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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을 아는 지식(펀글)

천국생활 2007. 3. 26. 15:57
하나님을 아는 지식

D. M. 로이드 존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11:18-22)



이 구절의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교만이라는 가장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는 교만과 교만에 동반하는 모든 문제를 바로 잡는 최선의 교정책이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특성과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러므로.... 보라"는 말로 시작하는 22절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자긍에 대한 교정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강조하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위대한 사도가 목회자의 심령을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이 진리를 적용하기 위해서 단순하게 예언의 진리를 늘어만 놓은 방식을 피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진리를 다른 무엇보다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먼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몇 가지 사실들을 증명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교리에 나타납니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아는 이 지식이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행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있지 않다면, 그 사실은 제일 먼저 교리의 영역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중에 이 말이 대해 놀라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므로 나의 교리에는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로마서나 어떤 다른 서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완전한 교리를 얻었고 실수할 염려가 없다'는 생각은 모든 오류들 중에 가장 위험한 오류입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아기" 또는 "어린 아이"로 시작한다고 분명히 증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에베소인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항상 "모든 교훈(교리)의 풍조에 밀려 요동할"수 있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과 같이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는 이런 놀라운 경고뿐만 아니라 믿음의 "파선"에 대해 말하는 구절도 있습니다(딤전1:19).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은 교리의 문제에 어떻게 나타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경향에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는 느낌이 없습니까? 그들은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의 듣지 못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실상 망각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 교리적인 문제에 나타나는 방법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물론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결코 정상적인 사고로는 하나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애물이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하여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을 사고(思考)에서 배제하는 일종의 "예수 숭배"는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매우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교리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경우는 사람들의 신관(神觀)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도 역시 매우 일반적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없고 "사랑"만 말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그들 자신의 "신"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셨던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다른 무엇보다 특별히 경고해야 했던 것은 바로 우상 숭배로 떨어지는 위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험은 계속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나는 이런 저런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이며 그것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시작하지 않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 전부를 지배하시지 않으실 때 우리의 생각이 영향을 받는 세 번째 경우는 죄에 대한 잘못된 견해나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죄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까? 나는 우리가 매우 종종 죄를 단순하게 우리가 행하는 잘못된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후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후회하게 하는 것, 또는 도덕적 규범에 따라 사는데 실패함으로 스스로를 낙심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죄를 거의 일종의 질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인간의 말로 죄를 규정짓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에서는 죄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의됩니다. 죄는 율법의 위반입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죄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반드시 틀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관(罪觀)은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한 그릇되고 불완전한 견해로 이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것이 현 시대에 기독교회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한 개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심리학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인간을 악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단지 약간의 교육이나 격려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죄를 지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죄에 빠진 인간의 생각은 복잡합니다. 길을 잃고 정죄를 받아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성경의 인간관은 오늘날 인기가 없는데,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물론 같은 방식으로 그릇된 속죄관(贖罪觀)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진리들은 서로 밀착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진리의 특이한 점입니다. 성경은 완벽한 통일체입니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이 어떤 한 점에서 심각하게 잘못되면 그 잘못은 나머지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이 첫 번째 요점, 즉 근본적인 가정(假定)에서 잘못되면, 여러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잘못될 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속죄에 대한 생각들이 성경 말씀에서 비극적으로 제거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희생 개념을 싫어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비록 너희가 나에게 이렇게 행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노라. 비록 너희가 나를 죽이고 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노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비록 너희가 나의 독생자를 죽게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노라"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한 대중적인 생각입니다. 분명히 여기에는 참된 속죄가 없습니다. 그들이 속죄라고 칭하고 말하는 것은 일단 우리가 속죄를 깨달을 때, 그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깨뜨릴 것이고 우리는 사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죄 그리고 속죄에 대한 이런 그릇된 생각에는 중생이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용서를 받고 결국 천국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중생하여 새로운 본성을 얻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거룩함과 성화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릇된 가르침은 사람이 특별한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나, 특별한 유혹을 극복하는 능력을 받는 방법에만 집중합니다. 이 가르침은 완전히 인간에게 집중됩니다. 모두 "내가" 극복하고 승리하는 것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그릇된 가르침은 절대로 하나님의 정황에서, 또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의 정황에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가르침은 거룩과 성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교리로 시작하는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항상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지배 요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천의 영역에 이를 때,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음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복음 전도의 문제를 봅시다. 여기 그리스도의 교회의 가장 중요한 활동 -복음 전도- 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가 어떻게 행해져야 합니까? 만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복음 전도는 일종의 일반적인 웃음거리와 여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런 복음 전도에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고, 사람들 스스로 무엇인가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그런 복음 전도의 분위기는 기독교의 예배라기보다는 음악회와 유사할 것입니다. 모든 강조는 인간의 욕구 -친교, 행복, 평화, 목적, 치유 등의 욕구- 에 두어집니다.



이 모든 그릇된 경향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그 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여러분이 인간이나 인간의 필요들로 시작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러분의 복음 전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발견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결코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결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선한 삶을 살고, 타인을 도우려 노력하고, 자급 자족의 안식처에 안주해 있는 고도로 도덕적이고 지적인 사람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와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이 사실에 대한 설명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하나님과 직면시키는 것입니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진리를 직면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가 필연적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접근에, 복음 전도의 모든 내용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릇된 애원을 합니다. 실제로 복음전도자들이 "오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전도는 매우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또는 구원을 이익이라는 형태로 제시하는 전도도 있습니다. "오십시오! 여러분이 오기만 했다면 이것을 얻었을 텐데 아직 얻지 못했다니 정말 여러분은 어리석군요"라고 말하고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제시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라고 압박하며 강요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는 참으로 엉터리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복음 전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그 같은 모습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고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는 우리의 필요성입니다. 진정한 복음 전도는 특정한 죄악들에 관심이 없다고 내가 항상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가 종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죄들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설명은 그릇된 점을 강조하여 그릇된 흥미를 일으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경에 때라 깨달은 것은 하나님과 인간 -모든 인간- 그리고 화목의 필요성입니다.



이 실천적인 점에 있어 인간을 강조할 때에 초래되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강조는 경험들을 그릇되게 강조합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으로 시작하여 구원을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특별한 경험을 얻는 데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험을 얻는 것은 복음 전도의 목적이 아니며 성경의 모든 메시지의 목적도 아닙니다. 복음 전도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시려고 죽으셨다고 말합니다(벧전3:18).



나의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경험의 형태가 어떠하든지 모든 경험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러나 복음의 근본적인 과제는 우리에게 경험들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근본적인 과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말한 것처럼, 이 잘못된 성결 사상은 유행하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결을 특별한 죄들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죄들로부터의 해방은 성결의 목적이 아닙니다. 복음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교로 인도하는 것, 우리로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결은 우리에게 천국을 준비해줄 것입니다. 성결은 우리의 어떤 감정으로 생각되지 말고 항상 하나님과의 이 근본적인 관계로 생각되어야 합니다. 성결은 여러분에게 이 심오한 지식을 주고, 계속 더욱 깊어져서 결국 우리로 하나님을 보게 하는 친교로 인도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입이요." 바로 이것이 성결의 목적입니다. 물론 성결은 죄들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뒤를 돌아봅니다. 그러나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 이것이 성결의 동기입니다. 그밖에 다른 동기는 없습니다.



또한 올바른 위치에서 시작하지 못할 때 온갖 종류의 교만이 이어집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들의 행동들에 존재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영리하고 교활한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기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일을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여러분이 나를 놀라운 설교자나 뛰어난 사역자로 생각하게 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모든 말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있습니다." 아주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사단의)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1). 우리는 사단의 궤계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활동들을 자긍하고, 자신의 거룩함을 자긍하고, 자신의 경험들을 자긍하며 하나님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대신 항상 어떤 모양이나 형태로 자신들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것이 교만이 실제적으로 활동하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로마서 11:22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모든 실패가 경건의 결여, 즉 "여호와를 경외함"의 결여로 이어진다고 말하겠습니다. 로마서 11:22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결과는 경거망동, 겉발림, 천박함, 독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위험한 자긍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사용했던 "경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이 "주를 경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런 말들이 성경에 사용되는 용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서정적인 책인 사도행전을 예로 들어봅시다. 나는 9:31에서 이런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주를 경외함"의 증거가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 꼭 들어맞을까요? 우리는 모두 명랑하고 쾌활하고 친밀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은 "주를 경외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경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어들은 유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의 사고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용어들이 유행하지 않게 되었다고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 구절을 잊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잊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주관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접근은 너무 인간 중심적이어서 불가피하게 "주를 경외함"과 "경건"을 망각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가 여기에서 제시하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상고해야 합니다. 사도가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은 "그러므로 보라"는 말입니다. 이 "그러므로"라는 말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은 사도가 설명하려고 하는 교리가 그들이 반드시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론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위험을 보라." 우리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고,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믿고, 복종하고,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무엇이고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얻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로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이 …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여러분은 성경을 떠나고, 계시를 거부하고,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여러분자신의 "신"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계시로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고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 대해 자비롭게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성경에 기록하신 그 계시에 완전히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그 계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내가 말하는 의미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는 표현에서 "와(and)"라는 말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내 말은 "하나님의 인자를 보라"는 것이 현대인의 표어라는 것입니다. 오직 인자(仁慈)만 보라! '인자와 엄위'가 아닙니다. 현대 세계와 현대 교회가 "와"를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이 "와"를 회복할 때까지는 우리에게 회복의 희망이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이 "와"를 깨닫기 전에는 부흥의 희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와"를 깨달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겸손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계시를 받다들여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계시를 취사선택한다면 여러분은 철학자가 되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마치 자신이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철학자는 성경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생각들로 시작하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 나갑니다. 여러분은 "아닙니다. 아니예요. 나는 성경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여러분이 성경을 믿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으십시오. 단 한 면만을 취하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인자를 믿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엄위도 믿어야 합니다. 인자와 엄위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를 상고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습니까? 그 용어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론 인자는 "자비와 연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엄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엄위는 "엄격하고 정확한 공의"를 의미합니다. 이 위대한 로마서의 첫 장 18절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 엄위에 대해 이미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좋아 나타나나니." 엄위의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사도는 여기에서도 그 말을 되풀이합니다. 엄위는 성경 어디에나 나옵니다. 몰론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엄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내가 볼 때 이런 풍조가 복음주의 속으로 몰래 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한 면 -인자, 사랑, 긍휼, 자비, 연민- 만이 제시되고, 엄위, 공의, 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는 점점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우리의 모든 문제들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지금과 같은 참담한 모습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이제 나는 이 점을 다르게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때 하나님의 전체께서 행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으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속성들에 따라 행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정확하게 동시에 활동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항상 함께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는 함께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속성들 중 어느 하나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분리하는 것이 현대의 이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모든 속성들과 분리시켜 왔습니다. 이것은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이며 불신의 한 형태이며, 철학과 공론의 한 형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 어느 하나만을 분리하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들 중 하나를 다른 속성들과 대립시키는 짓을 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인간들은 종종 이런 악한 짓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대립시키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하나님의 긍휼을 대립시켰습니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인자와 엄위가 대립되었습니다. 우리는 인자와 엄위를 서로 대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인자와 엄위는 분리되어서도 안 되고 대립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만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이시며 엄위이시며 사랑이시며 거룩이시며 빛이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항상 하나님의 참이며 동시에 진실입니다. 인자와 엄위, 공의와 자비, 의와 평화, 거룩과 사랑 등은 항상 하나님의 참이며 동시에 진실입니다. 그리고 물론 사도가 여기에서 주장하고 강조하고 있는 매우 특별한 요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특성에서 특정한 것들을 추출하기 시작한다면, 너희는 곧 문제에 빠질 것이다. 너희는 곧 타락하게 될 것이며 너희가 지금 자긍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과 같은 일이 너희에게도 일어날 것이고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하신 말씀,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을 망각했다. -'내가 너희를 이 땅으로 이끌 것이니 너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는 영원히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만일 너희가 계속 …하지 않으면 그 때에는 …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그 다음 자신의 논증을 통감시키기 위해 사도는 바로 "그러므로"라는 말을 첨부합니다. "그러므로 ...보라." 요컨대 사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인자와 엄위이시고 인자와 엄위가 항상 동시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자가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이런 일이 유대인들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매우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21절에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인자하시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에 의해 자신들이 선택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다루신 방법은 하나님의 특성이 나타난 역사적으로 중요한 증거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의, 그리고 연민이 가장 놀랍게 나타난 사건들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이 증거를 불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멋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공격할 대적들을 일으키셨고 실제로 유대인들을 공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도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께서는 이 특별한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매우 강하고 인상적인 말로 종종 설명하십니다. 그 중 한 가지 예를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14:14에서 우리는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을 봅니다. 20절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노아, 다니엘, 욥" 등이 있을지라도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들의 생명을 건지시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으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본성을 거스리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다루시면서 자신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고 자신의 본성을 거스리실 수 없으시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운 증거를 세계사에 남기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 자신의 백성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처벌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을 일시 내어쫓으시고, 무익하고 무가치한 가지들로 나무에서 꺾어버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원칙의 역사에 있어 가장 인상적인 예가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의 시대에 하나님의 유대인들과의 관계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가 함께 나타나는 것을 보기 원할 때,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바로 갈보리 언덕 위의 십자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바울 사도는 이미 이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롬3:25-26에서의 중요한 진술을 기억합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제물로 세우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자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귀를 기울이십시오!) 자기도 의로우시면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인자와 엄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때까지도 의로우셔야 합니다. 공의와 거룩은 항상 존재하고 항상 동행해야 합니다. 공의와 거룩은 분명히 언제나 동행합니다.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속죄 교리만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맙시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씀만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를 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은 우리의 죄를 자신의 아들에게 전가시키시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의 죄를 처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죄에 대한 진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아들을 화목 제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인자'와 함께 역사하는 하나님의 '엄위'입니다. 이 두 가지는 동행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용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공의로우셔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 하실 때에도 덜 공의로우실 수 없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분리하려고 하지 맙시다. 인자와 엄위는 함께 존재하며 함게 역사합니다. 다른 속죄관으로는 구약의 희생제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다른 속죄관으로는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의미나 세례를 받으신 이유, 그밖에 예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때문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육신과 성육신에 이어진 모든 일들이 일어난 이유는 죄가 처벌받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자와 엄위!" 인자가 없으면 엄위도 없고, 또한 엄위가 없으면 인자도 없습니다. 이 둘을 불리하지 마십시오. 인자를 빼고 엄위만을 강조하지 마십시오.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빼고 하나만을 강조할 때 여러분은 스스로를 지옥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경솔함과 겉발림에 대해 반대하면서,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우쳐 하나님이 단지 엄하시기만 하다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인자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엄위와 인자와 은혜와 긍휼은 모두 동시에 함께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있는 그대로 믿으십시오.



이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려 봅시다. 구원의 목적은 항상 우리를 하나님께로,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안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단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의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바울이 디도서 2:14에서 말합니다. 이것이 용서의 목적입니다. 구원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용서를 악용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악용하고 있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일어날 일이 몹시 두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부심이나 자긍심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인간이 자아를 실현했다 할지라도 자부심이나 자긍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용서를 받음으로 인해 인간이 무엇을 소유했든지, 어떤 경험들을 했든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무엇을 할 수 있게 하셨든지 간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자부심, 자긍심, 아주 작은 교만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런 경향들을 고칠 수 있는 대책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상기할 때 경박, 경솔, 겉발림, 천박은 불가능합니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렇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십시오. 구원을 여러분 자신, 즉 여러분의 주관적인 상태와 조건들 또는 여러분의 이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하나님의 관계의 관점에서 구원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기억하십시오. 결코 여러분의 구원을 악용하지 마십시오. 신중히 행하십시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행하십시오. 사단에게 이런 유혹을 받을 때 바울 사도가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푸른 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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