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구하는가?
김기석(2019/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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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구하는가?
눅11:5-1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하는 손
사순절 첫째 주일인 오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기도와 금식과 구제 훈련이 필요합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는 성도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금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금식, 게임 금식, 탄소 금식, 영상물 금식 등을 실천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금식이란 그러니까 편리함과 재미를 빌미로 우리 삶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것들로부터 조금 멀어지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는 뭔가를 하나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 상황들을 하나님 앞에 아뢰면서 해결을 호소하곤 합니다. 중병에 걸린 이들은 치유를 구하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곤경에서 벗어날 길을 청하고, 삶의 무의미성에 지친 이들은 회복을 기원합니다.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이들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과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저도 어려움을 겪는 교우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합니다. 시편을 묵상하다보면 시인들의 격렬한 표현 때문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거칠고 반항적인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습니다. 시편은 인간의 숭고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인간 속에 있는 욕망의 격렬함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는 까닭은 그런 감정들을 부정하거나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늘 욕망 주위만 맴돌면 안 됩니다. 기도는 나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그렇기에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가슴 앞에 단정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이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16세기의 독일 화가 알브레흐트 뒤러가 1508년에 그린 ‘기도하는 손’은 웬만한 이들은 다 보셨을 겁니다. 이 그림을 두고 감동적인 일화를 지어낸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그림은 프랑크푸르트의 직물 상인인 야곱 헬러Jacob Heller가 주문한 제단화를 위한 습작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제단화보다 이 ‘기도하는 손’이 더 유명해진 것입니다. 그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기도를 위해 모은 두 손이 마치 고딕식 건물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딕식 건물은 마치 세상의 인력을 떨쳐버리고 하나의 중심을 향해 올라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하지만, 좋은 기도문을 읽는 것도 아주 중요한 훈련 가운데 하나입니다. 좋은 기도문은 우리의 기도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우리가 정말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고, 우리 신앙의 신비와 기쁨을 알게 해줍니다. 저는 올해 사순절 순례를 시작하면서 ‘Hearts on Fire’라는 예수회 기도문을 들고 다닙니다. 이 기도집 제목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에 서로 나눈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길에서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눅24:32) 주님과 만난 이 뜨거움을 나누면서 우리 신앙의 깊이와 폭을 넓히는 게 바로 성도의 교제입니다. 어제 읽은 Joseph Tetlow, SJ의 기도문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오, 나의 주 하나님,
주님은 나를 허무의 잠에서 깨우셨나이다.
그것은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안에서
나를 선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나의 이름을 부르셨나이다.
주님은 내게 호흡과 빛과 활기를 주셨고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나와 동행하셨나이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주님께서 내게 다가오시고,
이렇게도 소중히 여겨주시는 그 크신 사랑에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신실함을 내 속에 창조해 주십시오.
이제 주님을 굳게 의지하고, 온 종일 주님만 갈망하겠나이다. 아멘.
(Edited by Michael Harter, SJ, , LoyolaPress, Chicago, 2004, p.14)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오늘 본문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주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밤중에 손님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대접할 빵이 없었습니다. 손님을 굶겨 재울 수는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그는 이웃집에 찾아가서 말합니다.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이때 집안에 있는 친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이 질문은 차마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결국 친구의 청에 응한 것은 우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졸라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우정보다 강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더 움직이게 만든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걸 두고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이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시려는 메시지입니다. 친구를 굶겨 재울 수 없다는 그의 절절한 마음이 결과를 이루어냈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정말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절실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는 게 우리 버릇입니다.
지금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진실하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믿는 이들은 비관주의자 혹은 허무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끈덕지게 희망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아주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던 택시업계와 카풀 업계 사이의 갈등이 일단 봉합되었습니다. 평일 출퇴근 시간 각각 2시간 씩 하루 네 시간은 카풀을 허용한다는 내용입니다. 사회적 대타협기구가 거둔 작은 열매입니다. 이 일의 실무를 맡았던 전현희 의원은 4개월 동안 택시업계를 148번이나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를 향해 물병이 투척되는 일도 있었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을 보고 양측이 대타협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이런 끈질김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길을 묻다
이어지는 내용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입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눅11:9-10). 같은 구절이 마태복음에서는 7장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명령어는 막연히 기도의 효능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주님은 형제에 대해 품는 분노, 음욕, 간음, 보복에 대해 가르치셨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경건 행위를 꾸짖으셨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함부로 심판하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리라’는 명령은 그 후에 나옵니다. 이게 본래의 맥락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그런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의지만으로 그렇게 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덧입어야 합니다. 은혜 없이는 자기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바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입니다. 요한 공동체도 동일한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15:7)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에만 밑줄을 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앞의 전제조건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이라는 구절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모르면서 ‘믿습니다’만 반복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면서 한계를 절감할 때마다,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 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구하는 이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마태가 ‘좋은 것’이라 한 것을 누가는 ‘성령’이라고 바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힘을 공급하십니다. 봄바람이 불어와 꽃들이 피어나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 속에 잠든 생명을 깨우는 힘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슥4:6)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순절 순례 여정을 통해 우리 기도가 더 깊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잇댄 채 끈질기게 평화와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길 원하십니다. 아멘.