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 문제

성경의 뼈대---교리

천국생활 2008. 3. 27. 15:03

교리의 중요성

(The Necessity Of Dogma)

프레더릭 더블유 팔 박사 / 구정민 옮김

 

인격, 신조, 그리고 행동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적입니다. 인격은 사람의 어떠함이고, 신조는 그가 믿고 있는 것이며, 행동은 그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조는 보통 인격의 산물입니다. 악함과 선함은 지적 의견의 평행추입니다. 자성을 띤 바늘은 그 밑에 있는 관속에 있는 쇠에 의해서 저해됩니다. 교리적인 설교는 때때로 얕보이는 반면, 도덕적인 설교가 선호됩니다. 교리는 단순히 가르침이며, 사람들은 언제나 지식이 없어서 고통당하고 있고 망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설교들은 단순히 어떤 교리들을 믿는 것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신조와 행동 간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살고 있는 삶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붙들고 있는 교리들만으로도 확실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믿음과는 상관없이 정해진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들은 사실상 둘 다 잘못된 것이며, 유해한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과 삶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믿는 것과 그것에 맞추어서 사는 것에 매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교리는 교제의 시험대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며 그리스도의 교리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교리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느니라. 어떤 사람이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한 채 너희에게 오거든 그를 너희 집에 받아들이지 말고 그에게 축복 인사도 하지 말지니 그에게 축복 인사를 하는 자는 그의 악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자니라.” 그렇지만 교리는, 목적 자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목적에 이르는 수단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거룩한 삶입니다. 성경적인 방법은 우리가 먼저 순수한 교리를 가지는 것이고, 그 다음에 경건한 삶을 풍성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리인가, 삶인가?

기독교가 교리인가 삶인가라는 질문은 자주 제기됩니다. 대답은 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dogma)의 어원적인 의미는 “나에게 참되게 보이는 것, 나 자신의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에 대한 의견들을 가지고 있을 뿐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의견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대단한 질문들에 관하여 확신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적절한 삶의 기간을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두뇌를 유리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려 깊은 사람은 시간의 흐름과 빛과 지식습득의 증가에 따라 자신의 관점들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신조는 양 목적들에 대해서 봉인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최소한 영감 받은 말씀으로부터 깨어져 나오는 어떤 새로운 빛의 수용을 위한 한 가지 목적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신학적인 용례에서, ‘교리’(dogma)라는 단어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확신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권위를 요구하는 어떤 사람 또는 사람들에 의해서 공표된 교리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모든 신실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권위적이고 최종적인 교리들을 출판합니다. 개신교들 사이에서, 하나의 교리(dogma)는 교회들의 신조들 안에서 발견된 교리의 진술입니다. 이러한 진술들은 성경의 말씀들로부터 나오는 해석들 또는 추론들이며, 그것들은 무오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진술들은 오히려 믿음의 간증과 고백입니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믿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은 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축소할 수 없는 최소한의 것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설명되지 않은 나머지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교리에 대한 우리의 수정은 뺄셈이 아니라 덧셈입니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오류를 발견하지는 못하지만, 그들보다 더 풍요롭고 더 귀중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명쾌한 생각은 교리 자체만으로도 표현되어야 합니다. 혼동된 믿음과 불완전한 발언은 모호하며 무익한 것입니다. 진리는 이해되어야 하고 경험되어야 하며 공식화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공식화는 좀 더 명확한 이해와 더 깊은 경험을 결과로 낳습니다.



사도들은 교리(dogma)를 선포했다.



“교리를 치워버려라”와 “예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자주 제기되는 외침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만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의 초기로 되돌아가서 사도들의 선포를 검토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교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임박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교리적인 토론으로 유대인들을 당황케 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25년 동안 그것을 유지했고 우리가 그를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그는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리를 선포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음의 모든 국면과 모양은 교리로 나타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관한 가장 초기의 현존하는 상징은 디모데전서 3:16절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게 되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그리스도인의 교리의 나무에만 자라는 열매라고 잘 말해져 왔습니다.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의견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단자’라는 단어는 잘못된 신조(miscredo)에 기원을 둡니다. 잘못된 신조로 인한 오류는 삶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악을 생산합니다. 사상은 행동을 낳고 세상을 통제합니다. 한 사람의 삶은 그의 신조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훼손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도 그의 신조보다 더 낫게 될 수 없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재판소장이 가진 신조의 필연적인 산물이었습니다.



디도서 2:1의 ‘건전한 교리’는 ‘건강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건강한 가르침은 건강한 삶을 생산할 것입니다. 병든 가르침은 병든 삶으로 열매를 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서신을 쓰면서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딤후 4:3,4)라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때를 예언하였습니다. 지표들은 우리가 이러한 악한 날 속에서 타락해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배도의 그림자는 진리를 훼손함으로써 이 땅위에 기어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그가 만나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녀들이며 주의 법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는 자녀들이니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보지 말라, 하고 대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들을 대언하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것들을 말하며 거짓된 것들을 대언하라.”(사30:9~10).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졌도다. 대언자들은 거짓으로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것의 마지막에는 너희가 무엇을 하려느냐?”(렘5:30,31).



이스라엘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반복되어집니다. 교회는 사역자들이 건전하고 성경적이며 영적인 교리를 선포하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사역자들은 사람들이 그것을 요구하든지 요구하지 않든지 그러한 종류의 교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빈 교회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소수의 배고픈 성도들을 먹이는 것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군중에게 오류를 선포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정통이란 무엇입니까?



‘정통’(orthodoxy)은 ‘똑바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두 개의 그리스 단어들에서 기인합니다. 어떤 사람이 왜곡되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왜곡되게 살아가는 것이 옳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은 것을 행할 만큼 참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사랑하는 것에 매여 있습니다. 이단은 신학적인 왜곡입니다.



‘규범’(canon)은 본래 똑바른 가늠자 또는 목수의 규정을 의미했습니다. 그 때 그것은 도덕과 종교 안에서 무엇이든 정확한 것에 적용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목수의 직선자와 기포 수준기는 그의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는 이러한 완벽한 기준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일을 시험해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벽의 경사를 판단하는 우리의 직선자이며 다림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조들 안에서 틀린 것과 우리의 삶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들은 하늘이 땅위에 있는 것처럼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높고 곧바르며 참되십니다. 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땅위에서 믿음을 찾아보는 것을 말씀하시는 누가복음 18:8의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 아니라 계시된 진리에 대한 총체적인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20세기에 있을 현대주의의 파괴들에 대해 생각하셨습니까?(살후2:1~12; 딤후3:1~3) 오류는 무지(행19:1~6)를 통해서 생존할 수 있고, 이단은 마귀의 올가미(딤후2:25~26)에 기인한 것이며, 둘 다 실질적인 믿음과 양립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배도는 소망이 없으며 오직 심판에만 적합할 수 있습니다(유11~15, 계3:14~16). 거짓된 가르침은 독약입니다.



우물에 독약을 타면 그 물을 떠서 마시는 자들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우물 속에 거짓된 가르침이라는 독약이 들어가 살아있는 물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나쁘지 않습니까? 먼저의 경우는 육체의 생명을 파괴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영적인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러한 일의 상당한 발생 가능성은 우리들로 하여금 바울이 갈라디아 서신에서 소개한 끔찍스러운 저주에 감사하도록 도와줍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