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이 오는 방식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7-11)
우리는 12장 끝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스라엘 모습은 말하자면 하나의 예비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기초로 하여,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이 문제의 다음 대목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흥의 전체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흥의 진행 과정 중에는 분명한 단계와 경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역사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교회가 엄청난 죄나 실패에서 곧 바로 갑자기 굉장한 부흥으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간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다시 소생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이라면, 그러한 중간 단계가 올 때 우리가 그것을 바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다음 단계는 기도와 중보의 단계입니다.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33장의 교훈이 여러 면에서 여러 단계와 과정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단계는 출애굽기 33:7-11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단계는 12-17절의 내용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로서 18-23절, 곧 출애굽기 33장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이 대목들과 이러한 특별한 단계들을 조심스럽게 연구할 것을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에서 우리가 부흥의 전체 문제를 좌우하는 중추신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일어나는 혼돈은 자주 그들이 이러한 세 단계의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성령의 교리에서 부흥을 완전히 배제시켰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부음을 받을 여지를 조금도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 세례의 교리를 오해함으로써, 부흥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한 예외적인 것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겨 두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 이상의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의 첫번째 단계를 살펴봅시다.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33:7). 여기에 심오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언급된 이 장막에 대해서 분명히 알도록 합시다. 이 장막은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정해 주신 양식을 따라 만든 장막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신 식양대로 지은 장막에 대해서 많이 듣습니다. 그것은 성전의 전조였습니다. 그런데 그 식양대로 지은 장막은 뒤에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것은 일종의 천막으로, 모세가 이미 만들어 놓고 회중 가운데, 이스라엘 진영중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이 회막은 모세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가는 곳이었습니다. 회막-저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 생각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의미있고 놀라운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비국교도 선조들은 보편적으로 자기들의 예배 처소를 모임의 집으로 지칭했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옛 용어 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은 하나의 장소로서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곳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도 포함되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처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우리의 교회가 더욱 더 만남의 장소가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모일 때마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만남의 집, 만남의 장소입니다.
모세가 이러한 특별한 행동을 하도록 분명하게 인도받았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진 중앙에서 이 장막을 걷어내어 진 밖의 멀리 떨어진 곳에 쳤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를 붙드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첫번째 요점은 이것이 모세 자신이 취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야 겠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회의 오랜 이야기 속에 나타난 성령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역사를 읽어 볼 때, 보편적으로 위대한 부흥을 가져오는 첫번째 일은 한 사람이나 어느 부류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한 점을 느끼고, 자기 짐이 너무 무거워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의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그 얼마나 놀라운 운동입니까? 그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 기원이 무엇입니까? 그 종교 개혁의 전조들이 있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즉 위클리프와 존 후스등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실제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은, 매우 평범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갑자기 이 짐을 느끼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딱 한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능한 역사를 교회 안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다른 부흥의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이 점은 얼마든지 예증할 수 있습니다. 100년 전 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부흥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심하게 했을 뿐만아니라 장로교회 전체의 생명력을 소생시켰고, 북아앨랜드의 다른 교회에까지도 영향을 끼쳤으며, 전체 상황을 변화시켰습니다. 웨일즈나 미국에서도 동시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서 그 움직임이 딱 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1857년 뉴욕시의 풀턴가에서 기도 모임을 시작한 그 사람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소명감을 느꼈고,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부흥도 딱 한 사람, 제임스 맥퀼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웨일즈에서도 역시 딱 한 사람, 험프리 존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능력을 보고 자기 나라에도 이러한 일이 있어야겠다는 마음의 강박감을 느끼고 대서양을 건너 웨일즈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교회 역사 속에서 찾아볼수 있는 "로맨틱"한 요소라고 제가 부르기 좋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게 있어서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요점을 가볍게 스쳐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서를 읽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유의 일은 기독교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지도자들과 위대한 사람들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들어 쓰심으로써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사용하심으로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그러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원칙은 없습니다. 또한 모세의 경우와 같이 반드시 위대한 지도자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때로 대수롭지 않은 선지자들을 택하여 사용하신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누군들 나사렛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고 기대했겠습니까? 속담이 이르듯이 나사렛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고 기대했겠습니까? 속담이 이르듯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주가 나사렛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인식합시다. 우리는 기독교회를 사로잡은 것처럼 보이는 이 통탄할 만한 현대적인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그 현대적인 습관은 평범한 교회 지체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큰 집회의 군중 속에 그저 앉아 있기만 해도 된다. 그저 두 세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해낼 것이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닙니다. 성경의 교훈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사람이 바로 당신일 수 있습니다. 무명의 교회 성원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통로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도 그 소명의 짐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그 짐을 느끼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소명의 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상황에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었습니까?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여러분을 슬프게 만듭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그러한 소명감이 어느 사람에게나 올수 있다면 어째서 여러분에게는 오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여기서 끝내기로 합시다. 그러나 그것이 단 한 사람의 행동일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모세의 이 행동을 주목합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전에 진영 가운데 있던 장막을 옮겨 "진 밖에" 쳤습니다.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말입니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흥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여러 요점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요점도 오해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진리가 오해될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든지, 강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모세는 기도와 중보의 처소를 세우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는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습니다. 구름 기둥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회개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되찾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 처소를 세운 것입니다.
자,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졌는지 주목합시다. 그것은 섬세하게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어떤 진술도 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연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무거운 짐을 느끼며, 전과 같이 진영 가운데에서는 중보 기도를 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진 밖으로 옮겼고, 역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그 곳에 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강조되는가를 보십시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이것은 분명히 겸손한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나팔을 불거나 어떤 위대한 선언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러한 행동을 취했을 따름입니다. 중보기도를 드릴 필요성을 느끼며, 어떤 비상한 행동을 취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자신이 이러한 행동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행동에 자기와 함께하고 싶은 그러한 느낌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런 일을 하도록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행동에 대해서 듣는 바가 그것입니다.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모든 부흥들의 역사 속에서 그 점을 발견합니다. 제임스 맥킬킨은 다른 두 사람에게 말했고, 그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만이 작은 학교 교실의 좁은 통로에서 함께 모였습니다. 제가 북아일랜드에 갔을 때 그곳을 방문할 특뤈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곳을 보고 싶어, 본래의 여행 목적에서 벗어나 그 곳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코너 마을이나 켈스 마을에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을 밖에 있는 이 조용하고 작은 교실로 왔습니다. 그곳은 평화롭고 고요한 곳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마을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충분히 중보 기도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또한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부르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점에서 강조되는 바입니다.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그들 모두가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느꼈던 것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그 진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모세는 혼자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로 가고 있다. 자, 우리도 함께 가자, 우리도 가서 모세와 합세합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씩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크게 조직회된 일도 아니었고, 어떤 대단한 선언을 하거나 어떤 시간에 그러한 기도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열겠다고 발표한 것도 아닙니다. 부흥은 결코 그러한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상태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조직부터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첫번째 움직임은 어떤 위원회를 세우고 영리하게 광고를 하며 그리고 거대하고 조직화된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보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오랜 기독교회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부흥의 여러 사례들과 정반대 현상입니다. 성도들이여, 다음 부흥이 올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움으로 임하게 될 것이고, 특히 조직화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에게 놀라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그것은 이처럼 떠들썩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조용하게 기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소명감을 느끼기 때문이며, 스스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합세하기 원하며,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이 회막을 세웁니다.
그 다음 요점은, 모세가 회막을 진 밖에, 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교훈이 됩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 필연적으로 이러한 떨어짐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진이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는 말하자면 회막을 교회 가운데서 다른데로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영 밖의 떨어진 곳에 세웠습니다.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체험되는 어떠한 부흥도 교회 내의 어떤 공식적인 활동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강한 표현일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것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교회가 알았던 그 어떠한 부흥도 공식적인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종교 개혁의 위대한 선구자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미 언급했던 위클리프나 존 후스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서 말입니다. 언제나 그것은 비공식적인 것이었고, 공직의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싫어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에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일은 자기 방에 있던 이 수도사에게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은 계속 일어났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개혁이 있은 후에도 불만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패턴을 따라 똑같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청교도 신앙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아마 메소디즘(우리 나라에서는 메소디즘을 순전히 감리교회라고만 알고 있지만 우리 나라 감리교회는 알미니안적인 신학 위에 서 있는 메소디즘의 한 분파라고 할 수 있고, 휘트필드 같은 사람은 메소디스트에 속하기는 하지만 장로교의 칼빈주의 원리를 따른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역자주)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200년 전에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웨슬리 형제나 휘트필드나 다른 사람들은 영국 국교회의 성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에서 어떠한 일을 하려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진 밖에 홀리클럽이라 불리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사적으로 그저 몇 명의 사람들만 모였습니다. 한동안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생각에 함께 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공식적인 것이었고 말하자면 진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킬빈주의 메소디즘과 알미니안주의 메소디즘의 시초였습니다. 플리머스 형제단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초기 운동도 역시 그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 그것은 단지 교회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교단을 세우란 말인가요?" 이것은 이 교훈이 암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것은 모임을 공식화하고,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어 버리고, 조직을 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 안에서 행하기 시작하실 때, 부흥을 위한 길을 마련하고 계실 때, 언제나 그러한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 말하자면 떨어져 함께 모여서 조용하고 떠들썩하지 않게 모이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한 소명감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소명감의 부담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제가 볼 때 현시점에서 매우 심각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즐겨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후원" 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생각하는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어떤 일을 해야만한다고 느낄 때 후원을 원하고, 그 후원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교회의 지원을 원하며 ㅡ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지원도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후원자를 얻기 위해서 큰 예배당에 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어떠한 후원도 없습니다. 참된 영적 각성과 부흥의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한 후원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께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일들을 하려고 한다면 광고를 해야 합니다. 또 대단한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어떤 마을에서 집회를 가지려 한다면 그 마을의 지도자가 참석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아니면 어느 주의 통치자가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든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지원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주의를 끌 것이고 큰 집회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세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행동한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비길 데 없는 능력을 의지할 때 사람들의 지원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야 할 후원은 성령의 지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먼저 사신을 보내어 모든 사람으로 준비하게 하고 공적인 큰 집회를 마련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3-4)라고 했습니다. 그는 무엇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함께하지 않고는 감히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을 모셔야 했습니다. 성령을 모신 사람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무엇을 의지합니까? 후원 또는 지원입니까? 성경에는 그러한 지원이 전혀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권세있던 시기나 개혁이나 부흥이 일어났던 모든 시기에는 그러한 지원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몇 사람이 똑같은 소명감을 느꼈기 때문에 함께 나와서 모였을 뿐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또 다른 요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진 밖에 회막을 세우는데 있어서 모세는 또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헌신의 전체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일이 진 중에서 일어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진은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장막을 걷어 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부정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 죄악된 분위게에 떠나야 한다. 우리는 대신 여기에서 함께 모여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다시 저는 여러분에게 주장합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바로 이 요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그들 중 어떤 사람을 보더라도, 그들의 첫번째 관심사는 교회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였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200년 전 옥스퍼드에서 시작된 그 작은 움직임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모임의 이름을 주목하셨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홀리 클럽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웨슬리형제와 휘트필드와 그들과 함께 모였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그것을 여기에서 소개하겠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기독교회는 여전히 기독교회이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매우 무가치하고 죄가 많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신약성경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대해 매우 느슨한 자세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그들은 너무 멀리 나가서 약간은 율법주의적인 데까지 나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원칙과 규례들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메소디스트(규칙자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함께 기도해야 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규칙을 따라 생활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거룩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한 사람이나 몇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자기들이 먼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첫번째 관심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자기들도 거룩해지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영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일종의 구별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기독교회를 분리하려는 겁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회를 분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중 어떤 사람을 다루려 하실 때 이러한 구별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너보다 더 거룩하다"는 자세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일단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상태를 위한 소명의 짐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는 즉각적으로 이러한 헌신에 대한 부르심을 느낍니다. 말하자면 그는 "밖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물리적인 면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리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심각한 부도덕성과 불경건과 불신앙이 팽배한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해서 악이 소리치고 거만하게 굴며 떠들썩하게 자랑하는 이 시대에, 어느 지역에 살든지 사람들에게 악이 파급되고 있는 이 시대에,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부류에서 분리되라는 부르심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로서 한 발 더 앞서 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평범한 기독교 신앙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보다 더한 것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래서의 참된 삶과 거룩한 생활을 나타내는 것밖에는 그런 상황을 다룰 수 없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들이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장막을 진 밖으로 멀리 옮겼던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거룩해져야 한다." 제가 이 모세의 행동을 보고 강조하는 또 다른 요점은, 그는 분명히 어떤 비상한 행동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떤 부가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러한 초기 단계에서는 언제나 그러한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흥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저 잠깐동안의 흥분이나 흥미나 어떤 기쁨이나 현상들만을 위해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어떤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대단히 흥미 있는 시간을 맞게 될 것이라는"태도를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모임이나 어떤 흥분이나 어떤 놀라운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되고 진정한 관심의 첫번째 표시는 우리가 얼마나 무가치하며 부정한 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별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어쨌든 일상의 자세를 벗어나 이 장막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비상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던 궤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마음에 인상 깊게 싶어주고싶은 질문이 여기 있습니다. 이같이 엄청나게악한 시대에 여러분은 예외적인 어떤 것을 하고 있니까? 그저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일로 만족하고, 어떤 틀에 박힌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합니까? 물론 교회가 축복을 받고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에 나와 선교회 일을 하고, 주일학교에서도 가르치며, 교회의 일상적인 일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이 시대 때문에 어떤 예외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방면에서 여러분을 구별시키는 의도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주는 위대한 교훈입니다.
이제 이 관찰을 완성시키기 위해 저는 모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관심있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한 두사람이 진영을 벗어나 기도하러 그 회막으로 나아가곤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여기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고작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함께 진 밖으로 나와 하나님을 만나는 그 회막 안으로 들어가 기도하거나 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다만 모세가 그 장막을 진 밖에 세워 놓고, 그와 몇몇 다른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그 곳을 찾아간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장막 문 앞에 서서 모세가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그가 무엇을 하며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것은, 장막을 위한 바른 장소는 그 진영 가운데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장막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사를 읽어보면 이 점을 거듭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소명을 느껴서 스스로를 구별시킵니다. 그러면 사른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그들의 장막 문에 서서 쳐다봅니다. 그들은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오, 만일 온 교회가 움직이기까지 기다린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온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방식은 개인들을 들어 사용하여, 급기야는 대다수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그들은 다만 어떤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희미한 의식을 가지며, 모세와 그와 함께하는 몇 사람의 행동을 뜷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할 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그러한 위치에 있음을 생각하면 저는 대단히 행복합니다.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즉 저는 이제 우리가 한 고비를 넘겼다고 믿습니다. 어떤 지역의 교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역 교회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저는 보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살아계신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고는 그 어떤 것도 충분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들이 도처에서 몇 사람씩 생기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들은 상직적으로 말해서 진 밖에 세워 놓은 이 장막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 전체에서 희미하게나마 이러한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는 9절부터 11절까지에 잘나타나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동을 인정하시고, 그 행동을 장려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는 그 행동을 기뻐하신다는 표를 주십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하나님께서 그 구름 기둥을 철수시키셨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눈에 보이는 표증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행동의 결과로 인해 구름 기둥이 그전과 같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의 표증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흥의 첫번째 조짐은 언제나 교회 생활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새롭게 소생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교회의 예배가 더 뜨거워지고, 사라졌던 것이 되살아나며,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자극과 격려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도속에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기대감, 새로운 자유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바로 구름 기둥이 돌아온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합니다. 무정함과 겉발림은 적어지고 새로운 부드러움과 새로운 관심과 새로운 고뇌의 표증이 나타납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떤 나이 많은 사람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즉 그들이 교회의 기도 모임에서 고대하고 있었던 것은 "오(oh!)"의 요소요, 곧 갈망과 고뇌와 기다림의 "오"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올 때 그것은 곧 구름 기둥이 다시 돌아왔다는 표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행동을 기뻐하신다는 매우 분명한 몇 가지 표증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라보시며, 사람이 그 친구와 말하는 것처럼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무엇보다 먼저 그 소명감을 느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곧 응답해 주실 거라는 암시를 주십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서 이 사람들은 한동안 고뇌의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느낌을 가지는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으며,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으며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증을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은 장막 문에 서서 모세와 다른 사람들이 회막으로 나아가는 모습만 바라보던 이 사람들 속에서 한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구름 기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장막 문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 전체가 영향을 받고 그 영향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서적으로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반드시 그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11절에 이르게 됩니다. 이 구절은 매우 놀라운 구절입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얼마나 큰 격러가 됩니까? 또한 이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그 모든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임을 여러분도 아셨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니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실 거라는 암시를 받고 진영으로 돌아가 백성들에게 보고하려 했습니다. 즉 거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으며, 구름 기둥이 다시 임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며 그 얼굴을 백성들을 향해 돌신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을 보고하려 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세가 얼마나 영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인가를 보게 되고, 그가 하나님의 길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은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종 여호수아를 그 장막에 머물게 하되 자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머물게 하였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모세는 더욱더 많은 것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올것 중 어느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었던 일을 알리러 나가 있는 동안 그 회막에 여호수아를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더 행하려 하신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초요 하나의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로, 우리가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부흥이 어떠한 것인가를 진정으로 일지 못한 것이라고 저는 주저없이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예비 단계요, 준비 단계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고대하는 마음을 주목하십시오. 여호수아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보고하러 가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더 많은 계시를 주실까 하여 장막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더 많은 것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무모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리인, 자신의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면전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학수고대하는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으며, 어떤 비상한 일이 곧 일어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계의 연구를 마치면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연 그 단계에 도달했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장막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습니까? 긴박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라는 부르심을 아십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요점은, 거룩과 수많은 백성들을 위한 중보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욱 더 많은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흥이 오는 방식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출33:4)
출애굽기 33장은 구약성경의 위대한 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떠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33장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장입니다. 길고 변화무쌍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 중 사활을 좌우하는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말하듯이 이것들이 기록된 것은 "우리의 본이 되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초대 교회,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던 초대 교회 시대에도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보도록 인도하셨던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점에도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하고 심오한 가치를 지닌 교훈들과 예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무시하고, 복음과 복음 교훈의 원리들을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 비추어 보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큰 어리석음이 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기자들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언급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 시대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출애굽기 33장이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부흥과 교회 내의 영적 각성이라는 문제에 큰 빛을 던져 주기 때문에 33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면에서 이 이야기는 교회가 메마름과 냉담의 시기에 있다가 다시 각성하고 부흥하는 시기로 넘어갈 때, 교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가를 예증해 주는 구약의 완벽한 예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오랜 교회 역사에서 거듭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33장에서 묘사된 사건의 특징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 분명하게, 부흥이 임하는 방식과, 교회에 부흥이 찾아올 때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는 과정과 경로를 인식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명백하게 해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편적으로 교회와 교회 내에서의 부흥의 필요성을 다루는 동안, 그것은 동시에 개개의 신자들을 위한 완벽한 메시지도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흥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어떠한 일이 동시에 여러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이 오기까지 개개인의 체험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 볼 모든 것들은,
제가 묘사하려고 하는 상태에 있는 모든 개인에게 즉시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시사하는 바는, 보편적으로 말해서 부흥이 오는 데는 여러 단계와 과정이 있다는 점입니다. 부흥이 일어난 과거의 모든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생명 없고 거의 죽어 가던 상태에서 갑자기, 단번에 강한 능력과 부흥과 감화력있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좀처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보편적으로 특별한 단계와 과정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있는 이 사건의 영광은, 매우 명백하고 분명하게 하나의 일화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단계들과 과정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실로 그 이야기 자체가 설교가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삶 속에서 일어난 이 특별한 이야기를 강해하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먼저 그 사람들이 처했던 입장과 조건을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33ㅣ1-11은 그 배경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일 중 가장 심각한 타락의 사건 중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포로 된 자리에서 건짐을 받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불평하고 원망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배반하기 시작했음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려고 모세를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백성을 남겨둔 채 여러 날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론에게 그 백성들을 맡겨 놓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기록이 말해 주듯이, 사람들은 참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 모세가 어디 갔느냐?"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애굽에서 나오라고 설득하던 사람, 우리를 이 광야에 데리고 온 그 사람이 어디 갔느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그는 왜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가? 그가 말하던 하나님,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겠다고 하던 그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이 사람에게 무든 일이 일어났느냐? 그들은 전혀 참지 못하고 아론에게 "우리는 지쳤다, 우리는 더 이상 모세를 기다릴 수 없다. 그가 늘외치던 하나님도 기다릴 수 없다. 우리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그들에게 금귀걸이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것들을 불속에 넣어 녹여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금송아지에 경배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32:4)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섬겼을 뿐만 아니라 뻔뻔스러운 죄를 짓고 사악해졌습니다. 그들은 그 송아지 앞에서 춤울 추었고 아주 배은 망덕하게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의 배경의 핵심입니다. 이 이야기는 불순종의 이야기요, 배역의이야기요, 자신들의 신을 만들고 섬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거짓된 예배를 발견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신을 결정할 권세가 있다고 떠벌립니다. 물론 그것은 결국 죄를 가져오고 부도덕성을 만연시키며 부끄러운 행동을 유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상세하게 적용시켜 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각과 성경에 대한 지식과 지난 100여 년간 교회 역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이야기가 바로 이 순간 기독교회의 상태를 너무나도 잘 그려주고 있음을 알것 입니다. 교회는 물론, 자신의 신을 세우는 문제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일을 거듭 시행해 왔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저에게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다만 지난 100여 년 동안 소위 성경에 대한 새로운 비평적 자세에서 일어났던 일을 지적하겠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질렀던 그 죄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더 이상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계시에 복종하지 않으며, 자신을 계시의 판단자로 세웠고 그 계시가 어떠해야 함을 스스로 결정지었습니다. 그 죄는 금송아지를 만든 죄와 같았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저는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보다 자신을 높이 세웠습니다. 철학이 계시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슴없이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 교회를 지도하는 탁월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구약의 하나님은 자기가 믿지 않는 모리배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에도 스스도 기독교 설교자로 자처하면서 "시내산에 앉아서 공갈을 치는 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약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 마치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오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러한 일은 출애굽기 이야기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적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적에 대한 기록은 단순한 신화에 불과한 것이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진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려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이적이나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동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매우 공공연한 방식으로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자기들의 금귀걸이를 빼내어 눈에 보이는 신상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원리에 있어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신을 만드는 것이고, 자신의 신이 어떠해야 함을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며, 자신이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일종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늘 그렇듯이, 일단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하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도덕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이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경배하는 일만하지 않고 춤추고 마시며 범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엄첨나게 부도덕한 죄들을 접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와 똑같은 일을 주목해 왔습니다. 옛 복음주의적 종교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서 새로운 신을 세우노라고 하는 이 영리한 사람들, 바로 이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도덕적 상태를 낳았습니다. 경건이 없으면, 도덕도 없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도덕적인 시기는 부흥이 일어나 영적 각성이 있은 다음 시기였습니다. 새 신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경배할 때 윤리의 추락을 가져왔고 도덕성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교회와 세상 속에서 똑같은 일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예배, 거짓된 종교, 거짓된 신상, 끔찍한 죄와 악의 상태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죄를 징벌하십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것이지만, 저는 20세기에 겪었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지난 19세기의 배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는 적절하게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방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징벌하셨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들의 그 끔찍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는 진영의 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32:26)고 말했습니다. 레위 자손들이 나오며 그에게로 왔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된 후에는 반드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나팔이 울리고 구분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도 어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점에 대해 분명히 합시다.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언제나 성경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만이 진리임을 깨달아 그 불꽃을 언제나 유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구분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그 계시와 가르침에 복종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교회 안에서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구분입니다. 저는 여러 종파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저의 오직 한가지 관심은 "주의 편에 선" 사람들과 자기들의 신과 자기들의 관념과 자기들의 사상들을 섬기는 자들 사이의 구분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이야기 속에서 듣는 첫번째 요점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우리는 모세가 중재한 우리의 당면 문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 중에 하나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출32:31-32). 그러고는 잠깐 쉬고 즉각 나아가지 않았습니다.잠시 후에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 모세가 중재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그는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백성들과 하나님의 진노 사이에 서서 "나를 심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는 물론 그 백성들의 죄를 짊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고상한 심령이 이 큰 사건 속에서 매우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것은 모세의 중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33:1-3에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 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사실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이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너에게 말한다. 그들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네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라. 그들이 행한 일을 볼 때, 나는 더 이상 너와 함께 가지 않으련다.
내가 이제까지 너희 중에 함께 있었다-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미지를 나타내시되,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내셨습니다.-그러나 나는 더 이상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혹 내가 너희를 진멸할까봐 감히 너희와 함께 있지 못하겠다. 나는 너를 인도할 천사를 보내어 네 앞에서 너희 원수들을 제거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라. 내가 너를 지도자로 세웠다. 이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러 들어가라. 그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겠다. 너를 도울 천사를 보내겠다. 앞으로 나아가라."
그때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은 그것에 대한 모세와 교회의 반응입니다. 이러한 일은 언제나 부흥에 있어서 첫번째 단계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처한 입장이 어떠했는지를아십니다. 즉 그들의 죄와 하나님의 선언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아십니다. 부흥의 첫번째 단계는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처럼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배역한 사람들, 그 이름을 모독하고 모세를 비판한 사람들, 아론으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고 섬겼던 그 사람들이 갑자기 무엇엔가 사로잡혔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자기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궁극적인 중요성을 가진 문제입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어떠한 부흥의 소망도 없습니다. 이것은 상황에 대한 각성입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구름이 사라집니다. 불기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떠나가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떠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눈에 보이는 표지와 상징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불만을 깨닫고 인식하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부흥의 역사든지, 교회에서 일어난 어떤 위대한 영적 운동에 대한 기록이든지 다 읽어 보라고촉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언제나 이러한 일이 일어났음을 즉시 발견할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 중세 교회의 어리석음을 조금씩 인식하게되고, 면죄부 판매와 다른 무모한 행동들을 깨닫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그가 다루기 시작한 첫번째 일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명백히 알기 전에 교회의 섬뜩한 상태를 인식하게 되었고, 교회의 죄와 배은 망덕한 교회의 상태와 교회 속에 들어와 참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우상 숭배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이 사람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러한 사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이것은 첫번째 단계입니다. 만일 보편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교회에 이것에 대한 증거가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저는 더없이 행복하겠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멈춰서서 사실들을 대면하며, 기독교회의 참된 상태를 보기 시작했다는 어떤 조짐이 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다면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그런 것이 어느 정도 있기까지는 참된 부흥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단계입니다.
복음적인 교파에서도 이것을 많이 볼수 없다고 감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 우리의 한 가지 특유한 위험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분리시키고, 매년마다 계속되는 집회로 우리 자신을 바쁘게 만들며, 기념회다, 우리가 해왔던 일에 대한 보고회다, 무슨 여름 캠페인이다 등등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상태를 시험하는 방식은 분명히 잘못된 것과 교회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상태를 시험하는 시금석은 교회를 신약이 말하는 교회상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개혁이나 부흥이 일어났던 위대한 시기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위대한 영적 표증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 있었던 시기에, 교회가 어떠한 모습을 취했던가를 살펴보면서 거기에 현재의 교회 상태를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가 그러한 교회와 자기들을 비추어 볼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의아합니다. 영성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차원에서 교회를 평가할 때 어떠한 모습으로 보입니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 하나님의 임제와 우리가 이 연구를 통해 계속 숙고해 나갈 것들로 교회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상태에 여러분은 만족합니까? 진리를 믿고, 복음적이며, 자유주의 신학에 속하지 아니한 여러분은 자신의 상태에 만족합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실제적인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합니까?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의 체험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우리도 정직하게 그와 함께 일종의 긴장 상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아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좇아가노라"(빌3:10-14)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긴장감과 근심과 압박감을 느낍니까?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바울처럼 우리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죽음을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여러분이 아파 누워 있을 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야만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느낍니까?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시험하는 방식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궁핍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부흥을 위한 참된 기도와 중보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잘되고 있습니까? 만족합니까? 팔장을 끼고 앉아서 "일들이 놀랍게 진행되고 있다. 그 보고들을 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부요하다, 풍족하여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이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과 늙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 자신들을 살피고 우리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신약에 묘사되어 있는 교회와 우리 자신의 차이를 인식합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시고 불쾌해 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지난번에 부흥을 통해 자기 백성들 가운데 임하셨을 때가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그처럼 오랫동안 그러한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처럼 섬뜩하게 오랜 기간이 계속흐르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어째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교회가 어째서 이처럼 보잘것 없게 되었습니까? 어째서 교회가 그처럼 감화력이 없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그처럼 죄 가운데 살며,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첫번째 단계는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일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고심하여 생각하기 시작해야 하며, 이러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현재 처한 입장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두번째 단계, 33:4에서 언급하고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여기에 다음 단계, 회개가 나옵니다. 물론 여러분이 사실들을 대면하기 전에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들을 대면했다면, 문제는 계속해서 회개로 나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가치없는 피상적인 호기심으로 사실들을 대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회하는 것과 회개하는 것 사이에는 정말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사실들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아 나는 어리석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렇게 했기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고는 그냥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후회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회개는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고린도후서 7장에서 완벽하게 묘사합니다. 거기서 그는 회개의 의미를 고전적으로 진술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8-11)
이것이 바로 참된 회개에 대한 완벽한 정의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의 경우에서 그것을 살펴보십시오. 거기에 회개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완벽한 예증이 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멈춰 서서 순리대로 일이 잘되지 않았으며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것의 섬뜩함을 인식해야 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자신들을 미워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 것도 그것입니다. "너희들이 그 문제를 그저 슬쩍 보지만 않고 너희 자신들을 시험해 보았고 너희 자신들을 스스로 질책하였으며 너희 자신들을 미워하였고 너희 자신들에 대해 복수를 하였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진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한 일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우리는 방금 송아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섬겼으며 범죄했다. 우리는 스스로 배은 망덕한 짓을 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우상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미워했으며 혐오했고 철저하게 자신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이 지은 죄의 심각성을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보아도 이것이 이렇게 나쁘거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떠하랴?"
탕자가 바로 자기가 행한 일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는 들에서 돼지와 함께 있기 전에는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맨 먼저 자신을 보았고,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발로 찼고 스스로 자신을 미워했으며 정죄했습니다. 그런 다음 자기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내게도 그렇게 보이거늘, 내가 건방지게 굴면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구하고 집을 떠났을 때 아버지 눈에는 그것이 어떻게 보였을까? 나는 아버지가 내게 제안했던 모든 것은 다 일축해 버렸다. 그 일이 내게 이렇게 느껴지거늘 아버지께는 어떠하였을까? 내가 돌아가서 아버지를 대면할 수 있을까?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셨을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죄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죄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우리는 그것을 재빨리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 죄가 하나님께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단계를 거쳤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셨는데도, 우리는 그분께 등을 돌리고, 어리석음과 이기주의로 우리 자신의 신을 만들어 우리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까? 다시 부흥에 대한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처음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주목하십시오, 그런 일이 그들에게 필연적으로 먼저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무섭고 섬뜩한 것인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잠시나마 교회의 상태를 잊고 자신의 고뇌를 망각합니다. 하나님앞에서, 죄에 대해서 생각하느라고 말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끔찍합니까? 특별히 처음에 그러한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죄의 죄됨을 알아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그런 상태까지 이르지 않으면 결코 부흥은 없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날카롭게 느낀 나머지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죄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더 나아가 이 사람들이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를 보시는 방식 때문에 그들로부터 떠나가셨으며 하나님없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애굽에서 그들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 홍해를 지나 여행할 동안 그분의 능력을 느끼도록 역사하셨던 하나님, 비하히롯과 바알스본 산 사이에 끼여 있었고
뒤에는 바로 군대,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인 상태에 처했던 그들과 함께 계시던 하나님, 그곳에 임하셔서 홍해를 가르시던 하나님,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슬퍼하게 만든 것입니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이 나쁜 소식을 듣고)...."- 정말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그들을 괴롭게 했던 것은 진멸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아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테니 너희 혼자만 가라. 내가 천사를 보내고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각성하면, 하나님의 임제를 잃어버리는 것 처럼 심각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저의 진정한 요점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된 땅으로 보내시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겠다. 나는 너희를 종 되었던 자리에서 인도해 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희를 보내고 있다. 앞으로 가라 모세야. 그들을 인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할 천사를 보내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가지 않으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총명의 진수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취해야 할 입장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갑자기 각성을 하여, 이 엄청나고 심오한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곧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어떤 축복을 받는다 할지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젖과 꿀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그 소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인식이 없이도 우리의 원수들을 이겨낼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줄 천사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을 확실히 파멸시키고 우리로 그 땅에 들어가게 할 천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나안에 있습니다. 젖과 꿀을 얻습니다. 모든 것이 다 옳아 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해서 말하는 시편 106편에는 섬뜩한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15절) 표면적으로는 풍요롭고 번창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두드러지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즉 많은 재정과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번창하며 많은 회심자들을 얻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원수가 패배당하고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가고 기독교 신문들이 그 사실을 보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놀라워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시는가? 진실로 그가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우리가 올바르게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인식하는가? 이것이 바로 이 사람들에게 문제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젖과 꿀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원수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원합니다."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그는 축복을 추구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였다. 나는 대단히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나는 만족하지 않았다-"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번영이나 어떤 유의 성공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보상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16:26).
그리스도인들이여, 저는 여러분이 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여러분이 행복하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여러분이 교회 일에 능동적인지,
아니면 다른 기독교 활동에 열심을 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계십니까? 그가 진영에 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지만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다만 그 천사와 지도자를 통해서만 능력과 힘을 주고 계십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며 인격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은 회개했습니다. 회개의 목적,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빼놓고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 주여, 주를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하며 고통스럽게 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이 상황에 대면하였을 뿐 아니라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 성경이 얼마나 완벽합니까?- 그들은 회개했다는 절대적인 증거를 나타냈습니다. 다시 이것은 후회와 회개의 차이점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단순히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고, 너무나 심오하여 사람의 의지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7장에서 말하듯이 회개는 행동을 유발합니다. "너희는 일을 바르게 했다.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기까지는 결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일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출33:4-6).
우리가 어떤 형태로나 모양으로든지 우리에게 해당되는 바대로 그러한 일을 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우리의 죄악성, 특히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죄악성이 어떠한가를 이처럼 심오하게 인식하고서,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것을 힘껏 최선을 다해 행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를 버리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단장품을 제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단장품들이 그들의 함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 때 쓴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일을 생각하는 것 조차 싫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단장품을 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단장품을 제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위인 전기나 부흥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어본다면 제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 것입니다. 언제나 이렇게 무언가를 제거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마 그 자체로는 매우 해로운 일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해야 합니다. 단장품, 그들은 그것을 제했습니다. 그들은 단장품을 모두 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리되, 새로운 헌신과 새로운 충성심으로 드립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바로 회개의 진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바를 인식합니다. 우리는 어떤 단계들을 또 취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한다면 어떤 사람들에게만 국한시켜 말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제하여야 할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예외 없이 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나 담배를 피우는 것이나
이러저러한 것을 지적하는 것만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 속에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즉 어떤 단장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악성을 알고,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교회가 이러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것을 뜻하는지를 인식하게 되면, 참된 회개를 통해서 각자는 자신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단장품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을 거꺼이 신속하게 처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그러나 분명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첫번째 단계요, 시초에 불과하며,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며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것이 경건한 슬픔과 심오하고 깊은 회개의 역사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십니까?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 만족하십니까? 모든 것이 잘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계속 달려나갈 수 있습니까? 회의와 예배와 여러 활동들- 놀랍습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십니까? 그가 생활 가운데 계십니까? 우리와 그와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면해 보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경건한 슬픔과 회개로 이끌 것이고 실제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사 그 상황을 보게 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정직한 마음을 갖고 우리의 내면의 진상을 보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로이드 존스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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