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해 일어서다
김기석(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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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해 일어서다
삿3:7-11
[이스라엘 자손이 주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분노하시고,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 넘겨 주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리사다임을 여덟 해 동안 섬겼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으니, 주님께서 그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한 구원자를 세우셨는데, 그가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니,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전쟁터에 싸우러 나갔다. 주님께서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넘겨 주셨으므로, 옷니엘은 구산리사다임을 쳐서 이길 수 있었다. 그 땅은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을 때까지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메마름과 목마름 속에서
혼돈과 공허 속에서 빛을 창조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고시원 쪽방에서 지내다가 화재로 유명을 달리한 이들, 삶의 곤고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세상으로 탈주를 감행한 이들에게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미세먼지가 자욱한 요즘, 며칠 비까지 내려 마음이 참 스산했습니다. 어지럽게 흩어진 낙엽이 우리 마음인 듯싶었습니다. 세상살이에 멀미를 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갈대’라는 시에서 어느 날 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고 노래합니다. 그 몸을 흔드는 것은 ‘바람도 달빛‘도 아니었습니다.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말합니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어쩌면 인생이란 울면서라도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대물림되는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어린 시절부터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아이들,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얼굴들을 보면서 괜히 마음이 짠해지곤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해맑게 웃습니다.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나누면서도 기뻐합니다. 누구도 다른 이의 몫과 자기 몫을 비교하면서 불퉁거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부박한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가난을 예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부유함을 선이라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진짜 가난이란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나눔에 인색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거친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자기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습니다. 하루하루 생존 그 자체가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 속에 사는 이들이라 하여 삶의 곤고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고,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문제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았다고 하여 인생이 저절로 환해지지는 않습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길을 이미 찾았거나 길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는 인간과 그런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어긋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정직하게 돌아보면 우리도 호세아서에 등장하는 고멜과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기보다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정부의 뒤를 따라갈 때가 많으니 말입니다. “그는 자랑하기를 ‘나는 나의 정부들을 따라가겠다. 그들이 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고, 내가 입을 털옷과 모시옷과, 내가 쓸 기름과 내가 마실 술을 댄다‘ 하는구나“(호2:5). 하지만 그 길은 행복의 길이 아닙니다. 욕망과 쾌락을 부좇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사막처럼 메마르게 하고, 메마른 땅처럼 갈라지게 하여, 마침내 목이 타서 죽게 하겠다“(호2:3).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인생의 문제가 하나님을 등지고 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옷니엘과 악사
오늘은 사사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길을 밝혀보려고 합니다. 사사기는 열 두 명의 사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외부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받을 때 지파동맹을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선 전쟁 영웅들 여섯 명과, 평시에 재판관의 업무를 수행했던 소사사 여섯 명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습니다. 사사기의 이야기 구조는 매우 도식적입니다. 일단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세상을 보며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손을 빌어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그 가혹한 시련의 시간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와 더불어 평화가 자리 잡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또 다시 죄의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는 죄, 심판, 부르짖음, 구원자의 도래, 평화, 그리고 다시 또 죄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를 보여줍니다. 다소 도식적이긴 해도 이 구조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상입니다. 사람은 은혜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세월과 더불어 은혜의 기억은 흐릿해지고, 욕망은 날이 갈수록 또렷해지기 때문입니다.
옷니엘은 첫번째 사사입니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 때입니다. 유다 지파에 속했던 갈렙이 드빌 곧 기럇세벨을 치러 갈 때, 갈렙은 그 도성을 쳐서 굴복시키는 자와 자기 딸 악사를 결혼시키겠다고 선언합니다. 여성을 소유물로 간주했던 시기임을 감안하고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때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나서서 기럇세벨을 정복합니다. 갈렙은 약속대로 옷니엘과 악사를 결혼시킵니다. 악사는 매우 적극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남편에게 아버지를 졸라 밭을 얻어내라 합니다. 옷니엘이 주저하자 악사는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 메마른 땅을 주셨으니, 샘 몇 개만이라도 주시기 바랍니다”(삿1:15). 갈렙은 딸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습니다. ‘메마른 땅’은 네겝 황야를 뜻하는 데, 그곳은 척박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불모의 땅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축뿐이었습니다. 옷니엘의 삶의 자리는 도회적 삶과는 구별되는 광야였던 것 같습니다.
∙구산리사다임의 지배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가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은 좀 달랐습니다. 정착민들이 누리고 있던 풍요로운 삶은 오랜 광야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사기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그 땅에 남겨두신 까닭을 가나안 정착 과정 중에 벌어진 일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이방적인 문화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들에 순종하는지,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삿2:22, 3:4).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의 풍습과 종교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방의 문화를 변혁시키기보다는 그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그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풍요의 환상에 이끌려 신을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야훼 하나님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거룩한 삶, 약자들을 보호하는 삶, 이웃에 대해 책임적인 삶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욕망하는 바를 이루어준다는 이방 신들이었습니다. 본문 7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주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저버리다’, ‘우상을 섬기다’, ‘악한 일을 저지르다’라는 말이 한 문장 속에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셋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인간의 의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은 누군가의 동료가 되고, 남들을 보살핌으로 성숙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악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은 ‘탐욕’을 매개로 하여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이용하려 할 때 인간은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망각에서 비롯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구산리사다임은 ‘두 배로 악한 구산 사람’이라는 뜻인데 누구를 지칭하는 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사사기 저자가 하나님의 징계가 얼마나 엄중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산리사다임에게 8년 동안 억눌렸습니다. 억압과 폭력이 일상이었을 것이고 가혹한 세금이 매겨지기도 했을 겁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행복의 꿈은 악몽으로 변했고, 그 꿈에서 쉽게 벗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르짖음’은 참회의 표시가 아닙니다. 못 살겠다는 아우성 곧 시련에 대한 즉물적인 반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약자들의 부르짖음에 예민한 분이십니다. 그 백성들의 배신에 분노하면서도 그들이 겪는 시련을 보면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앞지르지 못합니다. 이 못 말리는 사랑 때문에 인간은 돌이키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옷니엘도 성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모르진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그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거대한 흐름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압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선한 이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시끄러운 불화보다는 조용한 침묵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옷니엘을 사로잡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옷니엘은 네겝 황무지에서 강건하게 자기를 지키며 자족적인 삶을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그를 공적인 삶의 현장으로 소환했습니다.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기도와 명상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독일의 루터교 목사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1842-1919)의 말은 안일한 우리의 신앙생활을 아프게 뒤흔듭니다.
“이미 이 세상엔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충분히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자기주장을 논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사람은 너무 부족합니다!“(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나라], 전나무 옮김, 대장간, 2018년 5월 28일, p.103)
그는 꾸며진 경건성 안에서 안심하는 자들은 결코 종으로는 쓸모가 없다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떠는 자들, 진리의 말씀에 부서지고 충격 받은 사람들, 그럼에도 기쁘게 ‘예’라고 대답하며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주님의 사람들”(같은 책, p.105)이라고 말합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진리의 싸움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아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서는 자기들의 걱정거리만 쏟아냅니다. 어떤 이는 두통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하고, 어떤 이는 영혼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지만 모두들 고난 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들은 조금도 고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고통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지 않는다면 이 혼돈을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오직 싸움만이 유일한 선택이며,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항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외에는 딴 길이 없습니다.”(같은 책, p.78ff)
∙안일을 깨뜨리고 일어나
옷니엘은 진리의 말씀에 부딪쳐 부서진 사람입니다. 기쁘게 ‘예’라고 응답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사가 되어 전쟁터에 싸우러 나가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민족을 구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승리이지만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께서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넘겨 주셨으므로, 옷니엘은 구산리사다임을 쳐서 이길 수 있었다”(삿3:10)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벌이는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황폐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옷니엘이 죽을 때까지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고 말합니다. 평화의 시간이 정말 그렇게 길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창조적 긴장이 사라질 때 영혼의 전락이 시작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이어지는 대목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삿3:12)는 말로 시작됩니다. 마치 데자뷰(deja vu, 旣視感)와 같습니다. 반복입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핑계로 우리의 현실을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반복을 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옷니엘은 자기만족 속에 머물지 않고, 공적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안일을 깨뜨렸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회적 소외와 아픔을 겪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이 마음 놓고 울 수 있도록 품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도 해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이며 피안적인 현실만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사실 하나님 나라의 전진에 가장 큰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삶은 여전히 힘겹습니다. 그렇다고 그 무게에 짓눌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일어서게 합니다. 홀로 잘 사는 꿈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애쓸 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데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님의 초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