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수넴 여인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천국생활 2019. 2. 15. 11:59

수넴 여인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김기석(201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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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넴 여인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왕하4:11-17
(2019/02/13, 주현 후 제5주)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에 갔다가, 그 다락방에 올라가 누워 쉬게 되었다. 엘리사가 자기의 젊은 시종 게하시에게,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고 하였다. 게하시가 그 여인을 불러오니, 그 여인이 엘리사 앞에 섰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말하였다. "부인께 이렇게 여쭈어라. '부인, 우리를 돌보시느라 수고가 너무 많소. 내가 부인에게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소? 부인을 위하여 왕이나 군사령관에게 무엇을 좀 부탁해 드릴까요?'" 그러나 그 여인은 대답하였다. "저는 저의 백성과 한데 어울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물었다. "그러면 내가 이 부인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게하시가 대답하였다.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의 남편은 너무 늙었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그 여인을 다시 불러오게 하였다. 게하시가 그 여인을 부르니, 그 여인이 문 안에 들어섰다. 엘리사가 말하였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부인께서는 품에 한 아들을 안고 있을 것이오." 여인이 대답하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예언자님! 하나님의 사람께서도 저 같은 사람에게 농담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 여인은 임신하였고, 엘리사가 말한 대로 다음해 같은 때에 아들을 낳았다.]

∙일상이야말로 복의 통로
주님의 자비와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설날 연휴를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 우리 시선을 끈 인물은 단연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었습니다. 그는 응급 의료 체계를 바로잡는 일에 생을 걸었던 분입니다. 편안한 길을 찾는 게 사람의 본능이건만 그는 편안한 길을 외면한 채 가야 할 길을 뚜벅뚜벅 걷다가 예기치 않은 시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응급 상황에 처한 이들이 따뜻하게 돌봄을 받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가 그는 홀연히 세상을 등졌습니다. 주님이 그를 품에 안으시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해주시기를 빕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 보여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자기 생을 바치는 의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작년 12월 11일에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세상을 떠난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 씨의 장례식이 어제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다시는 그런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을 것”(시144:14c)이라는 시편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나날입니다.

일상의 반복이 어떤 이에게는 권태로울지 몰라도, 어떤 이에게는 가장 간절하게 누리고 싶은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잠을 자고, 밥 해 먹고,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책 보고, 음악을 듣는 일상은 일견 지루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유입되는 통로입니다. 세상의 온갖 것을 다 누려본 전도서 기자는 자기가 깨달은 바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3:12-13). 우리가 지금 이런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리고, 피 흘린 이들 덕분입니다. 이런저런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은 그런 일상의 평온을 박탈당한 채, 슬픔의 기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 이들의 시린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이 홀로가 아님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세상은 늘 우리 삶의 평온을 깨뜨립니다. 욕망을 자극하거나, 흥분하게 만듭니다. 느긋한 평화를 누리는 이들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고, 작은 차이도 못 견뎌합니다. 피해 의식이 큰 사람일수록 사소한 일에도 크게 분노합니다. 그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부릅니다. 혐오와 냉소가 넘치고,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조차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혐오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깁니다. 특별한 계시나 신비 체험을 빌미로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이들도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자기가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만’에 빠진 거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그 뿌리인 광신을 더욱 강화하여 “믿음과 사랑의 샘물, 그리고 의와 참된 성결의 샘물을 말려 버립니다”(<웨슬리 설교전집3>>, 한국웨슬리학회 편, 대한기독교서회, 2006년 5월 30일, p.31). 교만한 이들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설득당할 가능성 또한 별로 없습니다. 오직 자기 판단과 의지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점점 불친절하게 변하고 악마적인 성질을 드러내기까지 합니다. 종교는 늘 특별해야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근한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 참된 종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는 법
엘리사와 수넴 여인 이야기는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어 선지자가 된 엘리사는 요단강 좌우편 지역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보살폈습니다. 갈멜 산지에서 이스르엘을 거쳐 사마리아와 도단에 이르는 지역, 사해 근처의 여리고에서부터 길갈, 요단 동편의 길르앗 라못에 이르기까지 그의 활동 반경은 상당히 넓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예언자라기보다는 왕의 조력자인 동시에 책략가였고, 또 민중들의 위로자와 교사, 그리고 기적 행위자였습니다.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함으로써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유산의 원인이 되는 여리고의 물 근원을 고쳐 생명의 샘물이 되게 하거나, 솥에 든 독을 해독하기도 했습니다. 빚에 몰려 두 아들을 종으로 팔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선지자의 아내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서, 기름병에서 기름이 마르지 않는 이적을 통해 그들이 살아갈 방편을 마련해준 적도 있었습니다. 시리아의 대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줌으로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깃들게도 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영적인 혜안을 발휘해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천리안을 가진 그를 제거하기 위해 밤 사이에 몰래 성을 포위한 시리아 군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마리아로 이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왕이 그들을 죽이려 하자 만류하면서 차라리 그들을 잘 대접하여 돌려보내라고 말함으로 평화의 가능성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가 감당했던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영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자였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엘리사는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왕하2:9) 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은 실로 놀랍습니다. 때로는 창의성의 원천이 됩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회막을 만들 때 하나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심으로써 회막에서 사용할 기물들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때로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하늘 군대가 되도록 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게도 하시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쳐주시기도 합니다(요16:8).

∙환대의 정신
엘리사는 공적인 역할에만 충실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수넴 여인과 얽힌 일화를 들려줍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역 이름으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이 ‘부유했다’고만 말합니다. 그 부유함은 물질적인 풍성함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꿰뚫고 있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잠언 31장이 말하는 ‘현숙한 여인’의 전형 같습니다. 부지런하고 유능하여 집안을 잘 건사할 뿐만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기민하게 대처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갈멜산에서 도단을 거쳐 사마리아와 여리고를 오가는 엘리사의 행보를 늘 주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아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엘리사를 어떻게든 돕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먼 행로에 지친 엘리사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곤 했습니다. 엘리사도 스스럼없이 그 집에 들러 쉬어 가곤 했습니다. 엘리사의 아름다운 사역의 이면에는 이런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예수 운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선교 여행에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여인들도 동행했음을 전합니다. 특히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 일행을 섬겼습니다(눅8:3). 여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예수 운동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은 단순히 음식 대접하는 일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여인은 남편과 상의하여 옥상에 벽으로 둘러친 작은 다락방을 만들고는 침대와 탁자, 의자와 등잔 등 필요한 것들을 갖추어 놓았습니다.(왕하4:9-10).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위해 마련한 그 공간을 저는 환대의 공간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환대의 공간은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기로 머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몇 해 전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저는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 환대의 정신과 만났습니다. 형제들은 친절했고 겸손했습니다. 짐짓 친절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친절했습니다. 어떤 강제도 없었습니다. 기도회에 동참하든 동참하지 않든 그건 당사자의 선택일 뿐이었습니다. 왜 참석하지 않느냐고 힐난하지도 않고, 잘 참석한다고 칭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았스니다. 그렇기에 위선을 떨 필요도 없었고 위선을 떨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그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메이플 리지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낯선 방문자들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하여 무관심하지도 않았습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선선하게 웃어주었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었습니다. 웰컴 센터에는 공동체 출판부에서 출간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누구든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가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눈다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증 장애인들을 위한 공간인 라르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는 환대는 공동체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 가운데 하나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낯선 사람이든 방문객이든간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두려울 것이 없고 함께 나눌 진리의 보화를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가 된다.“(장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찬성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2년 6월 15일, p.213)

값진 보화를 가진 사람만이 다른 이들을 자기 삶의 자리에 맞아들입니다. 수넴 여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보상 없는 섬김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뭔가를 얻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는 여인의 호의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서인 게하시를 통해 자기가 도울 일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달라면서, 혹시 왕이나 군사령관에게 부탁할 것이 있냐고 묻습니다. 엘리사는 부유한 그 여인이 혹시라도 가난한 지역민들에게 봉변을 당할까 염려했던 것일까요? 하지만 여인은 “저는 저의 백성과 한데 어울려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여인이 지역 사회 사람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수넴 여인은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의 사심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순수한 섬김입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마음이 참 그립습니다. 보상 심리가 강할수록 사람은 불만에 빠지곤 합니다. 대가를 바라고 어떤 일을 할 때 우리 마음에는 시기, 분쟁, 비방, 악한 의심이 찾아듭니다. 바울은 ‘이익‘을 최우선의 관심으로 삼을 때 벌어지는 일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딤전6:5). 이건 어김없는 진실입니다. 저는 노자의 도덕경 44장에 나오는 구절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삽니다. “만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데를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몸을 오래 지탱할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만족함을 모르는 것, 멈출 줄 모르는 것은 영혼의 병입니다. 영혼이 빈곤한 이들일수록 이 병에 잘 걸립니다.

여인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을 돌봤습니다. 자기 백성들과 더불어 잘 어울리며 지낸다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도 잘 돌봤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을 짓는 마음입니다. 자식이 없었던 여인은 나중에 아들을 낳아 기르는 기쁨도 맛보았고, 일곱 해 기근이 들어 블레셋에 가서 살다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사람의 도움으로 남에게 넘어갔던 땅을 되찾기도 했습니다. 세상에는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지만(호8:7), 사랑을 심어 생명을 거두는 지혜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따뜻한 거처를 마련해주려는 수넴 여인의 마음과 그 여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세심하게 살펴서 해결해주려는 엘리사의 마음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빛이 됩니다. 무정한 세상, 저마다 이익에 발밭은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지만, 우리가 만나는 사람 한 분 한 분을 정성을 다해 대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려는 따뜻한 마음을 품을 때 하늘의 빛이 우리를 두루 비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이런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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