리교회에 영향을 끼쳤고,

새들백교회는 사랑의교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외에 아직 한국에 접목되지는 않았지만 갈보리채플 같은 세 교회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밀러 교수는 이 교회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했는데, 성장하는 교회가 다 교단이 없는 독립교회라는 것이다.

오랜 전통과 교리, 제도에 너무 얽매이는 교회는 잘 자라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예배는 초현대적 형식과 격식 없는 옷차림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는

주제설교가 아니라 성경중심적인 가르침을 통해 평신도 지도력을 높여 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놀라운 것은 이 다섯 교회가 21세기를 넘어서

서 3천년 시대를 주도해나갈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교권적이고, 교리적이고, 제도적인 기성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교회의 이런 현상은 지난날 교파교회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교회가 현대적인 문화의 옷으로 갈아입고 과감하게 시대에 파고든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안에 노골적으로나 긍정적으

로 고백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 다섯 교회에는 하나님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 다섯 교회의 등장은 전쟁경험이 없는 미국인들의 풍요 속 영성을 만족시키고

 위안하는 일종의 종교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내 판단이다.

지나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다섯 교회가 주도하는 이런 패러다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전역의 80-90%에 해당하는 1백 명 단위의 죽어가는 작은

교회들을 다시 살릴 생각은 없고, 소위 인기 있는 현대 문화에 지나치게 적응해

가면서 흥미위주로 나아가는 교회의 모습만 보게 될 것이다.

얼마 전에 윌로크릭교회는 자기진단보고서와 함께 뭔가 잘못됐다는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쇠퇴하느냐, 현상을 유지하느냐,

제3의 길로 도약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온통 윌로크릭 출신이냐,

새들백 출신이냐며, 이들의 프로그램을 모방하며 성공을 갈구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제3의 미래를 향해 도약해야 하는

시점에서 즉흥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교회를 신속히

성장시키느냐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크든 작든 간에 처소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어야 할

소중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좋은 프로그램만 있다하면 몰려다니는

교권주의적 모방주의에 빠져버렸다. 많은 목회자들이 프로그램을 영성에

접목시키려 하지만 프로그램과 영성이 접목되는 순간 영성은 고갈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에 대한 나의 평가다.

 

 


교회 회생의 힘, 고난의 영성

고난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고난의 영성, 이것은 한마디로 눈물과 배고픔과 광야를 거쳐서 나온

영성이다. 제도나 건물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프로그램으로 메우려 할 때

고난의 영성은 죽고 만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제도도 법도 아닌 교인들 속에 아직도 잠재되어 있는 강렬한 영적인 가능성인

고난의 영성, 배고픔과 눈물을 머금고 하나님을 찾고 있는 이 영성을 무엇과 접목시키느냐에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성경에 나타난 두 공동체를 비교하며 풀어가려 한다.

 

하나는 복음서에 나오는 12제자 공동체가 그것인데, 제자공동체는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았고 주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은 공동체였다. 그런데 이 제자 공동체가 한

순간에 깨져버렸다. 3년을 함께 지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깨져버린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3년 동안 부름 받고, 세움 받고, 보냄 받은 제자공동체가 한순간에 깨져 버렸다.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영성신학자 앙리 노엔(Henri Nouwen)은 이 장면을 두고

 ‘Absence in Presence’(현존 속의 부재), 예수님과 제자들이 3년 동안 함께 있었는데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목사와 4백 명의 교인이 함께 있으나 서로 보지 못할 때도 있다. 부부가 30-40년을 살았는데도 함께

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함께 있으나 함께 있지 아니한 것, 그것이 제자공동체의 모형이었다.

고난이 오니 깨졌던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부터 사도행전, 바울서신 전체를 보면 새로운 공동체가 등장한다.

이는 초대교회 공동체로 특별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를 의미한다. 예루살렘교회는

가정교회였다. 이들의 신앙생활은 주님의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배, 가르침, 떡을 떼는 일로

가득했다. 이 안에는 요즘 목회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요한 요소들이 다 들어 있었다. 예배,

가르침과 설교, 함께 떡을 떼는 선교와 봉사 등... 거기에는 부르심이 있었고, 온 백성을 세움이 있었고,

가르침과 교제를 통해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전도하는 흩어짐(보냄)이 있었다. 즉 예루살렘교회 역시

제자공동체의 삼중구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앙리 노엔의 말처럼 제자공동체의 ‘Absence in Presence’가 초대교회공동체에서는

 ‘Presence in Absence’로 뒤집혀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그들 속에 함께 계시지 않는데 계신 것이 초대교회였다.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우리에게 와 계시지 않지만 두 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는 신비적 모임이 바로 교회였다, 삼중구조라는 형식은 같지만 그 내용에서는 전혀

다른 공동체였음을 보게 된다.


공동체 회복의 핵, 부활사건

이제 신학적인 질문을 하나해야 한다. ‘무엇이 깨진 제자공동체를 예루살렘 교회공동체로 바꿔 놓았는가?

’라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미국, 유럽의 교회들이 실패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힘은 신약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었다.

 

부활,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인간 안에 들어와 있는 우주적인 죽음의 세력,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세력을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꺾으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승천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을 만나셨다. 3년 동안 자기 선생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주님을 보게 됐다.

 

 

부활사건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에서부터 과거를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 보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에서부터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신앙이다. 3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다. 다시 오실 분은 부활하신 분이다.

부활하신 분이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계시를 통해서 보지 못했던 그리스도를 기억할 뿐 아니라,

오실 분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주님의 날, 주님이 부활하신 날. 영원한 죽음의 세력을 꺾으신 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다시 부어주신

부활의 날이 바로 주일이다. 단순히 예배드리는 날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나 종말론적으로 그날은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 집약되어 있는 시간이다.

한국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십자가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을 통해 약속되는 하나님 나라 이외에

그 어떤 것도 교회의 존재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목사직도, 장로직도, 교회건축이나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분토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목사의 성공이 중요한가? 우리 교회가 얼마나 유명한가가 중요한가? 이런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던지지 않고서는 패러다임 전환은 불가능하다.

하나님 나라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난의 영성과 만나게 해야 한다.

주일신학에 근거한 주일공동예배

주일공동예배를 주일 신학에 근거해서 다시 회복하자고 제안한다.

부활을 근간으로 하는 종말론적 사건이 일어났던 주일을 회복해야 한다.

주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주일은 종말론적인 시간이다.

모든 사람이 주일날 교회에 모여 주님과 만난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이것이 주일 예배이다. 내가 주일에 주님과 만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일신학에 근거한 주일예배를 드린다는 것이고 이에 근거해 예배순서를 구성해야 한다.

주일은 예배에만 집중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배우고 교제를 나누고 세상을 섬기는 시간으로

보내는 것이 좋다. 주일 이후의 날들은 세속이 아니라 부활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경험되어지는

그 시간 때문에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시간으로 바뀌는 시간이다. 기독자의 삶의 자리이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무한한 가능성을 복으로 남기셨다.

물리적인 축복보다 더 깊은 것은 바로 목회자와 장로들이 지금 섬기고 있는 신자 하나하나에 깔려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난의 영성이다. 이걸 소멸시켜 버리면 한국교회는 존재하지 못한다.

 

 

이제부터라도 고난의 영성을 프로그램이나 제도에 접목시키려 하지 말고,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함께 경험하고, 함께 감사드리며, 이것을 교육으로, 영적교제로, 선교로

이어나가는 온전한 신앙의 회복이 우리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바다.



▲ 은준관 박사


< 약력 >
- Duke University, Divnity School
(신학석사)
- Pacific School of Religion, Berkeley
(신학박사)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역임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학장 역임
- TBC 성서연구원 원장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